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에 관한 기록> - 베오울프처럼 살고 싶어라
어떻게 살아야할까?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계속 넘어진다.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 속에서. 나는 그래서 베오울프처럼 살기를 원했다. 그렌델을 처치하고 이제 그렌델의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살인 대신에 명예를 선택한다. 파우스트적인 삶이란...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다. 그 대가로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얻게 된다. 그는 결국 혼령이 된 헬레나의 아름다움에 감격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 내버린다.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인가 보다. 얼굴이 못 생겨도, 여자는 결국 ‘아름답다!’ 라는 형용사로 인생이 귀결된다.
삼국지의 영웅인 동탁과 여포는 초선을 두고 원수가 된다. 결국 여포는 자신의 양아버지 동탁을 죽이고 초선을 데려간다.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됐던 헬레나는 그 당시 소문난 절세 미인이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이었던 헬레나에 반해 그녀와 함께 트로이로 도망친다. 이 불륜으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와 트로이 병사들이 전사한다. 도대체 아름다움이 무엇이기에... 로마 제국은 여인을 좋아했던 칼리쿨라 황제의 시대 때부터 이미 그 종말을 점치고 있었다. 칼리쿨라는 미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세 여동생과 함께 관계를 갖는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운 미모를 이용하여 로마의 카이사르를 휘어잡는다. 그것도 모자라서 카이라스 사후엔 후계자 안토니우스와 연을 맺는다.
결국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으로 남으면 되었을 일이다. 그런데 아름다움 주변에는 중상모략이 꿈틀대고 있다. 인간의 계략과 모략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깨트리고 파괴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더 이상 아름다움으로 남아있지 않도록 조종한다. 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중세의 미학』에서 시대에 따라 ‘미’의 정의가 조금씩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중세가 암흑의 시대였다는 것에 반론을 펼친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절제와 균형의 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다. 중세 사람들은 아름다움은 선하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는 신성함과 경건함을 누릴 수 있으며, 절대적인 선을 인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내가 베오울프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 건 아마 위와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떤 형용할 수 없는 선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름다운 존재를 보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고 조금이나마 착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은 그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아주 막아선다는 점이다. 아름다움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악덕은 결국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아름다움도 파괴한다. 우리에게 만약 종말의 순간이 있다면 아마 그 순간에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종말은 아름다운 소멸이다. 더 이상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종말의 때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포르노 소설들을 읽게 될 것이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퇴폐적인 소설들이 주구장창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 현실에서 그 이야기들을 모방하려 들 것이다. 집단 성교가 일어나고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종국엔 이 모든 소설들이 소각장에서 폐기될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종말의 때를 알 수 없으나 거기엔 어떤 아름다움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물질과 파편들로만 가득 찬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올더리 헉슬리의 『신세계』는 아름다움이 전혀 없는 세상을 보여준다. 여자와 남자가 관계를 갖는 이유는 단지 종족을 유지하기 위할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마’를 삼킨다. 뇌의 중추 신경계 자극을 가해 인위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진실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이 인간됨을 포기한 채 그렇게 살아간다. 아름다움이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아름다움이라는 형용사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무엇을 인위적으로 더한다고 해서 더 아름다워지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아름다움 위에 또 다른 것들을 더하려 한다. 결과는 종말이다.
