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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엘 Feb 17. 2024

하나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버틸 수 있어

강력하고 좋은 한 가지!

뭐라도 하나 좋은 게 있으면 인연이 가능한 거야


서른을 앞두고 분주하게 선을 보고 다니던 내게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일찍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길 바라셨다. 늦은 나이에 나를 출산하셨던 아버지를 핑개삼아 세뇌시켜 오신 것. 덕분에 나는 대학시절부터 편히 만나도 좋을 법한 모든 여자 친구들을 결혼상대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고민하곤 했다.

불필요한 진지함이었다 말하고 싶다.


직장을 잡고 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불안하셨는지 어머니는 내게 다시 결혼을 언급하기 시작하셨는데,

생각해 보면 나도 결혼을 염두하는 일이 싫지만은 않았나 보다. 서른도 되기 전에 선을 보러 다녔으니.


어머니가 주선하신 자리. 편했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빼지 않고 선자리에 나가곤 했다. 약간 도장 깨기(?) 마음도 있었던 듯하다.

그냥 많이 만나고 경험 쌓고 그럼 좋지 않나.

어머니들 건너 건너 아는 분들의 소개로 나온 거니 무게감 있는 만남이다.

중요한 인연을 만나는건데 그정도는 감수하겠다 마음먹었다. 상대도 다르지 않았을거다


그런데 선으로 만난 여자분들과는 번번이 에프터가 이루어지지 않는 거다. 이유는 거의 나 때문!

한번 만나고 다음에 만날 이유를 찾지 못하겠는 거다.

무엇보다 이성적 끌림이 있어야 또 만나고 싶을 거 아닌가. 내가 크게 잘 난 것은 아니지만  상대에 대해 그냥 끌림이 없어서 애프터 만남을 이어가기가 어려운데..


어머니는 한번 더 만나보라 얘기하시곤 했다. 아니 이게 무슨 비즈니스 미팅도 아니고, 결혼을 염두하고 만나는 건데, 자꾸 가능성을 열어보라니.. 될 말인가.


하루는 그중 가장 괜찮은 조건의 여자분을 또 어머니들 건너 건너 소개로 만났다.

좋은 분인데 아.. 또 이성적 끌림이 없는 거다. 감사하게도 상대는 나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나 보다. 묘하다. 여자분이 먼저 다음 만남에 대해 언급을 하시는 거다. 엉겁결에 에프터가 잡혔다.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그래 그렇게 자꾸 만나다 보면 좋은 면이 보이는 거라고..

아요..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뭘 맞춰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만나도 아무런 끌림이 없다. 그냥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막 마음이 가거나 또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 만나는 중에도 이런 생각을 했고, 귀가하면서는 이미 정리가 끝났다. 하지만 부모님은 기대가 있으셨던 모양이다.

유례없이 내가 두 번째 만남에 나가게 되니 미리 풍악을 올리신 듯하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자식에 대한 기대는 반드시 실망을 부른다. 내가 자식 키우는 입장이라 안다. 이런 기대는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내 부모님은 아들 하나에 이런 경험이 전무하신 아들 선보내기 생초짜. 내가 대충 좋은 눈치를 보이기만 한다면 바로 예식장까지 예약할 태세.


"아닌 거 같아요. 다음에는 안 만나려고요. 좋게 좋게 마무리할게요."


부모님의 표정이 흙빛으로 변하는걸. 나는 태어나 처음 봤다. 내가 수능 망쳐서 죽고 싶다 했을 때도 날 보던 얼굴이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너무나 실망하셔서 말을 잇지 못하시는걸 내 눈앞에서 보고 있노라니 거대한 불효를 저질렀다는.... 아이고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한 듯 한 느낌이 든다.


씻고 방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내 책상에 앉아 스탠드만 켜놓으시고 (방 형광등은 꺼져있고) 날 기다리고 계시는 거다. 직감한다. 아버지는 평소에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스타일이 아니신데.. 뭔가 큰 게 한방 올 것이다.


"정말 그리 별로야?"


"아뇨. 그 여자분 좋죠. 배경도 좋고, 성격도 좋아 보이고, 근데 마음이 안 가요"


"그래... 그렇지만 어떻게 두 번 만나고 마음이 가고 안 가고를 알아?"


"...... 음.. 좋아하지 않는 건 대번(사투리) 아는 거 아니에요? 좋아하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아들, 네가 아직 세상을 오래 안 살아봐서 그럴 건데 뭐 하나라도 좋은 게 있으면 인연은 가능한 거야"


"......"


"단 하나라도 좋은 것을 붙잡아서 나머지 보통스럽거나 부정적인 것들을 다 덮어버릴 수 있어. 한 가지 좋은 면으로 인해 힘든 것들 모두를 감내할 수도 있어. 물론 지금 선보러 다니는 너한테는 걸맞지 않은 이야기 일거야. 하지만 앞으로 네가 결혼을 하고 이후 결혼생활을 할 때 지금 아빠가 한 말 생각이 날 거다."


 



아버지의 그 이야기가 내 삶을 바꿨다.

사람을 대하는 관점도 바뀌었고,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역시..


선보았던 그 상대 여성분을 그 후로 한번 더 만났다.

아버지의 얘기가 크게 작용했던 거다. 결과적으로 그 분과 인연이 되진 않았지만-

나는 단순히 끌림이라는 관점을 거둬내고 세 번째 만났을 때에는 더욱 진지하게 상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 기준을 덜어내고 상대를 온전히 바라보았던 첫 경험이었다.






'하나라도 좋은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말씀은 참으로 굵고 무게감 있게 내 인생에 자리했다.

내가 인내심을 발휘했던 삶의 모든 순간 속, 그 속에는 항상 그 말이 중심이 되어있다.


'하나라도 좋은 것이 있다면.. 만남도 가능하고 인연도 가능하며,, 버틸 수 있다'


내가 버텼던..


사람들, 일들,


어느 하나 어긋남 없이 10가지 중 한 가지 이상은 좋은 것이 있었다.

나머지 9가지 정도는 힘들고 어렵고 지치는 요소들..

그런데 강력한 한 가지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경험들



한 가지 좋은 것!

강력한  한 가지!

 


 



사는 게 얼마나 힘든가. 어렵고, 고되다.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 반대의 경우가 많다.


마흔 중후반, 오십으로 향하는 지금,

내 나이가 참 애매하다. 아버지 소천하시고 어머니 계속 늙어가신다.

자녀들은 성장하고 있고 뒷받침이 되어주어야 한다. 미숙하게 성숙해 가는 아내와 나는 굳어져 버린 여러 형태들이 삶에 즐비하게 깔리고 있고...

나는 나대로 길을 다시 정립해야 하며, 돌아보면 뭐 하나 이뤄낸 게 있나 허망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열심히 살았지만 누구보다 치열했다 여기지만... 그만큼 무엇이 쌓였는가.

세상은 거래가 아니다. 인과응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서른을 마주하기 전,

선자리가 끊임없이 제공될 거라 믿었던 그때의 나는

그래도 좋은 게 여덟아홉 가지는 되어야 인연을 맺겠다는 배포가 있었다.


그 좋은 대부분이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의 아버지 말을 지금은 곱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간다.


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을 거다.

우리 삶에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걸.. 모두 다 가질 수 없다는 걸..

내게 알려주고 싶으셨겠지.

하지만 살아봐야만 알게 되는 영역!

그냥 네가 살아보렴.. 하신 거다.


좋은 한 가지를 붙잡아라.

나머지 아홉은 버티는 거야. 인내하는 거야.

그럴만할 거야!


가족도, 일도..

인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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