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년 차 키덜트다. 입사와 동시에 인형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형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침대 한편에 쌓아두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나둘 쌓여가는 인형 탓에 나의 싱글 침대에 내 한 몸 뉘일 공간이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의 영향으로 인형이 몇 마리 있던 남편을 설득해, 신혼집 방 3개 중 1개를 인형방으로 쓰게 되었다.
나의 첫 인형은 남편이 남자 친구였던 시절, 선물로 받았던 인형이다. 취업준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내게 위로 차원에서 안겨준 인형들이었다. 데이트할 때 한 마리, 해외 출장 다녀와서 한 마리, 기념일에 한 마리.
얼마 지나지 않아 취업에 성공하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인형 수집을 시작했다. 처음엔 기념품 개념이었지만 점차 '인형 쇼핑'이 여행의 주목적이 되었다. 주로 언니와 일본, 유럽 등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에서 태어난 캐릭터 인형들을 사모았다. 남들은 박물관이나 주요 관광지를 탐방할 때 나와 언니는 블로그에도 나오지 않는 인형가게를 찾아다녔다. 때로는 여행지에서 캐리어를 새로 구입해 인형들만 한가득 실어올 때도 있었다.
내가 인형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인형방을 보고 잔소리를 하던 엄마에게 '어릴 적에 엄마가 인형을 안 사줘서 지금 사는 거야'라고 말했다. 반은 맞고 반은 변명인 이야기다. 인형을 과도하게 모으는 나는 분명 어딘가 결핍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엄마는 인형이 아닌 책으로 선물을 대신했다. 친척이나 지인 집에 가면 그 집의 장난감만 정신없이 들여다보다 오곤 했다.
하지만 단지 결핍 때문에 인형을 모은 건 아니다.
나는 기록하고 싶었다. 여행지에서 초면의 캐릭터를 만나 빠져드는 순간이 좋았고, 그 감정을 여행의 기억으로 남기는 것이 좋았다. 사 오고 나면 어디서 뒹구는지 모를 의미 없는 기념품이 아니라, 항상 옆에 두고 볼 수 있는 인형이 나만의 여행 기록 방식이었다. 지금도 인형을 보면 어디서 어떤 감정으로 이 인형을 만났었는지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나는 눈으로 보고 싶었다. 회사에서 자존감을 깎여가며 일을 해낸 결과를. 회사에서 번 돈으로 가장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나의 노고를 인형으로 치환한 것이다. 나는 품 안에 쏙 안기는 사이즈의 인형을 좋아하는데, 안고 있노라면 인형이 나를 안아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폭신하고 따뜻한 인형을 사면 깎여진 자존감의 값보다 더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형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혼집에서 처음 만들게 된 나의 인형방. 삼면에 인형장을 설치하고 색깔 별, 캐릭터 별로 인형을 정리했다. 종류 별로 한가득 인형이 쌓여가면, 그만큼 나의 경험치가 쌓이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그 어떤 것보다 명쾌한 성취다. 방 한쪽에는 큰 쿠션을 두어, 앉아있으면 인형장에 있는 인형들과 아이컨택을 할 수 있다. 조그만 여러 개의 눈들을 바라보면서 행복의 기억들을 꺼내어 보는 것이다. 여기에, 블루투스 스피커도 한편에 두어 디즈니 OST를 틀어두면 금상첨화. 노래를 틀어 놓고 인형을 베고 독서를 하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휴식의 순간이 된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집으로 이사하면서 인형방은 더 큰 규모를 갖게 되었다. 그만큼 나의 수집 욕구도 커져서 인형방 밖, 거실과 부엌에도 장식장이 따로 나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토이스토리' 장식장은 부엌에 있어서, 밥을 먹으면서도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내가 가장 아끼는 '케어베어' 장식장은 거실 TV 옆에 두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했다.
아기가 태어난 지 반년이 되기 전, 나는 인형방을 아기방으로 내어주었다. 쌓인 짐과 먼지들을 치우고, 바닥에 매트를 깔아 아기를 재우기 시작했다. 아기에게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피규어는 위칸으로 옮기고, 대형 인형들을 울타리처럼 둘러주어 안전함을 더했다. 아기가 놀 때, 잠 잘 때, 울 때. 매 순간순간 수많은 인형들이 지켜주는 느낌이다.
인형방을 아기에게 내어주었다고 하나, 사실 나는 인형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도 아기와 함께 인형방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아기와 놀아줄 때도 인형방에 머문다. 아기가 자라날수록 아기를 위해 몇 번이고 인형 배치가 바뀌겠지만, 내 인형들을 팔거나 처분할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한다. 이 아이들은 엄마의 행복이고, 자존감을 지키려는 노력의 현신이자,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들이거든. 그리고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하고, 너의 성장을 함께 할 친구들이지. 엄마에겐 없었던, 항상 곁을 지켜 줄 친구들이 되어 줄 거야. 이 작은 인형방이 성장의 기록이자, 삶의 행복과 만족감을 눈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