요즘 또래 여자 친구들이 그렇게 성형수술에 매달리는 이유...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 아름다움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지 않을까. 마이클 잭슨의 말년 얼굴을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렇게 모두 망가지는 것이다. 히틀러에겐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없었다. 그는 전쟁에서 사타구니에 총을 맞아 고환이 하나 밖에 없다. 물론 이건 루머이다. 이 불구는 그에게 엄청난 히스테리를 가져다주었고 역사의 흉악범이 되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 나는 히틀러를 싫어하는 것이지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비난하는 게 절대 아니다 – 영화 『블루벨벳』에서 남자 주인공 제프리(카일 맥라클란)는 어느 날 푸른 정원에서 나가떨어진 ‘귀’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미궁의 꿈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나는 처음에 이 영화를 보고나서 충격을 먹었다. 그렇게 퍼렇게 곰팡이가 낀 ‘귀’. 그 ‘귀’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어쨌든 그 ‘귀’는 절대 아름답지 않았다. 그런데 그 ‘귀’ 장면이 나에겐 악한 상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약간 어긋난 아름다움과 같았다. ‘어긋난’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왜곡’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조금 어긋나도 역시 아름다운 것인 걸까? 아니, 내가 블루벨벳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일탈의 즐거움이었다. 광기를 느끼는 데서 오는 쾌락이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광인이 되었을 때에 느낄 수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자면 한 마디로 예술이었다. 아름다움이 예술로 변신한 게 틀림없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아름다움 대신 예술적이라고 느꼈던 것처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읽고 눈물을 머금었던 것처럼. - 소설 『연인』에서 서양 여자 아이는 중국인 부자에게 몸을 판다. 그리고 철저히 파괴되기 시작한다. - 아름다움이라는 단어 옆에는 예술이 존재하는가 보다. 이건 굉장히 무섭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생활을 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낄 순 없지만 예술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예술이 아름다움의 일부로 종속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완전 개별적인 것일까? 어쨌든 관객들은 영화의 섹스 씬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표현하진 않으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아주 미학적으로 보실 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섹스가 또 예술은 아니지 않은가. - 물론 섹스를 예술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 그러니까 아마 아름다움이란 항상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본 소감문 같은 것이지 않을까? 우리가 아름다움에 묻혀 있을 때에는 정작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름다움 밖에서 그 존재를 쳐다보면 우리는 금세 깨닫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아름다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의문의 소설을 읽을 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덮었을 때 비로소 그 이야기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 이야기에 비춰진 감격과 비밀을 가슴에 품게 된다. 난 마지막 그 느낌을 사랑하며 그리고 또 다시 그 책을 펴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왜냐고? 첫사랑의 감격을 느끼고 싶어서. 읽었던 책은 다시 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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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종말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이다. 종말의 때엔 시간이 없다. 내가 읽은 소설과 그리고 섭렵한 모든 영화들을 머릿속에서 회상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 그래서 감동의 여운은 사라지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문화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책과 영화는 기록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리고 기록하는 행위는 시간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아름다움이 탄생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나의 서재에 수천 년 전 『일리아드』가 아직도 꽂혀있는 것처럼. 나는 매우 불친절한 사람이다. 독자에게 왜 종말엔 아름다움이 없냐고 자세히 근거를 대지 않으니까. 그런데 나도 솔직히 모르겠다. 그냥 그럴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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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엔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는 건 어떤 위대한 작가의 책 때문이리라. C.S. 루이스의 『인간폐지』가 지금 생각났다! 내가 종말의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마 이 사람 탓이리라! 이 책은 종말의 인간이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때의 인간은 더 이상 인간임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종말엔 세계정부가 존재할 것이고 정부는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모두 정부에 이양하기로 선택한다. 그들은 단지 정부가 쾌락을 보장해줄 수 있다면 시민들이 어떤 자유도 포기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계정부는 전지전능한 권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세계정부 또한 완벽한 신이 아니기에 시민들의 유익을 위해 통치하지 않는다. 정부 편에서는 시민들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사람들은 결국 죽은 물질이 되었다. 숨이 끊긴 무생물이 되었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세상. 그 속에서 사람들은 맞춰진 계획과 시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여러분들은 기계가 아름답게 보인 적이 있었는가? 저 높은 롯데타워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페라리가? 그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경이일 뿐이다. 위계를 향한 동경일 뿐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흔적도 없이. 인간이지만 사실 기계인 존재.
우리가 아름다워지기를 포기한다면
곧 세상은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이 사리지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역사와 간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