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카르마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 얼굴 학생 Jun 23. 2024

53 - 골프장 예약

선착순 전화, 의미충

 어느 날, 영업부장이 그를 부른다. 영업부장은 사업부장 다음 가는, IT사업부의 2인자다. 긴장한 상태로 영업부장실로 들어가니, W-3 사원이 있다.


  영업부장 : 어,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이번주 요일에, 골프장 예약을 해야 하거든. 골프장 예약을 받는 기간이 있는데, 그게 내일부터야. 내일 좀 일찍 와줄 수 있나? 아침 8시 반에서 9시쯤으로.

  그, W-3사원 : 네!

  영업부장 : 그래 고마워요. 골프장 전화번호가 2개니까, 둘이 번갈아가면서 전화를 해가지고. 예약을 좀 해줘. 토요일, 시간은 오전 10시 전으로. 빠를수록 좋아. 햇빛 약해서 시원할 때.

  W-3 사원 : 이 번호는, OOO CC인가요?  (컨트리클럽 CountryCloub, 골프장이다)

  영업부장 : 어 그래. W-3 씨는 몇 번 예약했었지?

  W-3 사원 : 네. 토요일 10시 이전 말씀이시죠?

  영업부장 : 어 혹시 그때 시간 안된다고 하면, 아예 4시로.

  W-3 사원 : 알겠습니다!

  영업부장 : 여기 얼굴 사원한테도 잘 알려주고. 그럼 잘 부탁해요~


영업부장실 밖


  그 : 안녕하세요 W-3님. 전화번호로 전화해서 예약하면 되는 건가요?

  W-3 사원 : 네. 그런데 여기가 전화가 몰려서, 연결되기까지가 엄청 걸려요.

  그 : 그래요?

  W-3 사원 : 네. 일단 내일 아침에, 저는 이 번호로 할 테니 얼굴님은 요 번호로 계속 전화해주세요.

  그 : 알겠습니다.


 W-3 사원은 계약직으로, 주로 매출 전표 업무를 담당한다. 이외에도 비공식적으로는, 영업부장의 비서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IT사업부에는 총 3명의 계약직이 있었다. 사업지원팀의 W 사원, 영업팀의 W-2 / W-3 사원 이렇게 셋이다. 눈치 빠르거나 권위에 민감한 이라면, 골프장 예약 같은 일을 왜 정규직에게 시키는지 불만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열정 넘치는 그는, 이 또한 영업부장의 신임이자 관심이라 여겨 마냥 기쁠 뿐이다.



 다음날 아침 8시 30분, 그와 W-3 사원은 신나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다.

  W-3 사원 : 얼굴님! 통화 연결 되셨어요?

  그 : 아뇨, W-3 님은요?

  W-3 사원 : 저도 안 됐어요. 하 이거 처음에 안되면 엄청 오래 걸리는데


 그와 W-3 사원은 계속해서 통화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매한가지다.

  - 안녕하세요, !@#%한 OOO CC 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담당자 연결드리겠습니다. 뚜우- 뚜우- 죄송합니다. 통화량이 많아... ...


 연결이 되지 않았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고 다시 걸어야 한다. W-3 사원의 말에 따르면, 골프장 예약은 오로지 전화 연결로만, 그것도 선착순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모든 골프장이 다 이 모양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영업부장이 요청한 이 골프장은 그렇다. 한 달의 예약이 열리는 바로 그 순간, 전국의 온갖 회사 비서들이 일시에 2개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건다는 것이다.

 얼마나 전화번호를 빨리 누르느냐,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전화를 거느냐, 또 하필 그 타이밍에 통화가 끊겨 있어 연결될 수 있었느냐 등으로 판가름 나는 승부다. 전화로만 예약을 받으니, 원하는 시간대가 비어있는지 예약이 되어버렸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냥 무지성으로,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야 한다.



 한창 바쁜 와중, T 과장이 출근한다.


  T 과장 : 얼굴아 안녕~

  그 : 안녕하십니까!

  T 과장 : 뭐하고 있니?

  그 : 영업부장님 골프장 예약하고 있습니다.

  T 과장 : 아 그거~ 그거 좀 오래 걸려. 핸드폰이랑 구내전화 동시에 써야 해. 구내전화는 재다이얼 누르면  돼.

  그 : 아, 알겠습니다!


 T 과장도 이미 이골이 난 듯, 다 아는 눈치다. 그는 T 과장의 조언대로, 자리의 구내전화까지 동원하여 2개로 전화를 걸어댄다. 그렇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전화 연결은 여전히 되지 않는다.



 8시 반부터 시작한 전화 폭격이, 9시 반이 넘어서까지 이어진다. 그때, 갑작스레 전화가 연결된다.


  골프장 : 네, !@$%$ CC입니다.

  그 : 안녕하세요!

  골프장 : 네 안녕하세요.

  그 : 아, 토요일 오전 10시 이전 타임 예약하려 합니다.

  골프장 : 잠시만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 네...

  골프장 : 토요일 오전, 10시 이전 말씀이시죠?

  그 : 네.

  골프장 : 예약 가능하십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 : 영.업.부.장. 입니다.

  골프장 : 네, 토요일 오전 타임 영업부장님 예약 완료되었습니다.

  그 : 다 된 건가요?

  골프장 : 네.

  그 : 네 감사합니다!


  그 : W-3 님, 방금 예약했어요!

  W-3 : 와 감사합니다!



 여느 책에서 나온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이 날의 성공은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골프장 예약이 되었다. 이후에는 항상 W-3 사원이 예약에 성공한다. W-3 사원은 콘서트 예매 등 선착순에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그는 그러한 측면에서 아주 약하다. 대학교 시절 수강신청이 단적인 예다. 그는 수강신청을 첫 시도에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처음에는 실패하고, 정정기간 일주일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남는 자리를 기다리다가 겨우 수업을 끼워 넣곤 했다.


 고마워하는 영업부장을 보며, 그는 내심 뿌듯하다. 하지만 뿌듯하면서도 기분이 애매하다. 골프장 예약이라. 골프장 예약이라는 업무에는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이런 생각은 너무 건방진 것 아닐까?

 신입사원으로써, 주어진 일에 열심히 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골프장 예약이니, 골프장 관련하여 전문가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골프장이 인기가 있고, 어떤 골프장이 요즘 잘 나가고 있는지.

 요즘 골프장의 트렌드는 어떻고 골프장을 즐기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인지.

 그래서 골프장 전문가가 된다면.

 그리고 골프장 예약 전문가가 된다면?

 그래, 골프장 예약 전문가가 된다면...


 그는 생각을 멈춘다.

매거진의 이전글 52 - 승진년도 기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