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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May 13. 2022

더할 나위 없는

맑은 하늘과 그녀에 대한 기억

  그녀는 3일에 한 번 씩 Rica comida('리까 꼬미다' - 맛있는 음식이라는 뜻)로 출근한다. 얼마 전 하릴 없이 집에 있던 그녀에게 사촌 오빠들이 제안한 일이었다. 콜롬비아 전역을 뒤덮은 학생 시위 때문에 그녀의 학교는 몇 학기 째 수업이 밀리고 있었다. 넌 여자니까 금방 요리 배울 거야, 라고 Alejandro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교육학 교수가 수업시간에, 여자니까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발언으로 학생 몇몇과 교수 사이에 설전이 오갔고, 그 일은 얼마 간 학생들 입을 오갔다. 하지만 지금은 휴교와 학생 시위로 모두에게 잊혀진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되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이내,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는 거야, 라고 Alejandro에게 물었다.


  그녀는 구름 없는 아침을 좋아했다. 아주 어렸을 적, 학교 첫 발표회에서 그녀는 춤을 추었다. 평소 친구들 사이에서 활달했던 그녀였지만, 첫 무대는 어린 그녀에게 너무 큰 무대였다. 그녀는 날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커지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고, 무대에 서기 전날 밤 엄마에 품에 안겨 울고 말았다.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울음을 토해내는 그녀에게 엄마는, 내일 구름 없이 맑은 하늘이 너를 축복해줄 거야, 라고 말했다. 다음 날, 거짓말처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그녀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모두가 그녀를 칭찬했다. 그 뒤로 그녀는 구름 없는 아침 하늘이 그녀에게 큰 힘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물론 보고타Bogotá의 변덕스러운 하늘은 맑은 아침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3-4번 일기가 변했다. 그녀가 구름 없는 아침 하늘을 보고 황급히 씻고 나갈 준비를 하고 나면,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졌다. 애초에 고산지대라서 구름도 자주, 많이 꼈다. 그녀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아침 하늘을 확인하지 않게 되었다.  하늘이든 현실이든 구름낀 날이 많았다. 요즘 같은 때에는 정부 반대 시위에 나갔던 친구들이 무사한지 SNS로 체크하느라 아침 하늘 보는 것을 깜빡하기도 쉬웠다. Rica comida 출근을 맑은 아침 골라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하늘을 확인하지 못해도 큰 의미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Rica comida의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들은 오픈 시간에 맞춰 나오지 말고 점심 즈음부터 나오라며 그녀를 배려했다. 감자튀김, 유까Yuca 튀김 등 즉석 음식을 주로 파는 곳이어서 조리도 금방 배웠다. 손님들도 많지 않아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간혹 손님 응대를 하다보면 콜롬비아의 상황에 대해 잠시 잊기도 했는데 그녀는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딱 한 가지 흠이라면, 간판에 써 있는 –CON EXQUISITO SABOR!-(더할 나위 없는 맛과 함께!)였는데, 그녀는 그 어구가 조금 낯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나쁘지 않은 점원이었다. 그녀는 손님들 응대를 스스로 즐거워했다. 도회지 중심가다 보니 사무적인 사람들도 많았지만 몇몇 손님들과는 친한 친구와 떠들 듯 조잘조잘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중에서도 Corea에서 왔다고 하는 한 여행객을 좋아했다. 그는 제멋대로 자란 곱슬머리를 하고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딱 봐도 배낭여행 중인 것 같았다. 그는 짧은 스페인어로 열심히 메뉴들을 물어보고, 그 전에 포장해 간 Rica comida의 음식을 칭찬하고, 할 말이 없을 땐 콜롬비아의 상황에 대해 많은 것들을 물어봤다. 물론 그가 대답을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런 아기 같은 모습이 그녀는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찾아오면 그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결혼하자고 보챘다. 그때마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다고 했다.


  그녀는 일을 나가지 않던 날, 인터넷으로 Corea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찾아보았다. Corea는 중국과 일본 사이 콩알만한 땅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알고 보니 엄마가 큰맘 먹고 삼촌 결혼선물로 사준 TV가 그 나라 회사 것이었다. 잘 사는 나라라고 했다. 독재 시절을 거쳐 민주화가 잘 정착됐다고 했다. 마침 연관된 글에는 촛불을 들고 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Corea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다. 시위에 나간 친구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같아 보였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EXQUISITO(더할 나위 없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여행객에게는 떠나는 날이 있는 법. Luis가 일하는 날 그 여행객이 Rica comida에 와서는, 12월 첫 날에 보고타를 뜬다고 말했다. 저 멀리 북쪽에 있는 따강가Taganga라는 도시에서 다이빙 자격증을 딴다고 했다. 그녀는 마음 편하게 다이빙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그가 부러워졌다. Luis의 말로는, 그가 따강가로 떠나기 전날 아침 Rica comida에 들를 거라고 했다.


  원래 일하는 날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Rica comida의 아침 오픈 시간에 맞춰 출근했다. 평소 출근하던 시간에 비해 이르다보니 그녀는 오빠들이 부탁한 감자튀김 재료 가져오는 것을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Luis 오빠와 Alejandro 오빠에게 혼났다. 정신없이 가게 오픈을 위한 청소를 마치니 그가 찾아왔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어디에 가느냐, 무얼 하러 가느냐,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건넸다. 그녀는 오늘도 그에게 결혼하자고 보챘다. 마지막이겠거니 싶어 더 그랬다. 사촌 오빠들은 옆에서 이런 여자 어디 없다며 그녀 편을 들어줬다. 그는 웃으며 그녀의 농담 섞인 청혼을 거절했다.


  그는 유까 튀김과 몬동고Mondongo 수프가 든 포장용기를 들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방금 그녀가 닦아둔 Rica comida 매장을 지나, 가게 문을 열고 나섰다. 그녀는 그가 있었던 Corea라는 곳에 대한 생각, 그녀를 둘러싼 콜롬비아의 상황들, 그리고 아침에 깜빡한 감자튀김 재료 때문에 그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그녀는 혹시나 또 깜빡한 것이 없을지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깜빡한 것은 따로 있었다. 보고타의 하늘,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보고타 아침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EXQUISITO(더할 나위 없는)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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