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병원을 찾아 떠도는
정신과를 다니며 치료를 하는 동안 내 삶을 거쳐간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는 많다.
정신과를 다닌 기간이 10년이 훌쩍 넘기에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닌 건 여러 환경조건 등을 고려했을 때 그 누구든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나 보통 한 병원을 선택하면 몇 년 이상은 꾸준히 다닌다.
초진의 과정을 다시 겪으면서
또 다시 나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좀처럼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과정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느껴질 만큼
병원과 맞지 않다고 느껴지면 바로 옮겨버렸다.
지나치게 무례한 선생님을 만나거나
내가 가진 병이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낫지 않는 경우엔
지체없이 다른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그리고 신기한건
실제로 바뀌는 병원마다 나는 전혀 다른 진단을 받기도 했고
다른 성분의 약을 처방받기도 했다.
한 병원에서 진단명이 여러 번 바뀌기도 했다.
병원의 탓으로 두고 원망을 하고자 올리는 글은 아니다.
그만큼 나의 병은 복잡하고
치료할 부분도 다양했으며
진단하기 어려운 축에 속했다고 믿는다.
우울증과 폭식증
첫 병원에선 우울증 진단을 받고 이사 때문에 옮긴 두 번째 병원에서
근 7년간 우울증과 폭식증, 불안장애 치료를 받았다.
그간 먹었던 약은 세로토닌 계열의 약이었으며
다행히 폭식은 사라졌고
우울과 불안도 약을 통해 많이 개선되었다.
해외에서 생활을 하는 몇 년간 중간중간 한국에 들어와 선생님을 찾아뵙고 진료를 받았고
좋아지는 나의 모습을 보시며
의사 선생님과의 관계도 두터워졌다.
하지만 치료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무기력과 외부 환경에 대한 민감함.
나의 가장 큰 적이었고
좀처럼 몸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때도 있었다.
타자 두드리는 소리나 주변의 다리를 심하게 흔드는 사람들이
내 시야에, 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일에 집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 부분은 세로토닌으로는 고치는데 한계가 있었고
내 몸이 더 이상 말을듣지 않는 듯 했다.
병원에서도 이 이야기는 말씀을 드렸지만
의사 선생님은 그간 좋아졌던 나의 모습을 보시며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전부였고
나도 더 이상 내가 가진 이 어려움을 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의 것으로 여기엔기
나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나에겐 점점 더 큰 고통이 되었다.
그래서 7년간의 선생님과의 진료의 연을 끊고 다른 병원으로 갔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다.
개원한지 얼마 안된 곳이었다.
새롭게 연 병원에서 느껴지는 선생님의 열정과 친절함,
살펴보고 연구하려는 의지, 긴 상담시간 등이 나에겐 큰 힘이 되었다.
이전 병원에서 그간 의사 선생님과의 쌓인 메타포는
진료의 시간과 에너지를 줄이는데 큰 역할 을 했고 그 점이 정말 좋긴 했다.
그렇지만 옮긴 병원의 선생님께서 다른 각도에서 계속 진단해 보고 시도하는 시간이
나에겐 정말 필요했던 순간이었고
나의 분산된 신경의 예민함과 무기력함을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던 순간이었다.
부프로피온과 아리피프라졸
처음 선생님께서는 그간 먹던 세로토닌과 함께 부프로피온 계열의 우울증 약을 처방해 주셨다.
부프로피온은 두 알을 권하셨고
그 이후로 나의 삶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소리와 주변의 행동들을 따라가던 나의 의식은
점점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내가 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때 나는 자발적으로 새벽에 일어나기 시작했고
내 일에서 조금씩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 해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다.
내가 하던 사업이 점점 번창하기 시작했고
부업으로 시작한 일에서는 내가 만든 상품을 보고
펀딩 업체로부터 기획전 제안이 들어왔다.
기획전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는 점점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의 예민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지하철에서는 옆에 사람이 앉으면 숨 쉬는 게 힘들었다.
옆사람이 숨 쉬는 게 느껴지면 나의 숨은 박자가 불안해지고
나의 온정신은 온통 숨을 고르게 잘 쉬어야 한다는 그 것에만 집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보통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관계사고 또는 망상이 의심되며
조현병 또는 양극성장애의 경계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아리피프라졸을 처방해 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옆사람의 숨을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때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내 머리를 때린 큰 당혹함을 감추고 설명을 쥐어 짜내야만 했다.
내가 옆사람에게 느끼는 숨은
바람이 나가고 빠지는 공기의 흐름도
초능력도 아니었다.
단지 옆사람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어깨의 들썩거림
배나 가슴의 부풀었다 줄었다 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던 것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쉬면서 나는 그간 내 인생에 꿰차고 앉은
나의 주의력에 대해 생각해야했다.
내가 얼마나 미묘한 것들에 신경이 빼앗겨 있었으면
그 정도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알아채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관계사고에 관한 재작년의 글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은 내 가 쓴 모든 글의 조회 수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관계사고를 검색하시고 들어오신다.
