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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May 15. 2024

45 - 매출계약 결산

소소한 시작

 여느 때처럼 잡무를 소화해내고 있는 그, 옆자리의 U 과장은 회사 구내전화로 통화 중이다. 좀처럼 기분을 드러내지 않는 U 과장이, 약간은 짜증이 난 투로 통화를 하고 있다. 그는 귀를 기울인다.


  전화기 : $@#$%#^!#$^

  U 과장 : 그걸 왜?

  전화기 : $@##$#$^@#^$

  U 과장 : ...

  전화기 : #$@#^#@$@%#^$@#

  U 과장 :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내보고 그러냐고. 내가 계약했냐고

  전화기 : *&%^%^@#&&*(^&


 전화가 끝난다. U 과장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쥔 채 말이 없다. 그는 심기를 거스르면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U 과장 : 얼굴아

  그 : 네!

  U 과장 : 너가 내 일을 도와줘야겠다.

  그 : 네!


  U 과장 : 파일 하나 보냈거든. '매출계약 결산'이야.

  그 : (파일을 연다. PPT 파일이다)

  U 과장 : 여기 칸에다가, 저번 달 매출계약들 내용을 기입해야 해. 지난번 완성했던 거도 보내줄게.

  그 : (저번달 파일을 연다)


  U 과장 : 참고하면 되고. 저번 달 계약 정보들은.. 그룹웨어 들어가 봐.

  그 : (클릭)

  U 과장 : 경영정보시스템, 사용인감 승인내역 눌러.

  그 : (클릭, 클릭)

  U 과장 : 승인일자를 저번달 1일부터 말일까지로 설정해.

  그 : (설정한다)

  U 과장 : 아 그리고 신청자를, 'IT사업본부'로 해.

  그 : (설정한다)

  U 과장 : 조회

  그 : (조회를 클릭한다)



 U 과장의 지시대로 설정하여 조회하니, 화면에 내역이 쭉 뜬다. 나중에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지난달의 IT사업부 사용인감 승인내역'이 출력된 화면이다. 

 사용인감이란 회사에서 쓰는 도장을 의미하며(더 상위 버전으로 법인인감도 있다), 회사의 도장을 쓰기 위해서는 시스템에 등록하고 윗선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담당자는 사용인감을 신청하는 사유, 도장을 몇 개 찍어야 하는지를 기입하여 기안한다. 윗선의 시스템 내 결재가 완료되면, 비로소 담당자는 사업지원팀장을 찾아와 사용인감을 찍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인감(도장)은, 사업지원팀 S 팀장과 T 과장의 엄호를 받는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


  U 과장 : 승인내역 다운로드해.

  그 : (엑셀 다운로드를 클릭한다)

  U 과장 : 여기서, 인감 사용 구분 중에 '매출계약'만 뽑아

  그 : (필터를 걸고 검색해서 구분한다)

  U 과장 : 지금 필터 걸린 이 리스트들을, 아까 준 PPT 파일에다가 옮겨적으면 돼. 그리고 전자 계약이 있는데... (무언가를 가지러 간다)

  그 : ...??

  U 과장 : (종이 파일을 가져온다) 인증서 쓴 것들은 여기에 다 기록되있으니까. 여기서 '매출계약'이라고 되어 있는 것들만 골라서 PPT에 작성해.

  그 : 알겠습니다!



 U 과장에게 설명을 듣긴 했으나,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훗날 돌이켜 생각했을 때는 업무의 종류, 흐름, 전체적인 틀이 파악되지만 이 시점의 그에게는 어렵다. 그는 그저 U 과장이 전달해 준, 이전 완료본을 참고하여 똑같이 기입을 시작한다.


 매출계약 결산, 즉 한 달 동안 매출계약을 몇 번이나 했는지 정리하여 결산(보고)하는 업무다. 기간의 편의를 위하여, 보고 대상이 되는 기간은 이미 한 달이 완료된 이전월이다. N월 1일부터 N월 말일까지 체결된 매출계약이 몇 건인지, 해당 계약별 계약기간은 언제인지, 예상 매출은 얼마인지, 무슨 상품에 대한 계약인지 등을 정리해서 기입한다. 매출계약 관련 상황은 아래와 같다.


