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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꾼의 목장 Mar 10. 2021

이제서야 할머니를 알아본 할리웃

미나리는 윤여정이었다

이제는 양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주류 할리웃 영화들의 결말은 뻔하다. 주인공이 아무리 고생을 하고, 머리가 터지고 부러지고 피를 흘려도,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쩍쩍 갈라져도, 아무리 루카스의 사운드 effect로 관객들을 정신 못 차리게 조리돌림 해도, 의자의 푹신함을 느끼며 편안하게 기대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이 아무리 개고생을 해도 결국은 살아 남고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죽어 버린 영화치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드물다. 그래서 개운할지는 몰라도 이제는 지겹다. '정의는 승리한다'라는 할리웃식 선과 악의 구조에 관객들은 이제 식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최악의 '국뽕' 할리웃 영화 중 하나로 Indepence Day (20th Century Fox, 1996)을 꼽는다. 물론 괜찮은 흥행성적을 거뒀다. 압권은 외계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공군 파일럿 출신의 대통령(Bill Pullman)이 군중들을 향해 폭풍 연설을 한 후 스스로 전투기에 오르는 장면.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끝까지 국민들을 위해 자신을 보호해야 할 미국의 대통령이 외계인과 싸우기 위해 사선으로 돌진하는 것은 현실상황이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미친 짓이다. 그걸 또 제지하지 않는 각료들이라면 당장 해고 감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너무나 어이없어하던 나와는 정반대로 미국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고 기립박수를 쳤다. 단순히 정서의 차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할리웃식 patriotism에 길들여진 미국 관객들과 그것보다는 시니컬한 critic에 더 익숙한 내 차이랄까.


할리웃이 양식만 먹다가 이젠 질렸는지 몇 년 전부터 오스카에 외국 감독, 외국 배우, 외국 영화들의 모습이 자주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2020년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가져가는 이변이 일어났다. 거기에 봉준호 감독은 오스카를 'Local'이라고 격을 낮추었다. 'If you overcome the subtitle, just 2 inchs of language barrier, you'll be introduced to many great films'라는 그의 멘트는 철저히 미국(배우, 영화사, 투자사, 감독, 그리고 정서와 문화까지)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스카가 얼마나 편협한 영화제인지를 슬쩍 돌려서 까는 통쾌한 발언이었다. 그 말에 몇 명이나 뼈를 맞았는지 모르지만.


미국은 이민자들이 이 땅의 원래 주인인 인디언들을 토벌하고 세운 나라다. 그나마 영국에서부터 독립을 인정받은 것이 1783년의 일이다. 처음 독립선언을 한 것이 1733년이니 50년간 독립전쟁을 한 셈이다. 그로부터 불과 3백 년 남짓한 기간이 흘렀을 뿐인데 영국 이민자의 후예들은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고, 조금 더 늦게 이 땅에 도착한 민족들은 철저히 이방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더군다나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땅을 빼앗은 것이 고작 170년 전일뿐인데 멕시코인들은 이민자들 중에서도 가장 하급 대우를 받고 있으니 어쩌면 주객이 전도가 되어도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이민자일까. 런던에서 살다가 2021년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가족은 과연 이민자 가정일까. 그에 대한 답은 불확실하다. 결국, 언제 왔느냐와 무관하게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주인이고, 그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상자 안에 들어와 좀 더 나은 삶을 꾸리려는 사람들이 이민자인 것이다. 이민자는 자기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삶의 둥지를 튼 사람, 결국 소수이며 약자들이다. 그래서 미국 제작사가 투자하고, 한국인 2세이지만 미국에서 자라 미국에서 공부한 감독이 미국을 배경으로 찍은 이 영화를 '이민자들의 애환을 담은 영화'라고 짧은 끈으로 묶어 버리는 것은 어쩌면 코끼리를 새장 안에 가두려는 시도와 비슷하겠다.



