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배 Aug 16. 2024

부부 싸움, 이대로 괜찮을까.

아기가 찾아온 뒤, 우리 부부는 일상처럼 다툰다. 사이가 좋았던 시절은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다. 일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해 버렸다. 볼록했던 배 안에서 조그맣게 태동을 하던 아이가 이제는 나의 팔을 베고 곤히 잔다. 출산 전에 하던 과외 수업은 거의 쉬는 것이나 다름없고, 남편은 회사에서 유독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육아에 지친 나와 야근에 지친 남편의 다툼에는 불청객처럼 원망의 감정이 존재한다. 지난밤 잠을 푹 자지 못한 걸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 끼니를 제대로 못 먹어 기진맥진한 것에 대한 원망, 육아만큼이나 힘든 사회생활에서 오는 고단함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


요즘 나와 남편은 한 팀이라기보다 자신의 고단함을 경쟁적으로 전시한다는 점에서 승자 없는 라이벌 같다. 가만 보면, 원망의 이유는 고단한 상황 때문이지, 누구 한 명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힘들다고 말하면, 힘들었겠다고 말해주면 되는걸, ‘나도 힘들다’라는 한마디를 덧붙여 이 사달이 나는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여느 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남편이 은연중에 나의 수고를 몰라주는 말을 했고(혹은 내가 그렇게 해석해 버렸고), 이때다 싶어 나는 핑계 김에 가방에 노트북과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챙겨 집을 나와 버렸다. 아기가 태어난 뒤, 아기 수유 시간에 맞춰 네 시간 이상 집을 비워본 적이 없었다. 그날은 기필코 네 시간 이상 밖에서 보내다 들어가겠노라고 다짐했던 것도 같다.

마침 가방에는 자동차 키가 있었고, 일하다 종종 들르곤 했던 조그만 저수지가 보이는 파스타집으로 향했다. 보란 듯이 아기방 카메라의 알림을 껐다. 빵에 가득 담겨 나오는 따끈한 파스타를 호호 불어 먹으면서 그간 제대로 보지 못한 SNS 피드도 괜히 꼼꼼하게 보고, 다 먹은 후에는 챙겨간 책을 폈다. 아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 종업원이 다가와 영업 종료를 알렸다. 안내되어 있는 영업시간과는 30분 이상 차이가 나 의아하던 차에 주변을 둘러보니 식당에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진 마음에 서둘러 주차된 차로 돌아왔다. 집에서 나선 지 이제 두 시간 남짓 되었는데, 이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저수지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하늘이 충분히 고요한 덕분인지,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어서인지 요동치던 나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았다. 사실 최근 다툼이 잦은 건 내 감정의 문제였고,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쌓인 피로도가 높은 것도 문제였다. 상대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것도 문제였다.


머리로는 남편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몰랐던 나의 신경증적인 모습이 집 곳곳에 독소처럼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서, 이런 못난 내 모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다툼이 반복되면서 너그럽던 남편마저도 어느새 늘 화나 있고, 피곤하고, 예민한 나의 모습을 내 전부로 생각해 버리진 않을까 막막했다. 연애할 때나 신혼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낯설어져버린 관계가 이대로 굳어 버리면 어쩌지, 아니 이미 굳어진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도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할 땐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하고, 똑부러지게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육아를 하면서 이런 긍정적인 자아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좋아하던 밝고 활기차던 내 모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육아를 하면서 남편에게 보여주는 내 모습은 스스로도 사랑할 수 없는 모습인가 보다.


멍하니 밤거리를 운전하면서 마음을 살피는 시간이 몇 개월 만인데 10분이면 집에 도착하는 상황이 얄궂었다. 집을 지나쳐, 그대로 작년에 가장 많이 다녔던 도로를 탔다. 조그만 굴다리를 지나고, 우회전을 해서, 작은 골목을 거쳐 올라가다 보면 작년에 일주일에 세 번씩 과외 수업을 하러 갔던 학생네 집이 있다. 힘든 수험 생활에도 이른 아침, 늦은 밤에 수업을 가면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기고, 자기 몸보다 임신한 나를 더 걱정하던 학생. 숙제를 잔뜩 출력해 주면 감사하다며 웃던 아이. 너 같은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고 마무리하고 나왔던 고3 아이네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잠시나마 그리웠던 내 모습이 환기된 것 같아 눈물이 났다. 그리고 마음도 한결 나아졌다.


수업을 다녔을 때도 그랬다. 우울하거나 힘들다가도 수업을 하고 나오면 어느새 좋은 에너지가 감돌았다. 학생들에게는 내가 필요했고, 나는 일을 하면서 나의 효용이나 존재에 대해 충만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 24시간이 무색하게 끝없이 아기를 돌보는 데에도 스스로가 부족하다고만 느낀다. 이제 7개월 된 아기에게는 먹을 때도, 잘 때도, 놀 때도, 씻을 때도 나의 손길이 필요한데, 어쩐지 나는 일할 때 느끼던 나의 효용이나 가치의 충만함보다 결핍감만 눈앞에 아득하게 쌓여있는 것 같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간절히 바랐던 아기가 찾아왔는데, 사랑의 뿌리인 우리는 어째서 위태로운 건지 모르겠다. 아이를 돌보며 지내는 모든 가족들이 이런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만 이토록 바보처럼 흔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한 시절 견디다 보면 뻔한 이야기처럼 비 온 뒤 땅이 굳듯 우리도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걸까. 상황이 나아지면, 우리의 고단함이 풀리고 나면, 다시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시간이 오기는 하는 걸까. 당신이 힘들겠다고, 당신을 이해한다고 한마디 건넬 수 있는 힘을 가진 아내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매일 그 한마디를 듣고 싶다고 생각하는 늦은 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