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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살청춘 지혜 Jun 06. 2022

첫 중간고사 성적표

차마 하지 못한 리셋, 한소금 날숨안으로

고구마 서너 개를 물 한 모금 없이 꾸역꾸역 먹어 가슴에 얹어 놓은 느낌이다. 목이 메고 가슴이 답답하게 짓눌려오면서 머리가 띵하게 어지러웠다. 어두운 밤길, 운전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혼미해지려는 정신 줄을 꼭 붙들어야 했다.


“와~ 엄마, 학원 원장님과 통화하고 머리가 흔들흔들하다, 지혜야!”

“왜? 선생님이 뭐라 하셨어?” 걱정스러운 듯 막내가 답했다.

“학원을 끊으면 언니 인생이 망가질 것처럼 말씀하시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 주로 격리되었던 2년을 거쳐 고등학생이 된 셋째가 첫 중간고사를 치렀다. 엄마, 아빠 각자의 용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2년간 아이들은 집에서 방치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집순이인 셋째는 쾌재를 부르며 방콕 생활을 온전히 즐겼다. 수학 공부도 집에서 혼자 해보겠노라 수학 학원을 그만두겠다 해서 그때는 고맙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손 놓고 있었을 줄이야... 


”**아~ 엄마 성적표 보여줘야지!“

”앗, 미안. 학교에 두고 또 안 가져왔네.“

시험 보고 성적이 어떻게 나왔는지 정확히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아이는 성적표 보여주기를 차일피일 미룬다. 많은 시간을 핸드폰과 웹툰, 그림 그리기 취미로 보내버린 터라, 딱히 성적에 대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2년 꼬박 놀고 난 후 발등에 활활 탄 불이 붙은 것을 알았으니, 이젠 진화 작업에 온전히 몰입해 주길 바라는, 엄마 입장에서 편안한 꿈을 뚱뚱하게도 꾸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하고 셋째가 마음을 굳혔어요. 당분간 학원을 끊고 학교 공부에 집중하며 혼자 공부할까 해요.“

”어머님, 공부는 의지가 가장 중요한데, **인 혼자서 공부하기 힘듭니다. 중2병처럼 공부하기 싫어서 지금 어리광하는 거예요. 안쓰럽다고 어리광을 다 받아주고 나면, 철이 들어 후회하게 될 겁니다. 학교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이에 대해 알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속상하네요.“

염려하는 선생님의 마음은 백 번이고 감사하지만, 아이의 미래를 단정하는 말투가 창칼이 되어 경계를 마구잡이로 침범하고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해 첫 학기, 특히 중간고사 첫 시험을 보고 첫 성적표를 받았을 때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는 지극히 현실적인 점수와 등급에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첫째, 둘째 때도 그랬다. 폭탄의 크기는 기대치에 비례하기에 첫째는 첫째대로, 둘째는 둘째대로 매번 가장 충격적인 성적표라 생각했다. 그러나 코로나 집순이여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셋째가 원자 핵폭탄이 되고 보니, 언니들은 불꽃놀이 정도였구나 싶다.


안 하던 공부를 몰아서 하느라 학기 초 내내 푹 삶아진 시금치처럼 다니는 셋째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2번의 입시를 치르고 보니 입시 전문가는 아니어도 지금 이 상태라면 아이가 받게 될 고등학교 내신과 수능 결과가 짐작되었다. 본인이 원하는 서울 쪽 대학이나 전문직 학과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입시는 전략이야, **아! 입시안에서 네가 행복해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원하는 목표치를 낮추거나 목표치에 닿을 만큼 성적이 나오거나.“

웹툰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보는 것은 어떠냐, 미대 쪽 방향을 맞추면 실기 준비를 해야 하지만, 부의 부담이 많이 줄어드니 좀 더 생기있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냐 했다. 일언지하에 그림 그리는 것은 취미일 뿐 그림을 그리러 대학에 가지는 않겠단다. 강단 있게 답하는 아이의 모습에 ‘제법 소신이 있네?’ 했다. 돈도 많이 벌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도 해주는 그런 직업을 갖고 싶단다.  와~ 우리 세째가 욕심도 많다! 어찌끄나~ ㅜㅜ


