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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 Aug 15. 2022

아무 말

오전 약: 프로작 20mg, 부프로피온

아무 말이라도 적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며칠째 무언가를 쓰기를 두려워하는 자신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었다. 손톱이 길어 타자를 치기가 불편하다. 손톱깎이는 나로부터 불과 40센티 정도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대로 글을 쓰기로 한다.




머릿속이 다시 텅 빈 듯하다. 오전에 약을 먹은 탓일까. 생각의 흐름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프로작을 20mg으로 늘린 게 원인인 것 같다. 복잡 다난한 기분을 한결 다운시키는 작용은 내게 있어 장점이자 단점이다. 약은 반추나 관계사고 같은 잡생각으로부터 한층 자유롭게 만들어주지만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창의적인 작업을 할 때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이 용량은 최대한 절충해서 나온 값이다. 나를 그렇게 예민하게도 그렇게 둔하게도 만들지 않는 적정선의 값.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 내가 치러야 하는 값이기도 하다. 


프로작은 내가 우울증을 처음 진단받았던 11년 전부터 함께해오고 있는 약이다. 행복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세로토닌을 재흡수하는 것을 억제시켜주는, 다시 말해서 세로토닌을 뿜어 기분의 안정과 행복감을 주는 약이라고 할 수 있다. 긴장시켜주고 각성시켜주며 미래의 계획을 세우게 하는 도파민과는 결이 다른 호르몬으로 현재의 상황에 만족감을 주는 현재 지향형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약을 먹고 나서 우울한 기분이 많이 살라졌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편해졌으며 불안이나 짜증을 현저하게 줄여줌으로써 무난한 일상을 보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도움은 신경성 폭식증으로 고생을 하던 나를 구원해주었다는 것이다.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던 나를 도운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약이 가지고 있는 부작용이 조금 있는데 나의 경우엔 앞서 말한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주는 듯 한 느낌을 주거나 성욕을 줄이는 부작용이 있었다. 약의 용량을 많이 늘릴 수밖에 없었던 초기 몇 년 동안은 세상의 모든 욕정을 등지고 출가한 스님처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용량이 많이 줄어서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성욕이 줄어드는 자신을 보며 많은 좌절감과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다. 


현재는 부프로피온과 함께 나와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좋은 동반자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니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글을 쓴 줄로만 알았지만 그것은 나 중심의 글에서 잠시 참여한 조연 같은 역할을 했을 뿐 그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쓸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조만간 그들 각자의 삶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게 나쁜 부모인 채로 남겨두기 싫다. 그들의 과거와 조우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 조금은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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