어쩌면 이 부분은 아직도 잘 연구가 안된 분야일 수도 있겠다 싶다.
청각과민증이라는 증상도
관계사고라는 정신과적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신체 물리적 치료와 서로 혼동되는 분야일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나의 경우엔 옆사람의 미묘한 움직임을 민감하게 알아챈다거나
소리에 집중이 분산이 되는 등의 증상이
조현병 및 양극성 장애로 진단이 될 수 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아리피프라졸과 리튬을 약으로 먹기 시작하면서
나는 관련 커뮤니티에도 가입하고 여러 의견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와는 맞지 않는 점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양극성장애라고 하기엔
나에게 일어났을까 싶은 기억나는 조증 에피소드는 없었고
예전에 대학 동기였던 친구( 분명하게 조울증으로 보일만한 증상이 많았다)와 비교하며
기억을 떠올려도
내가 가진 습관과 경험들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양극성장애는 아니지만 그 언저리 즈음에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처음에 말했던 선생님의 실험정신과 열정이
나에게 투영되고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이후로 몇 개월 여려 약들을 바꾸기 시작하며 내 몸에 맞는 약을 찾는 작업을 했다.
감정은 무뎌졌고 성기능 관련 부작용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향정신과 약특유의 부작용인 살이 찌는 약이
몸에 들어오고 몇 주가 지나자
폭발적으로 늘어난 식욕은 그간 잠자던 폭식증을 깨우기도 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내가 아닌 느낌이었고 삶의 생생함보단 그저 무딤이,
오감의 짜릿함 보단 그럭저럭 함이 내 삶에 들어와 차기 시작했다.
이것이 어쩌면 보통의 사람이 사는 느낌일 수 도 있겠다 싶었고
나는 그런대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부프로피온과 세로토닌제는 고정되고
나의 예민함과 분산된 신경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번 약이 바뀌었다.
그만큼 내가 선생님께 드리는 나의 증상에 관한 이야기가
좀처럼 걷잡을 수었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계속되고 있음에
이런 저런 약을 바꿔가며 계속 다른 시도를 해보신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부프로피온(도파민을 활성화하는 종류의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도 낮잠은 꼭 자야 했었다.
그간 만성화된 무기력감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두 시간 정도 누워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지하철에서나 카페에서는 내 주의력을 분산 시길 만한 것들이
나를 괴롭히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약의 용량을 늘리면 너무 무뎌지고 둔감해지는 탓에
나의 창의력이나 섬세함을 다루는
내 직업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했으므로 더이상 약용량을 늘릴 수는 없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많이 줄이게 되면
이전의 예민함과 관계사고 증상이 심해지니
그저 내 선택지는 적정 용량을 찾아가며 맞추는 수 밖에는 없었다.
새로운 정신과와 유목생활의 마침표?
그 기간 많이 지쳐갔다.
내가 조현병일 수도 있다는 말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고
뭔가 딱 들어맞지 않는 증상들을 보며
계속이고 이전의 기억들을 쥐어 짜내며 자괴감도 커져갔다.
그러다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도 몇 번 스쳐갔던 생각이었으나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닌 것 같다 말씀을 하셨다.
ADHD.
내가 이를 부정했던 이유는 많았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대체로 얌전한 편인 것 같았고
행동이 과하거나 심하게 장난을 치거나 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어렸을 때라면
다들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내가 주변의 소리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의력을 빼앗기는 것은
우울증에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몇 년간 생각했었고
그 이전엔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조울증 쪽과 가깝다는 진단을 받고는 1년 넘게 내 신경은 모두 그쪽으로 쏠려있었다.
내가 낮잠을 자거나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내 의지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약으로 고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건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안 간 다움의 기본적 속성이라고 생각했고 내
자괴감을 키우는 방식으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금 기억해 보면 나의 어린 시절엔 관련된 문제가 몇 가지 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책을 읽는 것이 힘들었다.
같은 줄을 수 십 번 반복해 가며 읽기 일쑤였고
읽다가 다음 줄이 혼동되거나
읽으면서도 손 발을 꼼지락 대고
(대체적으로 피아노 치는 시늉을 했다. 악보를 알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아노를 치는 행위를 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90% 이상은 알아듣지 못했으나 고개는 잘 끄덕였다.
그러면 선생님이 내 얼굴을 보시며 말씀을 하셨고 그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말투나 특정 습관, 감정의 변화, 칠판에 무언가를 쓰시는 글씨체나 그림 등에 신경이 몰렸다.
좋아하는 과목시간은 집중을 잘했고 지역 경시 대회에서도 수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대회에 나가서도 평소에 하던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실력을 발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환경이 바뀌면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이 생긴다.
중간 기말고사 같은 것은 가르쳐주신 시험범위를 전날 밤을 새워가며 외우면 성적은 잘 나왔다.