A) 이 회사는 전자계약을 신뢰하지 않아, 매출계약을 주로 인감(도장)을 날인하여 진행한다.

B) 고객사가 전자계약을 선호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전자계약으로 진행한다.

  b-1) 전자계약은 인증서를 사용해 진행한다.

  b-2) 그가 다니는 회사는, 도장은 지나칠 정도로 관리하는 반면 인증서 관리는 소홀하다.

  b-3) 인증서 사용 내역은 시스템으로 집계되지 않는다. 사용자가 파일철에 수기로 기입한다.


C) 매출계약 결산 업무

   - 도장을 쓴 계약은, 시스템 인감 내역을 출력해 뽑으면 된다.

   - 인증서를 쓴 전자계약은, 파일철의 글씨를 하나하나 읽으며 구분해야 한다.


D) 매출계약 결산을 위해, 매출계약서 원본 확인 필요

   - 관리 부서는, 매출계약서 실물까지 취합해서 눈으로 보겠다고 요구한다.




 위 상황과 연관하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1) 전자계약 관리 미흡

      - 전자계약을 불신한다면서도 전자계약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다. 바쁜 실무자들이 휘갈겨 쓴 필기체 사이에서 전자계약 내용을 식별해내야 한다. 혹시라도 실무자가 까먹고 기재를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사업지원팀이 이를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 매출계약서 원본 취합

      - 관리에 매몰된 것인지, 관리 부서들은 굳이 매출계약서 원본을 취합하라고 지시한다. 매출계약 결산 보고 시점까지, 원칙적으로 이전달의 모든 매출계약서가 사업지원팀에 가지런히 모여 있어야 한다. 말이 쉽지, 이는 상당히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간다. 이 회사는 가뜩이나 매출계약서 관련하여 프로세스가 많다. 그 프로세스의 중간 어딘가를 타고 돌아다니는 매출계약서를, 관련 없는 부서인 사업지원팀이 모두 파악하고 요청하여 다 모아놓아야 한다. 보고가 끝나면, 원래 있었던 프로세스로 계약서를 다시 또 뿌려야 한다. 전자계약도 출력해야 한다.(전자계약의 의의는 출력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나)



 U 과장은, 이러한 사태를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액션을 크게 하면서까지 관리팀의 요청을 무마하려 했으나, 결국 관리팀에서 밀어붙이면 따라야 하는 것이 사업지원팀의 처지다. 그에게 장표 작성을 맡겨놓고, U 과장은 여기저기 퍼져있는, 고객사에 있을 수도 있는 매출계약서들을 취합하기 시작한다.


 매출계약 자체도 문제지만, 업무 인수인계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는 사업 구도 / 사업 아이템 / 계약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신입 사원이다. 상품별로 매출계약의 형태가 다른데 그는 이를 알지 못한다.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PPT 장표만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있는 정보조차도 불충분하다. 실무자들이 시스템과 파일철에 기입해 놓은 계약 정보들은, 보고 장표를 염두하고 기입한 것이 아니다. 내용이 빠져 있거나, 설명이 불충분한 경우 그는 담당자들에게 연락하여 재문의한다.



 제대로 된 관리 시스템 미흡

 시스템 개선 의지 없이, 아날로그/재래식 관리를 강화하는 전사 방향

 미약한 관리 프로세스조차 미준수하는 실무진


 사업지원팀은 관리팀과 실무진의 중간에 위치한다. 좋게 말하자면 다리 역할, 안 좋게 말하자면 동네북이다. 그가 차차 알게 되지만, 사업지원팀에서 진행하는 업무는 대부분 위의 세 가지 악조건을 전제한 상태로 시작한다.



 추후 매출계약 결산 업무는, 누군가에게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중심 업무로 자리잡게 된다. 시스템은 개선되지 않고, 실무진도 바뀌는 것은 없다. 사업지원팀의 부담은 가중된다. 지금까지의 매출계약 결산을 월별로 비교하는 보고서를 제출하라느니, 계약별 구분을 더 세세히 작성하라느니, 신규 매출을 더 자세히 작성하라느니, 매출계약서에 사업부 리더들의 싸인까지 곁들이라는 식이다.


 행정을 질색하는 그가 가장 기뻐하는 방향이다. 이 회사는, 아날로그한 관리를 더욱 촘촘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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