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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믈리에 Nov 30. 2022

행복 앞으로 외길 진행

진짜, 맛있는집, 떡볶이


어린 시절 즐기던 게임의 대부분은 소위 '외길 진행'이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가 드물었고 단일한 루트에 따라 내용이 진행되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이런 게임들에 대하여는 '선형적Linearity'이라든가 '일자 진행', '일방통행', '오솔길' 등의 표현을 쓴다). 그러나 점차 게임 산업이 발전하고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되면서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내용과 결말이 달라지는 '분기점'을 가진 게임들이 점차 늘어났다(멀티 시나리오Multiple Scenario 또는 멀티 엔딩Multiple Endings 유형). 그렇게 게임 내의 선택지와 분기점이 크게 늘어나서 '자유도自由度' 또는 '비선형성Nonlinear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 게임 내 선택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가 대폭 향상되었다. 이러한 게임들은 게임을 완료하기 위한 다양한 경로와 방법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게임의 완료와 무관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자유를 제공한다. 캐릭터의 외관을 꾸미는 커스터마이징이라든가 아이템을 제작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도 등은 한편으로 게임을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가 다양한 것은 좋다만 분기점과 선택지가 많다 보니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클리어를 위한 난이도가 올라가기도 한다.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적당한 자유도 내지 비선형성을 가진, 즉 적당히 자유롭게 진행되면서 그 진행 과정에서 흥미로운 게임들이 다수의 게이머들에게 지지를 받는 듯하다. 아마도 그 적당한 균형점이 명작을 만드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게임 내에 풍부한 콘텐츠를 준비해둔들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혹은 어른의 사정으로) 그것이 완전한 자유에 이르지도 못할 뿐 아니라, 게이머들이 이를 다 누리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플레이를 하고 나면 그 게임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거나, 후속작이나 더 매력적인 게임이 출시되어 다른 게임을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게임을 구매해서 엔딩까지 가지 않고 더 플레이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무엇보다 우리는 선택에 지쳐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만 다양한 제약 속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많지 않고, 그마저도 우리는 좁혀가며 루틴 하게 살아간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자유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전근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신장되었다지만 자본주의 하에서의 자유는 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어디까지나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선택지는 살아 남기 위한 경쟁의 틀 안에 갇혀있다. 프롬은 이러한 경쟁이 주는 불안과 고독이 우리를 의지할 수 있는 권위에 자유를 반납하게끔 한다고 주장했다. 꼭 이렇게 거창한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게임이 생업이 아닌 이상 지친 일상을 떠나 즐기려고 게임을 하는 것인데 과도한 자유는 게임에서까지 우리를 불안하고 고독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도 과거 비선형적 게임들에 몰입했던 적이 있지만 언젠가부터 외길 진행 게임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늙고 병들어서 이제야 beginner나 easy난이도가 왜 존재하는지 알게 된 것도 한몫하는 이유이지만(심지어 요즘은 monkey 난이도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게임에서는 그냥 즐겁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선택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에 지쳐간다. 나이가 들수록 잘못된 선택에서 오는 리스크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간다. 그러다 보니 쉬면서 하는 게임에서까지 그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오는 듯하다. 외길 진행 게임에서도 생뚱맞게 게임오버가 되어 '세상 되는 일 하나 없네', '세상 나한테 왜 그래' 하고 분노하긴 할 수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달리면 어디가 나오죠'하면서 고독해하고 슬퍼할 염려는 적은 것이다. 숙련도의 문제로 오는 실패는 다시 노력해서 극복하면 되는 문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택 과정에서 오는 실패를 돌이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선택 과정에서 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혹자는 목숨(또는 목숨만큼의 자본)을 걸지 않아도 되면서 선택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치열한 승부를 즐길 수 있는 곳이 게임 말고 무엇이 있냐고 하면서 나의 이러한 무기력을 지적했다. 그러나 나의 가장 귀중한 자원인 시간을 쓰면서 무엇을 얻겠냐 하면 확실히 보장된 그런 즐거움만을 얻고 싶다. 그래, 별다른 선택 없이 고민도 없이 행복 앞으로 외길 진행!





