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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 Feb 14. 2021

02. 봄이 오는 냄새

눈이 녹으면? 봄이 와!

 난 철저한 문과생이다. 눈이 녹으면 뭘까?라는 징한 질문에 언제나 봄이 오지~라고 대답하는 문과생.

두괄식 문장으로 결과 먼저 짧고 굵게 의사전달하는 것을 어려워하며, 느낌과 상황 등을 구구절절 풀어 말하는 그런 유형말이다.


 직장에서 업무 진행 시, 전화 통화를 할 일이 많다. 관리자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청받는 쪽도 아니다. 중간에서 상황의 흐름을 지켜보고 문제사항이 발생하면 전화 또는 메일로 조율하는, 그런 애매한 포지션이다. 그래서 메일 작성은 물론이고 통화를 할 때에도 상황을 간결명백히 말한 뒤 질문이나 솔루션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게 참 서툴고 어렵다. 처음 업무를 시작했을 때는 주절대기만하고, 말을 할수록 당최 요점이 뭔지도 모르겠어서 듣는이가 뭐라고요?하며 되묻기 일쑤였다. 난 그 때마다 식은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아, 실례지만 오 분뒤에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 하며 어색하게 전화를 종료했다. 솔직히 지금도 종종 그렇다.

 

 그럴 때마다 옆 부서 사람들이 내가 뚝딱대는걸 듣고 보고 하는게 창피하고, 상대에게도 시간만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라 느껴져 아주 곤혹스러웠다. 인수인계자도 없고 사수도 없으며 동료라고는 부장 한 명 뿐인 부서에서 일하게 되어, 업무 또는 일머리 팁에 대해 질문할 사람도 없었다(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 그래서 아, 내가 바로 문제상황을 바로 해결하진 못할지라도, 중간에서 말을 효율적으로 해서 업무 속도라도 빨리 해보자 라며 두괄식 말하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유투브로 관련 영상도 찾아보고 태생적 이과생인 주변인들에게 조언도 구하며, 업무 효율성에 관한 유료 컨텐츠도 구독하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딱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뚝딱댄다. 다만, 메일 작성은 보내기 전에 고민하는 시간이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실수는 하지 않고, 전화를 걸고 간결하게 말을 시작하는 대화 기술이 조금씩 빌드업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아직까지는 새로운 문제상황을 접하거나, 보다 복잡한 업무를 만나면 머릿속이 하얘지긴 한다. 근데 뭐 어쩔거야.. 그래서 내가 아직 이 연봉인거 아니야? 일을 진행을 못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다 보면 되겠지 시발 이라며, 가성비 좋은 스피커를 목표로 계속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회사원의 옷과 표정을 갖고 지내다가, 구정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부모님댁에 다녀왔다. 이번에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네 식구만 모여 안부인사를 나눴다. 다시 서울로 상경하기 전, 간단히 성묘를 다녀오는데 그날 따라 날이 참 봄날이었다. 

 오후 세시 쯤 인적이 없는 산 속 작은 언덕에서 내려오는데, 바람이 솔솔 불며 한껏 따뜻해진 온도를 전해주었다. 바람에 신선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바람에서 계절이 바뀌는 냄새가 나네 라며 가족들에게 말했다. 별다른 리액션을 바란 게 아니라 그냥 차에 타려 하는데, 엄마가 와~ 그러네. 말이 참 좋네 날씨도 좋고. 봄이 오는 냄새가 나? 라고 했다.

 엄마의 답변으로, 순간 나는 본연의 문과생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떠한 일의 효율성과 속도를 높이려고만 애를 쓰며 지내오다가, 커다란 의미는 없는 말 한 두마디로 어떠한 그리움과 각박함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부드럽게 편해진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응 바뀌는 냄새가 나네, 이제 봄이 오려나봐.



 좀 구구절절대면 어떤가, 시시콜콜하면 어떤가. 그것은 그저 비효율적이며 시간낭비를 하는 대화 방법이 아니다. 업무 상 많은 이가 거의 기계적으로 빠르고 정확한 업무처리를 선호야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일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하등 쓸모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실수를 하거나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나름대로 일처리를 하면, 웬만해선 서로 이해해줄 수 있다. 요점을 딱딱 짚어내고 스마트하게 해결책을 툭툭 말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상대방이 급하면 급한 일이니 빨리 진행해달라고 말을 하겠지. 


 엄마와의 나눈 봄이오는 냄새 이야기는 - 문과생인 내 식대로 좀 구구절절해도 괜찮아. 언어구사에 가성비가 최고의 가치는 아니니, 너무 최선을 다해서 가성비 좋은 스피커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던 대화였다.

 더해서 나 또한 내 성에 차지 않게 일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웬만하면 이해해주려고 노력해야겠다 라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졌으면 하고 소망하기도 한다.



 좀 느려도 괜찮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 다시 하면 되지. 언제나 모든걸 잘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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