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理想)하는 주정뱅이
지금까지 술을 아주 즐기는 것을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해왔다. 술을 매일 마시거나 주종의 종류와 지식이 광활하다던지, 많은 양의 술을 마셔도 꼴불견이 되지 않는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해왔다.
앞자리가 바뀐 내 나이. 지금의 나는 술을 아주 즐기는 사람이다. 거의 매일 마시며 잘 취하지 않고, 술에 대해 책도 읽고 수업도 들어 주류에 관한 지식도 적지 않다. 고주망태가 되어도 꼴불견은 아니라고 한다(함께 취했던 사람들 말이라서 신빙성이 있는지는...모르겠지만. 커다란 실수를 한 적은 없다).
이러하다고 하여 과연 스스로 멋진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는데? 멋지지도 않고 구리 지도 않다. 단지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어찌 보면 능력이고 기술이라 여긴다. 나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주제를 이야기할 때, 좋은 술과 그에 어울리는 요리보다 좋은 매개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벌이고 싶을 때는, 물론 혼자 시작할 수 있지만 보통 주변인 또는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벌이기 마련인데, 술자리만큼 솔직하고 대범한 대화의 장은 아직까지 찾아보지 못했다. 어떤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 술자리가 좋은 대화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그렇다. 처음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메뉴판의 적당한 안주요리를 두런두런 고르면서, 우선 그 날 마실 술을 한 잔(또는 한 병) 주문한다. 주로 별 의미 없고 어쩌면 지겨울 수 있는 대화가 오가며 한두 잔 마시다 보면, 주문한 안주가 나오고 안주 이야기로 넘어가 한두 마디 또는 족히 한 시간은 되는 대화의 장이 열리기 십상이다. 요리가 늦게 나오면 늦게 나오네, 왜 늦을까, 배고픈데, 손님이 많아서 바쁜가 봐, 맛집인가 라며 그런대로의 대화를 이어나갈 것이다.
여하튼, 술을 안 마셨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시고 나면 기분의 상태가 달라진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보통 조금은 느슨해진다. 특히 뜨거운 요리를 안주로 먹을 때면 기분이 붕 뜬다. 그러면서 텐션이 올라가 대화에 속도가 붙고 어쩔 때는 목소리도 커지고 톤도 달라진다. 그러면서 시시콜콜 일, 주변인, 취향의 음악이나 영상, 요즘 보는 책 이야기 등을 공유하며 서로서로 일상을 시시콜콜 나눈다. 어느 한 명이 취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마시는 속도나 주종을 조절하여 텐션을 이어나간다. 집에 갈 사람은 가고 내일 일정을 살피며 조금만 있다 일어나야겠다 라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러면 그런대로 술자리를 이어나간다.
이 시점부터는 한 두 명이 속 깊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이 많다. 나도 하는 편이다. 주로 미래나 반려자, 경제력이 도마에 오르고 각기 다른 의견을 펼치거나 입을 꾹 다물기도 한다. - 여기서 서로 핀트가 나가면 보통 같은 수의 멤버로 다시 술자리가 형성되지 않는 것 같다. - 들어주고 말하고 하다 보면 생각이 깊어지는 사람도 있고, 아 이제 졸리다 라며 피곤해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나도 직장인이다 보니 보통은 피곤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의견을 따라 아쉬워하며 집으로 간다. (이 시점까지 난 보통 취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리고 술을 더 마시고 싶어 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건강하지 못하고 생산성도 떨어지는 술자리를, 나는 내 삶에 있어서 아주 중하게 여긴다. 저렇게 술도 마시고 말실수(선 넘지 않는)도 하며 새로운 대화가 만들어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관련 아이디어나 경험담들을 나누기가 가장 편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취기에 흐르는 일상과는 다른 서로의 언행을 발견하며 즐거워하거나 짜증도 내고, 상대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 않나. 관계는 그러면서 자연스레 도타워지고, 어쩌면 봄 볕의 녹는 눈처럼 사르르 정리되기도 하는 것이다.
술 마시고 하는 실수(!선을 넘지 않는!)들은 웬만하면 용서되기가 쉽다. 무지렁한 말이나 행동은 술친구들에게 낯선 재미와 웃음을 야기하고, 몰랐는데 저 친구 저런면이 있네 라던지, 난 저러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이 부분이 참 재밌다. 난 차라리 사람들이 바보같이 실수하고 크게 웃는 게 좋다. 물론 다치거나 누군가에 해를 입히면 안 되고, 체면을 차리는 것보다 그냥 좀 취하고 웃고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는 실수도 만들며, 잠시라도 일상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그리고 다음날 두통과 위액들의 꾸지람과 함께 웃고 넘기며 다음 술자리의 안주거리가 되는 정도의 실수들이, 그 용서되는 관계의 흐름이 좋다.
결국 술을 '잘' 마신다는 것은, 술자리 경험치가 높고, 흐름을 맞추는 술친구가 있으며, 무의식적으로라도 선 넘는 짓거리를 하지 않고, 적당히 취할 때 조금은 바보 같은 구석이 있는, 재미가 없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더 이상 술을 잘 마신다는 게 주류 지식이 많고, 많은 양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나아가자면 나는 술을 잘 마시는데, 과연 괜찮은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