영화 '미나리'를 연거푸 두 번 봤다. 이 영화에 대한 평들을 보면 영화가 던져 놓은 물음표만큼이나 다양하다.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라는 사람부터, 이민가족의 삶을 그려낸 한국 영화,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의 특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영화, 모두가 잊고 있던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해 풀어낸 영화 등등, 관객들의 수준만큼이나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외국에 사는 이민자들이 보는 시각과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보는 시각 또한 매우 다르다. 흥미 있는 사실 하나는 미국에 와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사람들과, 아직도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분전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 영화에 대한 시각들조차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미나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략 네다섯 가지로 나뉠 수 있겠다. 한국인, 미국인, 이민자,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외국인. 거기에 나와 같은 미국 이민 1세대로서의 한국인이면서 앞서 열거한 네 부류에 모두 조금씩 포함되는 부류이겠다 (반대로 얘기하면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이삭 감독의 identity는 나나 미국에서 태어난 내 아이들이 피부로 느끼는 그것과 비슷하다. 어쩌면 더 바나나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정이삭 감독은 명료하게 이 영화의 주제는 '가족'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민자들의 고뇌, 이민자들의 애환'으로 풀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어차피 할리웃식 결말이 아닌 영화에 어떤 해석을 달 지는 각자의 몫이다. 이 영화를 본 미국의 한 평론가는 '미국 시골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표현한 영화'라는 엉뚱한 평을 남겼다.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도 각자의 해석이니까. 영화에서 비춰지는 가족의 사랑에 눈물이 났다는 어떤 백인관객의 감동과, 순자가 가져온 고춧가루 때문에 눈물이 났다는 샌드라 오의 감동은 분명히 조금 다른 종류이다. 미나리의 강한 냄새가 한국의 냄새인지, 가족의 냄새인지, 아니면 할머니의 냄새인지로 받아들이느냐는 정말 미나리의 냄새를 아는 사람들과 미나리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실 영화 곳곳에서 진하게 배어 나오는 한국적인 감성들은 한국인이 아니면 공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벽이 무너지고 있다. 기생충에서 오직 자막으로 영화를 이해한 외국인들이 배우들의 찰진 욕을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본 우리들보다 더 감명 깊게 영화를 보았다니까. 영화라는 매개체가 언어 이상의 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지루했다는 평이 자연스럽게 들릴만큼 영화에서는 익숙한 선악 대립구조도, 눈물을 짜내는 코드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이민 1세대의 피눈물 나는 고뇌도, 2세들이 흔히 겪는 identity crisis도 없다. 그러나 영화의 몰입도는 놀랄 만큼 깊다. 미국의 시골, 농장, 트레일러, 한국인, 병아리, 교회 등 자극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린다. 연출, 앵글, 촬영기법 등은 지극히 미국적이다. 어느 한 사람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스토리를 풀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담백하고 덤덤하다. 마치 내가 30여 년 전 비행기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올 때, 따가운 햇살을 받아내고 있던 야트막하고 납작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몽롱하고, 나른한 기운을 기억나게 했다. 굳이 관객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고, 배우들의 내면을 끌어내어 차분히 메시지를 전하는 감독의 성품이 가슴속으로 잔잔히 스며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감독의 독특한 앵글과 진중한 롱테이크는 마치 '서편제(임권택, 1993)'에서 주인공 셋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휘적거리며 밭고랑을 내려오는 그 장면을 닮았다.



미나리에서 윤여정의 연기는 그가 예전 다른 영화들에서 보여준 그것에 비해 더 특별하지 않다. 나는 오히려 '박카스 할머니'로 열연한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감독, 2016년)'에서 보여 주었던 그녀의 연기가 그녀의 필모 중에서 가장 정점인 영화라고 본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윤여정이 보여준 할머니의 모습은 지극히 인상적이다. 여느 미국 할머니들처럼 두툼한 허리를 가지지도 않았고, 손자들에게 "my lovely deers"같은 감탄사를 남발하지도 않으며 오븐에 맛있는 쿠키를 구울 줄도 모르는 할머니의 모습에 왜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교회에서 헌금을 슬쩍하지 않나, 손주들에게 고스톱을 가르치질 않나, 우리 고정적인 관념 속의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과는 딴판인 순자의 모습에 왜 미국 관객들은 거리낌 없이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는 것일까.


미나리에서 관객들에게 스토리를 연결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배역은 윤여정이 연기한 할머니 순자이다(사실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는데 순자라는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순자는 엄밀히 말해 이민자가 아니다. 딸의 가족을 돕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한국에서 날아온 친정엄마다. 미나리 씨도 들고 왔지만 가족들에게 미나리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저 심어서 나박김치라도 담아 먹으려고 했을 것이다. 미나리를 상징하는 순자는 스토리의 중심을 잡아 주는 중요한 캐릭터이다. 순자로 인해 손주 앤과 데이빗이 가족의 사랑을 깨닫고, 순자로 인해 제이콥과 모니카 사이의 갈등이 풀린다. 할머니에게 냄새가 난다며 싫어하던 데이빗은 순자가 창고에 불을 내고 망연자실 걸어갈 때, 심장병도 잊고 포레스트 검프처럼 전속력으로 할머니에게 달려간다. 영화는 자칫 불행하게 끝날 수도 있었던 가족관계가 순자(미나리)라는 매개체로 인해 다시 화합하고 상처가 봉합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윤여정이 아니었다면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내었던 것이다. 그녀의 검증된 연기력은 할머니 순자를 통해, 그리고 정 감독의 섬세한 연출을 통해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드러났고, 미국 관객들의 마음에 그것이 전달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윤여정이 조연상이 아니라 주연상 후보에 올라도 부족함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윤여정은 미나리이다. 줄기를 잡아당기면 뿌리가 뽑힐 정도로 질긴 그 미나리. 냄새나는 시궁창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는 미나리. 잘 데치지 않으면 그 비린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든 미나리. 어렸을 적 할머니께서 돼지수육에 물에 살짝 데친 미나리를 둘둘 감아서 입에 넣어 주시던 것처럼, 중풍으로 몸이 불편해도 그 몸짓만으로 가족을 단단히 붙들어 매 주던 윤여정은 극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연기해 주었다. 그런 그녀가 스팟라이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나와 다수의 미국인 관객들이 비슷한 감동의 포인트를 찾았다는 것이 기쁘다. 그녀의 보석 같은 연기를 볼 줄 아는 미국인이라면 '죽여주는 여자'를 본 후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제 그들도 뻔한 권선징악류 할리웃 영화의 틀에서 벗어나 봉준호의 말처럼 so many great film 들을 찾아낼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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