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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로운 Jan 31. 2023

질투는 나의 힘

청출어람 - 자격없는 Giver에 대하여

내 생애의 가장 큰 힘은 질투였다. 그건 인간의 기본욕구인 인정욕구에 맞닿아있음과 동시에
때론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된 자각이기도 했다.

주변 친구들의 장점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 친구의 어떤 점이 빛나는지, 알아주고 말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었다. 알고 있었다면 공감대가 되어 기뻤고, 모르고 있었다면 다시 말해줄 수 있어서 기뻤다. “넌 역시 ~~를 잘하는구나! 넌 역시 재능 있어.”라는 말은 나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나누기를 좋아하는 터라 클래스나 멘토링, 컨설팅 같은 걸 자주 진행했고, 내가 알고 있는 최대한을 공유하고 또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우려고 했다. 여러 프로그램을 다수 진행하면서 만났던 사람에겐 모두 진심으로 상대가 잘 되었으면 했다. 그건 후배도, 친구도, 애인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우연히 A를 다시 발견했다. A는 마케팅에 정말 타고나 두각을 보이는 친구였다. 만나는 내내 그의 촉이 살아있음에 감탄했고 그의 덕으로 사업에 도움이 되는 여러 레퍼런스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더 큰 회사로 옮겼으면 했다. 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더 마음껏 그의 역량을 펼치며 더 성장하길 바랐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공유했으며 공통 관심사 안에서 그가 나의 길에 함께 걸으면서도 나의 시행착오는 덜 했으면 했다. 내가 따온 자격과 라이센스를 그는 조금 더 수월하게 딸 수 있도록 적극 도왔고 그의 시야와 나의 실행력으로 우린 더 성장할 수 있는, 합이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내가 바빠지고 여유가 없어지면서 그를 더 만날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럼에도 끝내 마음속으로 서로를 응원하기로 약속했다. 자주 연락하지는 못하더라도 종종 혹은 마음으로나마 안부를 전하기로 하며, 만났던 시간들이 나에게 또 우리에게 터닝포인트가 되는 꼭 필요한 성장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를 다시 발견하면서 나는 엄청난 질투를 느꼈다. 내가 일에 치여 어떠한 자기 계발도 못하는 사이, 그는 꾸준히 많은 것을 이루었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조직 내의 인정, 꾸준한 독서, 더 넓어진 시야와 발전된 글, 새로운 사업의 준비까지.


사실 가장 바라던 일이었다. 가장 오래 응원했던 일이기도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엄청나게 추악한 질투와 함께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가 지어준 필명, 나와 똑같은 사업아이템, 이제는 궤도에 오른 필력, 이쯤 되면 그래도 그의 글 한 켠 땡스투 쯔음엔 내 이름정도는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귀감이 되는 롤모델이 하나 있었다.’ 혹은 ‘자극이 되는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정도라도. 그러나 연말의 글에도, 연초의 글에도 나의 흔적은 없었다. 서운했고 한편으론 서러웠다. 그는 스스로 나고 자라 타고난 사람 같았다. 침전하는 나와 부상하는 그 사이에 어떠한 간극이 더더욱 실로 거대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치졸하다는 자각과 동시에 내가 아는 당연함의 선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그가 혹시 땡스투에라도 나를 언급했다면 조금 덜 서운했을까. 혹시라도 갑자기 문득, 잘 지내냐고 연락이 왔더라면 덜 서운했을까. 그의 성장을 스스로 생경해하고 대견해하는 글에 왜 그저 그대로 전처럼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대단하다,"며 응원해주지 못했을까.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다. 그가 나보다 덜 하다고 생각한 것도, 덜 배우길 바랐던 것도 아니다. 뭐든 성장을 보는 것이 나의 만족이었다. 그는 나에게도 귀감이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걸 모르는 바는 절대 아니었다. 항상 나보다 더 가진 자는 많았다. 그 부분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그가 잘 되지 않길 바랐던 것도 아니다. 여태 멘토링을 진행하면서 내 후배들의 취준결과가 나보다 좋을 때도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자괴감이 들진 않았다. 그들의 인생이니까.


며칠을 헤맨 끝에 내린 결론은 나의 욕심이자 자만이었다. 내가 하지 못하는걸 턱턱 해낸 나의 동료이자 파트너였던 사람에게 오는 질투였다. 이제와 돌아보니 내가 놓친 기회비용이라는 게 생각보다 더 크다는 거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이룬 나와 끝내 이룬 그의 사이에 차이를 찾기에 급급했다. 억울함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나라는 멘토가 있었지, 나는 이런 멘토가 있었나? 나는 그에게 배운 게 무엇인가? 그는 나를 기반으로 성장했지, 나는? 왜 저런 사람을 놓쳤지? 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유튜브 신사임당이나 꿈나무 등 한 분야에서 뭔가 성공한 사람들이 주변인에게 꿀팁을 알려주는 경우가 있다.(aka.다마고치 프로젝트) 그 주변인의 순 수익이 본인보다 높아진다고 해서 정보 공유를 후회하는 모습은 없다. 그런데 나는? 그 정도의 성공도 못 거두어 놓고 이렇게 그의 발전조차 축하해주지 못하다니 내가 기버(GIVER)로서의 가치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나?


여태 후배들과 지내면서 나보다 뛰어난 후배들을 많이 봤고 앞으로 후배를 받으면서 많이 볼 건데, 이후 청출어람이라고 하기도 묘한 그들의 성장을 보며 그때마다 이럴 건가? 단지 이 시점 몇 년에 따른 경험치로 더 알고 있다는 자만에 나를 침전시킬 것인가? 그들을 청출어람이라 말할 정도로 내가 대단한 멘토인가?


결론을 내고 나니 스스로가 더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가르칠 만큼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몇 가지 시행착오에서 얻은 꿀팁을 공유했을 뿐이다. 그도 나에게 아는 만큼 충분히 건네주었다. 그 과정에서 충분히 즐거웠고 지켜보는 것만으로 행복해놓고, 그렇다고 말해놓고 이제와 후회하는 꼴이 엉망이었다. 남의 성장에 대한 질투에 눈이 멀어 나의 성장에 도움을 준 모든 이를 기만하는 짓이었다.


다만 성장하는 자의 곁에 있는 것이 나의 성장이자 기회이다. 그 곁은 나의 능력이 아니다. 그들의 배려일 뿐이다. 이로 인한 나의 성장에 기여한 모두를 감사하는 것은 그저 나의 성정일 뿐이다. 내가 대단한 것도, 그렇지도 않다고 하여 이상한 것도 아니다. 남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 미는 것은 자만이자 오만이었다.


내 생애의 가장 큰 힘은 질투였다.

다행이 여태도, 그리고 올해도,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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