그냥 대충 툭하고 걸친 것 같은데 맵시가 나는 멋쟁이들이 있다. O씨는 멋쟁이다. 단순히 옷차림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젊음을 극한까지 누리며 살아온 풍운아 같은 과거가 그러하고, 늘 깨어있는 건강한 정신이 그러하다. 언행은 늘 간단명료해서 당당함이 느껴진다. 내가 보는 그의 삶이 어떤 느낌이냐면, 한여름 점심시간 식당에 앉자마자, (다음 일정은 생각지 않고) 생맥주 500cc 한 잔을 부리나케 주문해서는, 채 찬이 나오기도 전에 목구멍 열고 비워버리고, 크으- 하면서 내려가는 찬 기운을 음미하는 느낌이랄까. 좀 지난 시쳇말로 이걸 사이다라 하던가.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는 복잡한 투쟁이 있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외면은 아주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다. 멋있어!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나에게 소심하게 말을 걸었다.


-야 내가 미친 떡볶이집을 하나 알고 있는데...

-오 어딘데? 

-음... 아니다... 하지 마라...

-응?

-할머니 소문나면 힘들고... 힘들면 가게 오래 못 한다... 지금도 힘겨워보이시던데...

-아니 천하의 O님이 왜 이렇게 말이 길어. 어디야.

-하아... 어디냐면...


그냥 대충 툭하니 끓인 것 같은데 감칠맛이 나는 요리가 있다. 그렇게 나는 맛있는집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맛있는집 떡볶이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이곳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사실 한도 끝도 없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이거였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맛있는집 떡볶이는 뭐랄까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심하다 싶을 만큼 단순한 메뉴 구성과 재료 구성에 어디 하나 힘준 곳 없지만 어디보다 힘세고 강한 맛집이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감성 채울 요소들까지 충만하다. 허름하지만 깨끗한 테이블. 할 말만 하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주인장의 말투. 버릇처럼 찾아오는 동네의 단골들. 멀리서 찾아왔다는 수많은 원정팬들. 느지막이 열고 재료가 소진되면 문을 닫는 영업시간. 예측불가의 휴무일과 도통받아주지 않는 전화. 떡볶이집을 주제로 동화책을 쓴다면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겠다. 이 풍부한 콘텐츠로 나는 대체 무슨 글을 쓸 것인가!


-맛있지 않냐?

-맛있네.

-달리 설명이 필요 없어.

-약간 칼칼하지만. 

-맛있어.

-어 맛있네.


그러나 이곳을 장황하게 설명하려는 것은 오히려 이곳을 전혀 설명해내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본래 진짜는 많은 설명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던가. 자세히 설명하려 할수록 이곳을 설명해내기 어렵다. 애초에 상호부터 '맛있는집' 아주 자신만만하고 솔직 담백하다. 맞다. 여기는 맛집이다. 메뉴가 이것저것 적혀있는데, 사실은 떡볶이와 계란뿐이다. 떡볶이 맛집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선택지도 단순하다. 주문해서, 먹고, 맛있어하면 된다. 맛있게 먹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면? 포장하면 된다. 맛있는집에서는 행복 앞으로 외길 진행. 실망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보세요? 네네 열었어요. 앉았구요. 네네 아 4인분요, 그리고 따로 2인분 네네.

-포장?

-어, 같이 먹을 거랑 집에 가져갈 거 포장해다 달라하시네.

-잘 만들어진 떡볶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구먼.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 일이 다 이곳 같으면 뭔 걱정이 있겠나 하고.

-그러게, 행복 앞으로 외길 진행이다. 




그냥 대충 툭하고 걸친 것 같은데 

맵시가 나는 멋쟁이들이 있다.

그냥 대충 툭하니 끓인 것 같은데 

감칠맛이 나는 요리가 있다.


진짜는 설명이 필요 없다. 

선택도 고민도 필요 없다.


상호부터 솔직 담백 맛있는집

메뉴도 떡볶이와 계란뿐

우리의 선택지도 단순하다.

주문해서 먹고 

맛있어하면 된다.


행복 앞으로 외길 진행. 

실망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맛있는집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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