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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Oct 19. 2021

/ 춘천


권진규가 이룩한 업적은 

수천년 한국미술사의 흐름을 일변시켰다는 표현조차도 부족할 만큼이다. 

인간의 심연을 이토록 심오하게 형상화한 조각가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그가 연출하는 적멸공간에 빠져들면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을 흡인력이야말로 

은하의 전설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언제던가 춘천 호반에 피어오르던 물안개 속 헤매던 추억을 떠올리면 

바로 그 깊이마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권진규가 훔쳐갔을 고대왕국 맥국(貊國)의 수도 ‘춘천의 힘’ 말이다.


- 출처 : 미술평론가 최열
(전시장 벽면에 소개된 글 중에서 옮겨 적음)

    

     

좌: 지원의 얼굴(1967, 브론즈) / 우: 상경(1968, 테라코타)  / 사진 이호정



# 봄은 아직

2월의 여행은 언제나 애매하다. 누군가 2월의 여행을 좋아한다면 그는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또한 누군가 2월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는 그 여행을 통해 뭔가 새롭고 신나는 것,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라운 것을 기대하며 설레기보다 지난 겨울 힘들고 어려웠던 것에서 한숨 돌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 간밤에 짐을 꾸렸을 것이다. 


겨울도, 봄도 아닌 고즈넉한 숲길에서, 사람들로 벅적대지 않는 조용한 산사에서, 가지 끝에 새순이 돋기를 기다리며 오래된 성당에서, 눈 녹은 물이 질척대는 폐사지에서, 투명한 얼음이 반쯤 걸쳐진 호숫가에서… 그렇게 묵은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며 다가올 새로움을 또 견뎌내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우리는 2월의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봄은 아직… 


한 겨울의 그것과는 또 다른 지금, 겨우내 입던 두터운 외투를 얼른 접어 옷장 깊숙이 넣어두고만 싶은 이 계절에 춘천에 다녀왔다. 이름에서부터 봄이 좀 느껴지는 곳이니, 혹시나 그럴 수 있을 거라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서… 그러나 제 아무리 춘천인들 봄이 여기만 먼저 올리 없으니 겨울의 끝자락을 붙들고 선 매서운 동장군에 몸을 잔뜩 움츠린다. 


여행자에게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2월의 계절, 어쩌다 만나는 젊은 여행자들은 추위에 아랑곳없이 하하! 호호! 떠들썩하기만 한데, (하긴, 그들에게 계절이 무슨 상관이랴!), 우리는 날씨를 핑계 삼아, ‘예술과 낭만의 도시’라는 이 도시의 별명을 위안삼아, 마음 속에 꿈꾸던 2월의 여행은 다음으로 미뤄둔 채 춘천 가는 고속도로에 몸을 싣는다.

     


# 그는 지원의 심연을 어떻게 보았던 걸까.

춘천 시내에서 북동쪽, 우리나라 유일의 옥광산이자 춘천옥으로 잘 알려진 옥산가 옆으로 한국 근대조각을 대표하는 조각가 권진규의 미술관이 있었다. 나는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열렸던 어떤 전시에서 권진규의 작품을 딱 한번 본 적이 있다.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할 만큼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 작품이 권진규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권진규의 미술관이 개관되었다는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서는 아직 봄도 오지 않은 춘천으로 달려갔던 이유였을까.


겨우내 곰브리치의『서양미술사』를 정성들여 다시 읽었다. 저자가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현대조각가 헨리무어 부분의 작품을 비교하며 쓴 부분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돌 속에 숨어 있는 완벽한 형상을 끌어내기 위해 돌을 제거했을 뿐(p.237)’이라던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돌을 사용해서 여인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암시해주는 돌을 만들려’(p.453)했다던 무어의 조각상 사이에 존재하는 400여년의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잘은 몰라도, 권진규의 흉상들은 적어도 질료 속에 숨은 완벽함을 찾아내려는 것도, 질료를 사용해서 어떤 형체를 암시하려는 것도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그의 세계를 대표하는『지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나는 어려운 말은 못해서, 그냥, 기분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게 가족나들이로 와서 대체 무슨 일인지…. 그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흔히 나열되는 ‘심연, 근원, 구도자, 영원, 내면’ 같은 단어들도 아마 그런 기분 탓이었을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깊은 수렁에 빠진 듯, 초월한 듯, 포기한 듯, 혼이 나간 듯…  나의 표현의 한계는 여기까지지만, 는 지원의 심연을 어떻게, 어디까지 보았던 걸까. 역시 예술가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고, 그것을 物로서 빚어낼 수 있는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속을 짐작케 할 수 없는 그 표정들과 각도들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조명이 무척 아쉬웠으나 그 질감과 표정과 형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한번이라도 마주한 사람이라면 쉽게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 (국립춘천박물관)  /  사진 이호정



# 간절하지만, 무상한 것들, 그래서 간절한 것들

석탑 아래서 공양하는 보살좌상은 그리 흔한 유물은 아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아래서 처음 보고 무척 감동을 받고 나서는 나는 이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강원도의 각 도시에 세 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춘천에 있다. 그것을 보기 위해 아직 봄도 오지 않은 춘천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고개를 약간 갸우뚱 한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은 권진규의 흉상들에서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형상도, 암시도, 근원적 탐색도 아닌, 순도 100% 살인미소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앞에서도 온통 그러한 미소뿐이었다. 


바로 앞에는 영월의 창령사지에서 출토되었다는 33기의 나한상이 또 각자 이런저런 표정으로 방문객을 맞이하는데, 그러니까 이쪽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같은 표정이었다. 나한羅漢은 ‘일체의 번뇌를 끊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라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그 석공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돌을 두드렸던 걸까.


그것은 일종의 마음 같은 것이었다. 오로지 간절한 것을 갈구하는 그 마음, 그러나 석탑 아래서 아무리 무릎을 꿇고 기도한들 그것이 소용 없다는 것을 아는 마음. 무상하지만, 그래서 더 간절한 것들 때문에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릴 수 밖에 없는 마음….


         

33인의 나한상 중에서 나는 이분이 특히 좋다. / 창령사지 나한상 (국립춘천박물관)  / 사진 이호정



아따, 들어줄라면 들어주구, 

싫으면 말아유, 하는 그 마음


나는 그날, 월정사의 석조보살좌상을 본 이후로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쟁여 두었던 두번째 석조보살좌상을 만날 수 있었다. 박물관은 동장군의 뚱한 심술에도 따뜻했고, 한송사터의 보살과 우연히 보게 된 창령사터의 33명 나한들도 박물관보다 더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이만하면, 아직 봄도 오지 않은 춘천에 갈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린 닭갈비도 먹었으니까. (마침)




*강원도에 있는 세 기의 석조보살좌상

1.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국보제48-2호), 평창 월정사성보박물관 

2.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국보제124호), 국립춘천박물관 
  (강릉시에 있었으나 1912년 일본으로 
출 후 1965년 돌아옴. 현재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3.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제84호), 강릉시 내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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