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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 Aug 08. 2022

즐거운 여행을 위해 기꺼이 수면제를 먹겠어요.

우울증 환자의 살짝 정신 나간 독일 여행 에세이


반알의 리보트릴과 트라조돈 염산염 한알. 내가 자기 전에 먹는 약이다. 리보트릴은 원래 뇌전증(간질)에 쓰이는 약이고 트라조돈은 우울 삽화에 쓰이는 약이지만 두 약 모두 사람을 졸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수면의 보조제로 많이 사용이 되는 약이다. 리보트릴은 먹은 지 십 년이 넘었다. 우울증을 처음 치료하기 시작한 십여 년 전부터 함께한 약이다. 먹으면 30분 정도 이내에 몽롱하고 어지러운 기분이 드는데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잠으로 연결된다. 간혹 이 약을 끊어 보려는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내 우울증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정신 관련 문제도 야금야금 고개를 들면서 나를 괴롭힌 탓에 결국 끊을 수가 없었다. 뭐 그냥 받아들였다. 평생 먹을 각오로 말이다.


많은 여행에서도 약은 나와 같이 동행했다. 아무리 여행을 좋아한다고 한들 약을 안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잠들 자신이 있겠는가? 절대 아니다. 여행에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한다. 보고 듣고 겪는 거의 모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될 수 있다. 가령 몇 분 간격으로 울리는 독특한 사이렌 소리, 숙소 바깥에서 울리는 여행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공사 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예상을 한다고 해봤자 내 사정권 안에 들어온 이상, 방해 요소가 될 뿐이다. 이런 규칙적인 혹은 불규칙적이면서 예상을 할 수 없는(갑자기 큰소리가 난다던가 하는) 소리들이 밤까지 지속된다면 밀봉해 두었던 약을 꺼내는 수 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


한 번은 뮌헨에서 있었던 일이다. 인터넷에서 아주 괜찮아 보이는 숙소가 아주 저렴한 가격에 나왔길래 얼른 예약을 했다. 건물의 외관은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듯한, 오래된 전통 독일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실제로 내가 묶을 공간에 들어서자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캐리어에 있는 짐을 바닥에 다 널어놓고도, 팔 굽혀 펴기나 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힘들었지만 알찬 하루를 보낸 뒤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몇 분지 나지 않아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한국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필터링도 없이 들리는 것이다. 대화로 볼 때 옆방에 한국인 여자 셋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큰소리로 웃어대는 소리와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어땠는지를 이야기하는 조그마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벽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큰일이 났다. 과연 오늘 하루를 잘 지내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참고 참다가 짓누르는 스트레스에 못 이겨 옆방 문을 두드렸다.


Hello.

옆방에서 묵고 있는 사람인데요. 들리는 대화로 보아 한국분들이 신 것 같아서요. 근데 옆방에서 하시는 이야기가 굉장히 크게 들리네요.

아.. 아.. 네..

혹시 조금만 조용히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들려요.

아.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예상했겠지만 그들의 수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작되었다. 데시벨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가서 항의를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들도 즐기러 온 여행인데 이렇게 방음이 안된다는 것을 알리 만무했을 것이다. 나 역시 즐기러 온 여행에서 얼굴 붉히며 화를 내고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곧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약통의 리보트릴과 트라조돈을 꺼냈다. 평소에 먹는 양에 반알을 더 쪼개 넣어 더 많은 용량을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소리는 웅웅 거리는 정도로 들리기 시작했고, 왁자지껄한 소리는 더 이상 스트레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편하게 떠드세요. 저는 이만 자렵니다.


약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여행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을 것이다. 약이라는 게 이렇게도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거라면 이 약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예민하고 짜증도 잘 내는 이런 사람을 관대한 긍정주의자로 만들어 주는 이약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그것도 매일)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 것인가. 약과 하나로 묶어 나를 봐야 할 것인가. 나는 이약에 잠식당한 것일까. 또 다른 내 몸의 내장기관인 것인가. 많은 생각이 든다.


여하간 또 하루를 무사히 보냈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약과 나를 하나로 묶어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약에 감사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본다. 약을 먹는 것도 나의 의지, 먹지 않을 권리도 나의 의지다. 하지만 이런 선택지를 만들게 해 준 것은 내가 아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알의 약이 내 손 위에 들려있게 된 것이고 나는 그로 인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과 약이라는 것을 마냥 나쁘게만 볼 수 없다. 때론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그 선택이 주는 부작용도 같이 감수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 그렇지만 그것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선택이고 더 건강한 나를 위한 길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정신과 약을 먹는 비정상 적인 인간’이라는 편견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 약을 먹으므로 인해서 ‘보통의 사람들'처럼 무리 없이 상황을 넘어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먹지 않았다면 벌어질 수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상상하기가 싫다. 특히나 내가 고통을 받고 그 고통으로 인해 내가 잠식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더더욱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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