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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하 Mar 14. 2024

두루두루 vs 한 사람과 깊게

독서 후 사유하기 20240314-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몇 주 전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사실 선물을 받았으니 읽고 감상문을 남겨 전달해 드리는 게 예의니까...... 하는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생각보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책이다. 사람이 아닌 일이나 어떤 분야에 사랑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혹은 그러한 감정을 이해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X라고 해야 하나. 잠깐이지만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한 번은 그 사람에게 내가 선택한 분야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마구 표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어리석은 행위였다. 산소 (매질) 없는 우주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어차피 전달되지 않을텐데. 그 사람은 곧바로 눈을 부릅뜨고 다소 압박하는 느낌으로 공부하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그 사람에게 공부란 '편안한 삶을 위한 수단'일뿐이었다. 대학에서 보낸 시간들은 30살 이후의 안락한 삶을 위한 인고의 시간이었다. 사실 공부량이 너무나 많은 과라 즐기고 말고 할 게 없었을 것이다. 내가 전공 공부를 하는 이유가 '사랑스러워서'라고 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게 왜 사랑스럽지?' 했던 그 순간을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누군가 내 삶에서 최고로 모욕적인 순간을 꼽으라 하면 이 순간을 꼽겠다. 그러나 오늘 심채경 교수님께서 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보며 그 상처를 보듬었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그래, 나도 이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부와 명예를 좇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사람이 좋다. 굳이 남과 경쟁하고 파이싸움 할 필요 없이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몰두하는 사람들이 좋다.


 이 책엔 천문학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참 많다. 그런데 오늘 읽었던 부분에서 그게 가장 잘 느껴졌던 부분은 긴 문장이 아니라 '타이탄 전공자.' 이 짧은 구이다.


상당한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 후, 국내에서 유일무이한 '타이탄 전공자'가 되어 대학원을 졸업했다. 물론 모든 박사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남의 연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에게 주는 학위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유일무이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에서는 타이탄에 관심을, 학위논문 주제로 삼을 만큼의 관심을 갖는 자가 나 이후로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로맨틱하다. 중력파나 행성 분류 법칙, 겉보기 등급 따위(아는 게 이런 것 밖에 없다:( )를 연구하는 게 하니라 한 행성을 연구하는 사람. 한평생 '타이탄'을 궁금해하는 사람. 천문학에 관해선 거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타이탄에 수십 년을 바쳐 연구할 거리가 있을까 싶다. 수십 년이 지나 교수직에서 물러날 때가 되시면 타이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얼마나 깊어지실까.




  내가 대인관계를 맺는 스타일도 이렇다. 사람에 대해 알아갈 때 마치 한 행성만 연구하는 사람처럼 깊게 알아가는게 좋다. 대화를 하다가 서로 아는 게 너무 많아졌음을 깨달으며 '더 이상 말할 만한 게(알려줄 만한 게) 없네.' 했을 때의 그 짜릿한 친밀감이란. 그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그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게 나라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낀다.


 이렇다 보니 나는 술자리에 나가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땐 술자리에 나가면 대개 서로의 sns 계정을 공유한다. 잠깐 대화 나눈 사이라도 그렇다. 그게 뭔가 의례가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알게 된 사이에서 깊은 대화 오가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조금 더 친해지더라도 마찬가지다. '대학친구는 비즈니스 관계'라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경계심을 풀고 약점이나 고민 또는 널리 알려지면 곤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이다. 소문이 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sns가 활성화된 세상이다 보니 친구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 '겉친구'들 사이에서 놀다가 어느 순간엔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왜 술자리에 안 나가냐는 의혹  가득한 눈빛을 받은 적도 많다. '대학생활은 그게 재미인데!' 하면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조금 움츠러들기도 했다. 안 그래도 사회성이 부족한 게 콤플렉스인데. 피해의식일 수도 있으나 '너 사회성 부족한 것 아니야?'라고 추궁하는 것 같았다. 사회성 없는게 많이 티났나 싶어 '인싸연기'를 하기도 했다.


사실  인정한다. 사회성을 '나와 잘 안 맞는 사람과 부딪히지않고 적당히 친해지는 기술'이라고 정의한다면,나는 사회성이 부족한게 맞다.계속 이렇게 나와 잘 맞는 사람과 깊게 친해지는 방식을 유지한다면 사회성이 별로 향상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방식의 '치명적 단점'이 있는데,절교했을 때 심적 고통이 크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안된다. 그 사람 고유의 것을 알아가고 좋아했던 것이므로. 교류의 깊이가 컸던 만큼 관계를 끊고 나서의 고통도 커진다.


그렇지만 이런 관계 맺기만이 줄 수 있는 엄청난 이로움도 있다.

생물학과 역사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칼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나 또한 이렇게 생각한다.타인을 이해하면서 자신을 잘 이해하게 된다고.


나는 이 문장을 보고 예전에 유튜브 '씨리얼' 채널에서 본 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한 임상심리사는 유독 성인 ADHD 환자분들에게 공감이 잘 안되었다고. 이정도 문제는 다 가지고 있는거 아니야? 다들 이런 실수 정돈 하고사는거 아니야?했단다. 그러다 아,내가 성인 ADHD라, 내가 주의력이 부족하고 산만해서 이런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계속 찾아낼 것이다. 탐구할만한 행성을. 그리고 그 속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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