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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 Mar 13. 2023

내게 관계사고가 생긴 과정

일상의 소리가 공격으로 다가온다



내가 타인이 내는 의미 없는 소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부정적으로 혹은 적대감으로 느끼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건 아마도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이 그 시작이지 않을까 싶다. 술에 취하면 유난히 소리를 많이 질렀던 아버지. 거기엔 엄마에 대한 비상식적인 분노와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욕과 우리를 향한 협박이 있었다. 그런 소리에 몇 년 이상 노출되다 보면 익숙해지겠다 싶을 수도 있다. 실제로 소리를 지르고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래 떠들어라. 난 아무렇지도 않아.

나를 안심시켜보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된 폭력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뇌와 가슴은 서서히 망가져 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의 노예가 된다는 것도.

많이들 알겠지만 그것은 서커스에서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코끼리가 힘도 거의 없는 아기일 때부터 사육사는 코끼리를 밭줄로 묶어 도망가지 못하게 말뚝에 밖에 놓는다. 얼마간 탈출을 시도하지만 줄에 묶인 말뚝은 아기 코끼리를 꼼짝도 못 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고 코끼리는 점점 지쳐간다. 이제 몸집이 커져서 묶인 말뚝이 자기의 힘으로도 쉽게 뽑힐 수 있을 정도가 되지만 코끼리는 이미 그 말뚝에 길들여져 버렸기 때문에 줄을 끊고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본인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20대가 되기까지 아버지의 폭력이라는 말뚝에 묶여 있었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면서 스스로가 그것에서 벗어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벗어난 것은 그와의 물리적 거리뿐이었다. 그의 폭력에서는 달아난 상태였지만 나는 여전히 심리적으로 그 기억에 노예가 되어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가만히만 있어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일상의 소리들이 있다. 그 소리는 누군가 물건을 내려놓는 소리일 수도 있고 문을 닫는 소리, 공사장 소리, 기계소리, 위층에서 내는 발걸음 소리 일 수 있다. 나는 그 소리가 아버지가 술병을 식탁 유리 위에 내리치는 소리, 잠긴 내 방 문을 쾅쾅 부서질 듯 두드려대며 내게 욕하는 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특별히 그것이라고 의식하진 못해도 이 십 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상처 입은 내 무의식은 그것이 나를 묶은 '풀 수 없는 밭 줄'이라고 여긴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꼼짝 못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순간 뇌는 정지해 버린 느낌이고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낸 문 닫는 소리가

넌 잘난 게 하나도 없는 놈이야. 넌 한심해. 니 애미랑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라고 마치 나를 향해 내지르는 욕처럼 느껴진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야만 해. 안 그러면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거고 그 화살은 내게 돌아올 것이니까.

나는 모든 것을 멈추고 가만히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야 그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잠이 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내는 소리는 내가 숨죽이고 있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돌아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것들이 있다.

그 상황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안타깝게도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를 향한 분노로, 나를 기죽게 만들기 위한 계략으로 말이다. 언제부턴가 타인들이 내는 소리가 나를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나는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 것에 더해 분노라는 감정이 쌓여갔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은 의미 없는 소리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나를 향한 공격이었던 적이 실제로 있었다.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던 시점. 나는 그 공격의 경험 한 번을 계기로 앞으로 벌어졌던 99%의 무의미함에 의미 부여해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쉽게 분노했다.

한번 생긴 관계사고는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점점 발전하고 그 범위가 넓어진다.  반복적으로 내는 소리에 더해 동작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쩝쩝대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볼펜을 까딱이는 소리같은 반복적인 소리나 다리를 떠는 것, 타인이 숨 쉴 때 만들어내는 규칙적 움직임까지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관계사고는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내용이 사회적으로 논리적으로 의학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관계망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는 정신 분석학에서도 명시를 하고 있는데 이런 관계사고가 망상이 되면 조현병이나 조울증의 조증등에서 보이는 병증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도 한때 조울증과 조현병 진단을 받을 뻔한 적이 있다. 의사 선생님은 나를 진료하는 것을 어려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계사고가 심해 조현이나 조울로 진단해보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지만 조현병으로 진단을 하기엔 그 정도가 심하지 않고 누구보다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누군가가 나를 해하기 위해 도청을 심어둔다거나 나를 살해하기 위해 누군가가 나를 뒤쫓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을지언정 그것을 확신했던 적은 없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그 원인이 소리 그 자체였기 때문에 소리만 사라지면 그 증상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런 관계사고를 겪고 나면 스스로에 대한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내가 비정상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 타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단순한 소리하나에 무너져 버리는 자신에 대한 증오는 나를 더욱더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리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일반사람들이 대표적으로 겪는 관계사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층간 소음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로 이 글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끔 이웃 간 살인이 일어난 뉴스의 댓글들을 보면 원인제공자에 대한 분노에 공감이 간다는 글이나 살인이 이해될 정도라는 댓글에 많은 공감수가 달리기도 한다. 한국의 인구밀도 치중현상과 건축구조 특성상 이런 사회적 여론 형성이 생기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위층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활발함이 아래층사람들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상황이 있다. 처음엔 이해를 하고 넘어가기도 하고 불화를 만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부처가 아니다. 소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면 아이들을 잘 통솔하지 못하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원을 넣거나 부모에게 가서 항의를 하고 싸워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것은 대체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 소음이 계속되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면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가하는 논리는 별 소용이 없어진다. 소음이 내는 상황자체로 분노가 생기고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며 나아가 어떤 경우엔 나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는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층간소음으로 인해 정신과에서 약을 타먹는다고 하소연하는 인터뷰나 댓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해결책을 드리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브런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관계사고라는 검색을 통해서 유입이 되는 것을 보면 관계사고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본인을 괴롭게 만드는 것인지 알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과정에 있는 자신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과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다. 조금이라도 내 글에 공감을 하고 본인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상담을 통해서 많은 부분을 극복했다. 나의 관계사고는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나타난 PTSD의 한 증상으로 치료가 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완치가 안될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받아들였다.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져 완치가 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아예 없애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정도를 줄여주는 게 치료의 목표이자 완치의 개념이라고 보는 게 맞다.


우리에겐 원치 않는 상황에서 가끔 움츠러드는 시간도, 상처받는 상황도, 그래서 한없이 나약하게만 느껴지는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건 내가 비정상이고 나약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의 평화로 가는 첫걸음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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