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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Apr 15. 2022

은혜네 민박 풍경

내 여행의 시작점

  Carrera 27 #72-26 Barrio, Bogotá     


  이곳이 내가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묵고 있는 곳이다. 보고타에는 보고타 공항의 북쪽에 있는 하보케Jaboque 습지에서 시작되어 남동쪽에 위치한 유명한 쇼핑몰 아베니다 칠레Avenida Chile 너머 보고타를 감싼 산등성이까지 내달리는 왕복 4차선 도로 Calle 72가 있다. 그 길을 쭉 달려오다 아베니다 칠레 쇼핑몰에 못 미쳐 수녀회 건물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오면, 포장이 엉성하게 되어 이미 자갈과 흙웅덩이로 바뀌어버린 골목길 오른편으로 콜롬비아 유일의 한인민박, ‘은혜네 민박’이 보인다.


  은혜네 민박도 콜롬비아 집답게 길과 마당 사이에 살구빛이 도는 하얀색 페인트칠이 말끔하게 된 쇠창살이 굳건하게 서 있었다. 쇠창살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가면 때때로 집에서 키우는 린다Linda가 대문 옆에 묶여있었다. 대문 옆에는 작은 나무 의자 몇 개가 있어, 린다는 주로 거기에 앉아있었다. 린다linda는 스페인어로 ‘예쁜’이라는 뜻이었지만 린다는 자주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린다는 낯가림도 심해서 항상 없는 듯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린다를 쓰다듬고 있자면 그 눈이 무얼 말하는지 궁금했다.


  생각보다 육중한 대문을 열쇠로 열고 민박집으로 들어서면 1층에는 바로 왼편으로 화장실, 오른편에는 민박집 사장님 남편분이 하시는 회사 사무실이 있었다. 직원 5-6명 정도가 알맞게 일할 수 있는 크기였다. 가끔 프린트 할 일이 있거나 해서 찾아가면 현지인 회사 직원들이 친한 내색을 하며 말을 걸어주었다. 자주 못 보았는데도 간만에 만나면 ‘저번에 시장은 잘 갔다왔어?’, ‘별 일 없어?’하고 물어오곤 하는 게 내심 좋았다. 대문 맞은편 벽쪽으로는 세탁기 몇 대가 있는 세탁실이 있었고 세탁실 입구 왼편으로 1층 복도와는 반대 방향으로 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2층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오른편으로 이 민박집의 꽃 2층 식당 겸 거실이 있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아래서 후술하자. 2층 거실에서 나오면 다시 1층 복도와 같은 방향으로 복도가 나있었고, 오른편에 방 둘, 3층으로 가는 계단 바로 옆에 방 하나가 있었다. 큰 방 두 개는 주로 여행자들의 도미토리였고, 오른쪽 끝에 있던 작은 방 하나를 사장님 남편분이 가끔 쓰셨다. 복도의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고 그 화장실 옆으로 다시 3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었다.


  3층 계단 바로 왼편으로는 차장님이 쓰시던 방이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교환학생으로 와 계시던 지연 씨가 살고 있었다. 오른편에 있는 복도를 따라 가면 혼자 쓸 수 있는 방 하나가 더 나왔고, 이 방이 은혜네 민박 나의 첫 방이었다. 그 방을 지나 조금 더 가면 3층에도 거실 겸 주방이 하나 있었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층 거실보다는 항상 더 차분하고, 조용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내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종종 난 여기서 일기를 썼고, 간혹 사무실 직원 몇이 여기로 올라와 밥을 먹기도 했다. 3층 복도 끝 오른편으로는 화장실 하나와 박사님이 사시던 방이 있었다.     




  콜롬비아는 먼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정 반대편에 있는 나라였다. 게다가 단기여행자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이던 남미 시계/반시계 루트에서 볼 게 없다고 빗겨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콜롬비아의 유일한 한인민박. 그래서 그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여유가 좀 있던 단기여행자들 몇몇, 각자만의 이유가 있었던 장기여행자들, 가족 단위 여행자들, 교환 학생으로 콜롬비아에 온 학생들, 어학연수를 이유로 온 사람들, 콜롬비아에 직장을 잡은 사람들, 사업차 콜롬비아를 방문한 사람들.



  그리고 2층 거실은 그런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꽃을 화려하게 만개하던 그런 곳이었다. 하릴없던 많은 장기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작업을 하거나, 수다를 떨거나, 커피를 즐기며 게임을 했고, 새로 온 여행자나 간혹 오는 단기여행자, 가끔은 차장님이나 박사님이 합류해 이야기꽃이 화사한 날들이 많았다. 거기서 많은 형누나들과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던 게 잊히지 않는다. 때론 왁자지껄했고, 어떨 땐 새벽까지 불을 끈 채 바깥 골목길 가로등이나 달빛이 비춰주는 빛에 의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때로 사장님은 우리를 위해 특식을 제공해주셨는데, 그럴 때면 2층 거실은 파티장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2층 거실에서 서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건, 모두가 서로에게 열려 있어서였던 것 같다. 민박집 사장님은 이미 많은 여행자들을 봐온 터라 신기한 이야기들에 익숙하셨다. 차장님과 박사님은 보통의 여행자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누군가를 훈계하려고 하신 적이 없었다. 여행자들은 마약과 총기로 유명했던 콜롬비아에 와 두려움에 떨며, 미리 와서 지내고 있던 여행자들에 의지해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첫 발걸음을 떼곤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며칠 후엔 새로운 여행자들을 이끌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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