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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가 자주 하는 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자주 하는 말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고로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단어를 수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아는 단어만큼 그들이 들려주는 세계가 확장되기에.


내가 자주 하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럴 수도 있지."


한때 내가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던 말이다. 치킨을 싫어한다고? 그럴 수도 있지.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이유 없이 싫다고? 그럴 수도 있지. 모든 것에 그럴 수는 없다고 외치던 나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나는 입 밖으로 그럴 수도 있지를 되뇌기로 해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 어떤 말에도, 그 어떤 사람에게도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어의 힘을 느낀 순간이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난 타인의 의견에 관심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어차피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결혼은 미친 짓이야. 아이를 갖는 건 더더욱 더."


결혼과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게거품을 무는 나 자신에게 놀랄 때가 많다. 아니 이렇게 까지? 싶은 적도 종종 있었다. 결혼식장에 들어가며 나는 5년 후에 이혼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또는 결혼 서약을 하며 이혼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많지 않을 것이다.


쿠팡에서 가습기 하나를 살 때도 10개 이상의 가습기들을 비교해 보고 그래도 결정을 내리지 못해 장바구니에몇 주씩 처박아놓는 나에게는 결혼이라는 행위가 비합리의 끝처럼 느껴진다.


당장 내일 나의 기분도 확신할 수 없는데 어떻게 5년 후, 10년 후, 20년 후의 내가 당신을 사랑할 것이라 약속할 수 있을까?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다는 결혼 서약은 결국 희망사항일 뿐 약속이 될 수는 없다.


내가 누군가를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50년 뒤에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면 난 주저 없이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도저히 난 그럴 자신이 없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아이로 넘어가면 할 말이 더 많아지지만 짧게 한 줄로 요약하자면: 나를 닮은 한 존재를 이 세상에 내놓고 성장시키기 위해 왜 내 인생을 바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숭고한 성역인 것 마냥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고구마를 먹은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실컷 쓰다 보니 나 매사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뭐지. 나뭐 하는 놈이지.



"저는 별로 사람에게 애착이 없어요."


개소리다. 험한 말을 용서해 주시길... 더 알맞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사실 난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한평생을 그렇게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해왔고 어느 정도 충족이 된 요즘 확실하게 느낀다.


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애정과 에너지,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솟아 나오는 따뜻함을 기갈이 난 사람처럼 찾아온 사람이구나.결국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들은 비겁한 자기 방어일 뿐이다.


사실 나 그럴 수 없다고 생각 많이 해. 근데 그러면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뾰족한 내 바늘을 둥글게 갈아왔어. 나 사실 사랑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어. 나를 닮은 아이도 낳고 싶어. 그런데 너무 무서워.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어. 그래서 결혼의 비논리성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대지만 결국엔 비겁한 자기변명일 뿐이라는 걸 느껴. 그렇기에 하지 못하는 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람들에게 질투를 느껴. 사람들에게 애착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언제 나를 떠날까 항상 불안에 차 있어. 한껏 허세를 부려보지만 결국 난 상처받기 싫어 상처를 주는 사람이고 관계의 끝이 싫어 관계를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시끄러운 잡념을 글로 쓰고 나면알 수 없는 해방감에 사로잡힌다. 오늘은 푹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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