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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하 Mar 10. 2024

내가 언제부터 귀한 대접받을 사람이었다고

나라는 존재의 '처음'에 대해서.

 나는 ADHD라도 있는 것인지 과몰입 성향이 굉장히 강하다/심하다. (딱 엄밀하게 ADHD라고 하긴 어려운데, 주의력 문제가 있다.)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와 중립적인 의미의 단어를 함께 쓴 이유는 장점이 될 때도 있고 단점이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한 스물세 살 즈음 되어서는 장점이 될 일이 많았다. 한 번은 대학생활을 하면서 회계학 스터디에 참여했는데 같이 참여한 과후배가

'언니는 정말 열심히 사시는 것 같아요. 존경스러워요. 뭘 해도 잘 되실 것 같아요.'

라고 과분한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뭐랄까, 눈앞에 놓인 과제에 정말 온 신경과 피 한 방울까지 다 쥐어짜는 사람이었다. 공부, 운동, 일 심지어 연애에 있어서도! 최근에 데이트했던 어떤 남자는 나에게 '넌 진짜로 한 남자만 볼 것 같아.'라고 했었다. 그만큼 눈앞에 놓인 것에 온 에너지를 다 쏟는다. 나를 추켜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요즘엔 진짜로 이런 사람이 별로 없다.(이런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말 별로 없다는 뜻) 위에 쓴 과몰입 증상과 목적지향적인 성향, 강박에 의한 완벽주의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성격 같다. (강박이라고 해서 깔끔한 건 전혀 아니다 :(  )



 칭찬을 많이 들었다. 줄줄 열거하긴 부끄러우니 하진 않겠지만, 우울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길 때 예쁜 선물용 상자에서 꺼내먹는 초콜릿처럼 날 기분 좋아지게 해 줄 만한 칭찬들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 스스로 칭찬받는 걸 디폴트로 여기게 되었다고 할까. 가끔 혹평을 들으면 마음속에서 지진이 나는 것 같다. 솔직히 '내가 이런 말 듣고 살 사람이 아닌데.' 하는 오만한 생각도 몇 번 했다.



26) 메가 5타 킹콩 감동실화.. - 오르비 (orbi.kr)




 나는 수험생 시절 이 선생님의 강의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웹서핑을 하다가 이 선생님 관련한 글을 보면 가슴 뭉클한...... 그런 게 있다.



 신인강사시절 수강생이 너무 없어 곤란했던 썰들은 꽤 많다. 그런데 내가 이 글에서 유독 진한 감동을 느낀 이유는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후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같은 마음가짐으로 강의에 임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수험생들을 정말 예뻐하는 게 느껴진다. 나도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데 얼마나 예쁜지 표현을 할 때마다 저 '동그래서 예쁘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저 글을 보고 나도 나라는 존재의 '처음'을 떠올려본다.


사실 가만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추해 보면 인류애가 '바사삭'되기도 한다. 아주 부촌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다들 본 적이 있을 텐데, 나는 한 반에 늘 한 두 명씩 있는 '가정이 불우한 아이'였다.


뻔한 레퍼토리. 아빠는 술주정 심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하며 품행에 문제가 있었다. 엄마는 대외적으론 그걸 커버 치려고 노력하는 '생활력 강한 엄마' 였으나 나에겐 그저 나를 화받이로 쓰는 엄마였다.


이게 실화일까 싶을 수도 있지만, 집에 쌀이 없었던 적도 많다. 전기가 끊긴 적도 있고 가스가 끊긴 적도 있고. 학교나 학원에 교육비, 회비 등을 납부하지 않아 기가 죽고 눈치가 보였던 적도 매우 많다. 이게 살짝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단순히 글로 그때의 상황을 적는 것인데도 뭔가 기분이 좋지가 않다.