”그럼 남은 방법은 한 가지다. 성적을 잘 나오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성적을 올리는 것.“

워낙 선행 학습하고 온 친구들이 많으니, 학교 내신 등급에 목매지 말고 앞으로 2년 반 정시에 집중해서 자기 공부를 해보고, 필요하면 나중에 1년 더 공부하는 길과 자퇴를 하고 부족한 공부를 보충해서 다른 고등학교 1학년으로 내년에 재입학하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후자의 경우는 내신 등급도 챙길 수 있는 데다, 고등 3년 생활이 훨씬 편할 수 있기에 현재에서 가장 적합해 보였다. 게다가 셋째는 언니들에 묶여 일 년 일찍 조기 입학했기에 또래보다 한 살 어리다. 그 일 년을 지금 쓰면 어떻겠냐? 제안했다.


”아~ 그러면 수학여행을 못 가잖아. 수학여행을 2박 3일 에버랜드로 가는 그런 좋은 학교는 우리 학교밖에 없을거야.“ 성적 때문에 풀 죽어 다니는데도 학교와 친구와 함께하는 것이 세째는 좋은거였다. ”그렇구나. 그럼 학원보다 학교생활에 집중해야지. 담임선생님 말씀대로 학원은 정리하고 돌아오는 기말고사 시험 대비를 어떻게 할지 계획 세워 보렴. 도움이 필요하면 언니들이나 엄마에게 물어보고...“


지금 상황에서는 고등학교 생활을 다시 리셋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그냥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을 꿀꺽 삼켰다. 새벽녘까지 핸드폰을 보다 잠든 듯한 아이의 방 불을 끄고 나오며 여전히 답답했다. 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이가 대학을 못 갈까 봐? 아이가 좌절할까 봐? 아이가 좋은 기회를 놓칠까 봐? 아이가 나쁜 길로 빠질까 봐? 글을 쓰며 깊게 나를 들여다보니,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할까 봐 아이에게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도움과 기회를 살펴주지 못한 엄마가 될까 봐 나를 걱정하며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이가 아니라, 나를 믿지 못하고 있었구나!


바깥바람이 쐬고 싶었다. 옥상에 올랐다. 옥상을 빙 두른 화단에 5월 초 모종으로 심은 고추, 토마토, 참외가 쑥쑥 자라 벌써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씨를 뿌렸던 상추와 깻잎, 바질과 각종 꽃씨 새싹들 또한 화단 한쪽을 수북이 덮을 정도로 파릇파릇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씨 뿌리고 심기 위해 처음 밭을 만들 때는 물과 속 비료를 섞어 흙을 일구고 이랑을 만들며 마르지 않게 비닐도 씌워주며 손이 가지만, 일단 뿌리가 내리고 나면 물만 적절하게 주면 된다. 매일 매일 쑥쑥 싱싱하게 자라는 이 아이들을 보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다. 더 커져라 더 커져라! 욕심 내지않아도 적당하게 물 주고, 괴롭히는 진드기가 있으면 진드기약 뿌려 주며 관심 두고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렇게 잘 자라 풍성한 열매까지 맺고 있었다. 내 아이들도 이러하겠지! 엄마로서 할 일은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간섭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잘 찾아갈 거라는 신뢰와 사랑의 눈길로 아이를 지켜봐 주는 것이리라.


내가 돌,살,꾸,키,(돌보고 살피고 꾸미고 키우는) 아티스트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농작물을 가꾸는 것과 달리 매일 매일이 수양이겠지만,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아이의 선택을 더욱 존중하고 지지해보자 했다. 그제야, 가슴에서 후~하고 날숨이 뱉어진다.  그새 동쪽 하늘로 말끔하게 떠 오른 해님이 밤새 뒤척이느라 핼쑥해진 나를 걱정하지 말라는 듯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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