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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Oct 18. 2022

꼬라손을 찾아서

사실은 디어 마이 탱고 프렌즈 4

탱고판에서 자주 쓰이는 말 중 ‘꼬라손(Corazon)’이라는 게 있다. 스페인어 ‘꼬라손’은 심장, 가슴,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처음 탱고를 출 때, 동갑내기 탱고 선생님은 춤이 정말 잘 맞는 사람하고 한 곡 추고 나면, 이 꼬라손이란 걸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꼬라손이 도대체 뭔지, 꼬라손인지 뭐시긴지를 알면 나도 어디 가서 탱고 좀 춰봤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1년을 춰도, 2년을 춰도, 내게 꼬라손은 미지의 세계였다.


친구의 말을 빌리면, 이 꼬라손이라는 게 엄청 대단한 거여서 춤을 추고 난 후에 심장이 녹는 것 같고, 여차 저차하면 그 감정을 오해해서 상대방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심지어 별칭이 ‘탱가니즘(해석 생략)’인 그런 요망한 것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탱고를 수년째 추고 있지만, 그놈의 꼬라손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외 밀롱가에 간 날이었다. 친구들과 나는 이탈리아 남부 여행을 마치고, 각자의 나라로 떠났다. 남편과 나는 서울로 돌아오기 전 로마에서 17시간의 레이 오버가 있었다. 우리는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낼지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백팩에는 탱고 슈즈와 드레스, 남편의 블랙 셔츠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탱고를 추고 놀다가, 아침에 인천행 비행기를 타면 그만이었다.


남편과 나는 택시를 타고 낯선 도시의 야외 밀롱가로 향했다. 휑하고 깜깜한 밤거리를 택시로 15분 정도 달렸다. 내린 곳에는 커다란 대문이 열려 있었고, 안쪽 마당에서는 익숙한 탱고 음악이 울렸다.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가 오지 않는 여름 내내 마당에서 밀롱가를 열 수 있다고 한다. 대문 안을 들어서니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에너지를 뿜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독하고 슬프게, 누군가는 즐겁게 추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곧장 친절해 보이는 곱슬 머리 언니가 다가와 따뜻한 피자를 건네줬다. ‘태국 탱고 페스티벌에서는 팟타이를 줬는데, 이탈리아는 피자구만.’하고 생각했다. 문득 그럼 한국은 떡볶이라도 줘야 하는 건지 상상해 보았다. 떡볶이는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아무래도 밀롱가에서 먹기에는 파 냄새가 날 것 같다. 파가 없는 떡볶이는 찹쌀 없는 꿔바로우나 다름없으니까..안 될 것 같다.


아무튼, 주변을 둘러 보니 동양인은 아무도 없었고, 아마 이탈리아 사람들로만 가득한 것 같았다. 가끔 한국에 와서 탱고 수업을 하는 댄서도 있었고, 지인이 로마 밀롱가에 다녀온 뒤에 즐거웠다며 올린 사진 속 인물도 있었다. 긴장이 되기도 해서 얼른 와인 한 잔씩을 주문했다. 피자도 한 입 먹고,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구경을 하다가 한 명하고 추고, 또 추고, 또 췄다. 재미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블랙리스트인 아저씨와도 췄는데 괜찮았다. 밀롱가 블랙리스트인 건 어떻게 알았냐 하면 춤출 때 지키는 선(마치 자동차 도로처럼)을 '론다'라고 하는데, 그는 누가 봐도 론다 파괴자였기 때문이다. 왼쪽 선으로 갔다가 오른쪽 선으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했다. 그는 ‘선’을 모르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무서운 표정의 다른 남자들이 여기저기 부랑하는 아저씨를 호랑이처럼 무섭게 쳐다봤다. 그래도 그 자유분방한 아저씨가 내 몸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아서 신기했다. 아저씨가 너무 부랑하며 다니지 않게 요리조리 조심조심 추고 내려왔다.


잠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뿌글리에세가 나왔다. ‘뿌글리에세(Osvaldo Pugliese)’는 이름에 있는 강렬한 된소리처럼 아주 (호)되게 춰야 하는 악단이다. 탱고의 고장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뿌글리에세의 이름을 딴 역이 있을 정도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탱고 음악가이다. 그의 음악은 남편의 말을 빌리면 박력이 넘친다고 하고, 내가 느끼기에는 강약 조절이 엄청나서 밀당이 심하면서도 엄청난 파워를 가진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엇박이 많아서 어렵다. 보통은 사랑하는 연인이나 춤이 아주 잘 맞는 사람하고 추는 편이다. 나는 뿌글리에세에 춤추는 걸 참 좋아하지만, 보통 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쪼랩인 나한테는 아무도 뿌글리에세에 춤 신청을 안 하기 때문이다.


그때 내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레이색의 머리칼을 가진 이탈리아 중년 아저씨가 나를 쳐다봤다. 탱고에서는 춤 신청을 ‘까베세오’라는 눈짓으로 하는데, 고수처럼 보이는 그가 까베세오를 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 지인은 내게 디제이석 근처에 앉은 검정색 셔츠를 입은 남자들이 춤을 잘 춘다고 했는데 딱 그였다. 그는 밀롱가 주인장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도 검정 셔츠를 입었었다.


시작은 걷기만 했는데, 완벽한 것처럼 느껴졌다. 실수는 없었고, 어그러지는 것도 없었다. 아슬아슬 높게 쌓아올린 보드게임 ‘젠가’가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말이다. 추면 출수록 심장이 쿵쾅거렸다. 너무 완벽하게만 느껴져서 내가 실수를 할까 음악과 음악 사이의 틈새마다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음악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 모든 게 잊혀졌다. 그때의 온도와 음악, 약간 감은 눈으로 느껴지는 조명의 명암만 느껴졌다. 내가 어떻게 걸어도 맞춰 주는 것처럼 어마무시한 집중을 받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음악 소리보다 내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이야, 이게 꼬라손이구나.


내 귀에는 강렬한 뿌글리에세의 음악보다도 내 심장인지 그의 심장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훨씬 더 크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상상과는 달랐던 게, 나는 상대방과 나, 음악 이렇게 셋만 남은 기분일 줄 알았는데 그보다 ‘나’라는 사람이 별의 작은 조각처럼 모조리 진공으로 날아가고 온 세상에 ‘소리’만 남은 것 같았다. 그래서 심장 소리라는 이름이 붙은 거구나 싶었다. 10분 가까이 귀가 쩡쩡하게 내 심장 소리를 들었다. 몇 시간 후에 인천행 비행기를 타야만 하는 게 야속했다. 아쉬움까지 완벽했다.

로마 밀롱가 풍경


하단의 링크는 오스발도 뿌글리에세(Osvaldo Pugliese)의 곡에 공연한 조나단 y 끌라리사.

https://youtu.be/_clbLO__D-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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