경제적으로 빈곤해도 정서적으로 빈곤하지 않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아니 사실 이게 최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노후 준비 안된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심리적 부담이 커져서인 것 같다.) 아빠는 매일 같이 욕설을 쏟아붓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만둣국을 끓이려고 나에게 재료를 사 오라 시켰는데 좋지 않은 주의력 때문에 한 두 가지를 빼먹고 사 왔었다. 그걸 알고 다시 마트에 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아빠는 육두문자를 퍼부으며 같은 동에 사는 사람들이 다 들리도록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난 너 같은 애 본 적이 없다. 네가 최악이다.'는 정말 1000번은 들은 것 같다. 다리에 멍이 드는 건 예삿일이고 안경을 부러뜨려서 학교 가기가 어려웠던 적도 있다.


엄마는 그 사이에서 대부분 내 편을 들었으나 가끔 아빠가 조금만 잘해주어도 아니면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는 폭행당하는 것을 방임했다. 사실 가끔 부추겼다. 어떤 정신과의사가 유튜브 영상을 찍어서 올렸는데 자식이 맞는 걸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 엄마들 내면엔 '내가 안 맞고 쟤(본인 자식)가 맞아서 좀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있다고 한다. 엄마는 표면적으론 나에게 그나마 정서적 위로가 되는 가족구성원이었으나 계속 깎아내리며 자존감을 훔쳤다. 여자들은 이 느낌을 잘 알 수도 있다. 표면적으론 나랑 되게 친한데 끊임없이 흠잡는, 또는 묘하게 기분 나쁜 친구. 내 엄마는 나 어릴 적엔 은근히 이러다가 대학 가고 나서는 대놓고 그랬다. 만약에 공부를 하다가 엄마 말을 못 듣거나 퉁명스럽게 대답하면 좀 배웠다고 (못 배운) 부모 무시한다며 피의 복수를 진행했다. 나는 이 수작에 말려들어 과로하다가 (경제적으로 압박하여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너 그러다 진짜 죽는다.'라는 경고도 몇 번 들었다.


이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뭐랄까...... 각 반에 한 두 명씩 있는, 가정환경 기가 막힐 정도로 불우한 애가 바로 쟤구나. 저런 가정이 꼭 몇 있지. 이 정도였다. 요즘 유행하는 '흐린 눈'하고 본다는 표현이 딱 걸맞겠다. 딱히 숨긴 적도 없는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냥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수년간 방치되었다.


 얼마 전 유행한 드라마 '더글로리'의 대사처럼 '머리에 국영수 좀 채우고' 번듯한 대학생 되니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달라졌다. 내가 과거에 당한 무수한 폭력들의 경중이 지금의 나의 가치에 따라 좌우되기는 것을 깨닫고 나니 세상이 조금 미워지기도 했다. 계속 생각하다 보면 더더욱 '현재 나의 대외적 가치'에 집착하게 된다. 위에 적었듯이 조그마한 지적에도 마음엔 지진이 난다.



어릴 적 나의 소망은 '아버지에게 욕 안 먹고 안 맞고, 수중에 좀 자유롭게 쓸 돈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교수나 선생님께 칭찬받고 고객들(주로 부모님들)에게 칭찬받고 이성에게 매력적이라는 소리 듣는게 당연했나?

나는 이미 바라던 걸 이뤘다. 그 외의 것들은 다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정말 보너스타임이다. 가정이 불우해서 맞아 죽을 뻔한 것 말고도 나는 진짜로 죽다 살아난 적이 있다. 왜냐면 정신과에서 오진을 당해서 진짜로 자살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죽을 용기가 안 나서, 약을 끊으면 죽을 용기가 날까 해서 약을 뚝 끊었더니 바로 며칠 뒤 머리가 맑아지며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평안해졌다. 나는 이 극적인 평온감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 '그래비티'의 지구 도착 장면을 자주 언급한다. (어릴 땐 그냥 멋있어서 봤는데 지금 보면 감흥이 색다를 것 같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 부여잡기란.....)



모든 일엔 양면성이 있다는 말이 있다. 앞선 일들을 겪은 덕에 나는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 친구 한 명도 그런 말을 했다. '너는 바라는 게 없어 망할 수 없는 메커니즘이다.'라고. 몸이나 얼굴에 쓰여있진 않아도 나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 번은 거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다. 사주팔자 따위를 맹신하진 않지만 좋은 사주를 타고나진 못한 것 같다. 저승에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왔는데 살아 있는 것 만으로 감사해야지 무얼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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