(전날 밤까지 미루고 닥치면 하기 시작했고 때문에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특정 시험 범위가 정해지지 않고 긴 지문을 읽어야만 하는 모의고사는
평균에도 못 미치는 형편없는 성적을 받기 일쑤였다.
노래가사는 귀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다.
특정한 단어나 문장 정도만 들어올 뿐 가사로 노래를 듣는 것보단
음의 변율, 기교, 감정선 등에 반응하며 들었다.
지금도 가사가 있는 노래는 잘 집중도 안될뿐더러 아예 관심이 없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부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나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가 그들의 감정을 잘 읽고 잘 공감을 한 탓이었다.
나와 대화를 하면 보통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관련 없는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식이 많다.
내가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기엔
예술의 모호성이 유행하고 자유로웠던 시기 었기에
두서없는 엉뚱한 대화는 재미있는 것에 속했을 수도 있다.
나를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 아닌 특이한 친구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술하는 사람, 그저 그뿐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들어갔던 회사에서는 집중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몇 개월 만에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겐 의미 없는 일상의 소리였겠지만
타자소리는 가슴을 후벼 팔 정도로 귀에 너무 거슬렸고
상사와의 위계질서 안에서 나눈 일방적인 대화는 위협적이고
감정적인 공격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화에서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캐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를 의지 박약한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위의 이유들로 우울증이 심하게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정신과를 처음 가기 전에도 우울증으로 몇 개월간 고생하고 정신을 차린 경우가 많았다.
주의력 결핍장애 환자분들 중 많은 경우
내 경우와 같이 여러 정신과적 병을 거치거나 혼동된 탓에
자신이 ADHD임을 늦게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성인 ADHD의 건강 보험적용은 시행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인 ADHD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했다.
또한 치료약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많고
오남용 사례가 많아 정작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ADHD의 진단율이 크게 늘었는데 그만큼 병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좋아진 탓도 있지만
공부 잘하는 약으로 알려진 치료용 약을 받기 위해서 오진단을 받은 경우도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냐고?
병원을 바꿔보자 하고 찾아간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하필이면 똑같이
ADHD를 앓고 계시는 환자분이셨다.
진단을 위한 테스트를 진행하고 진단결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선생님께서 그간 고생이 많았다 위로해 주셨다.
내가 정확히 ADHD의 진단 기준과 일치하며 치료를 시작하자 하셨다.
내가 먹는 오전약은 이전병원의 5가지 정도에서 한 가지 종류로 줄었다.
리튬, 아리피프라졸, 부프로피온, 프로작, 인데놀 등
기억나는 것만 이 정도였고 더 많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젠 콘서타 한 가지만 처방받아먹는다.
그러나 나의 삶과 정신은 드라마틱할 정도로 고요하고 풍요로워졌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느껴지는 옆사람의 숨 쉬는 것이라던가 거슬리는 행동은
나의 집중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화에 집중이 잘되고 내용도 잘 이해가 되며 이성적인 사고능력이 크게 늘었다.
몇 개월 전 들어간 회사에서 받은 업무평가 테스트에선 두 번이나 만점을 받았고
타자소리는 예전만큼 일을 못할 정도로는 거슬리지 않는다.
치료를 하지 않고 수십 년을 살아온 탓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까지 변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지금의 나를 대변하는 정신세계는 내가 항상 꿈꿔왔던 보통의 인생을 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무언가를 새로 시도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일단 시도하면 집중하고 끝을 보는 편이다.
작은 성과라도 그것을 해낸 것에 만족하고 그런 성과를 만드는 일들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
배우는 것에 두려움이 없으며 이전이라면 못하고 포기했을 것들을 지금은 도전하며 즐기고 있다.
그리고 더이상은 낮잠을 자지도 졸렵지도 않다.
그동안의 치료가 시간낭비는 아니었다.
먼 길을 돌아왔다.
선생님께서는 회사에서의 업무평과 결과를 들으시고는
진작에 약을 먹었으면 치료도 빠르고 지금보다 한결 나은 인생을 살수도 있을 거라 하셨다.
맞는 말씀이었다.
잘 들어오지 않는 단어를 수십 수백 번 써 내려가고
손바닥만 한 수첩이 너덜거리도록 깨알 같은 글씨로 나를 비난하고
나의 상황을 낙담하는 말들로 채워가던 고등학교 때의 내가 생각났다.
처절하고 우울했던 나의 학창 시절.
그 시절에 내가 잘 치료를 받았다면
어렸을 때부터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부모님의 싸움도 아버지의 폭언도 비교적 잘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 폭식을 하고 구토를 반복하던 나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어단어를 외우기 위해 주변의 펜소리, 떠드는 소리, 짝꿍 무심코 떨던 다리에 온신경이 사로잡혀
그것과 싸우며 단어장을 빽빽하게 채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구나 생각하며
시간을 절약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난 감사하다. 너무나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