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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훈 Aug 04. 2021

아침이 밝아올 즈음에

 아주 늦은 밤이었다. 예배당엔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기념 예배가 끝나고 세상은 다시 하얗게 고요했다. 산골 깊은 수도원은 찬양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아주 독실한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 먼 곳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 모여든다. 소녀는 자신이 왜 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화이트 크리스마스답게 눈발은 수도원을 떠나는 신도들의 이마에 아름답게 떨어졌다. 하지만 소녀에겐 이 눈발이 그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사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죽음의 문은 한 보 앞에 있어서 소녀를 향해 열려 있었다. 솔직히 소녀는 이제 그 문을 통과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내침을 당하고 세상 어느 누구도 소녀를 공감해주지 않았다. 부모가 원하는 귀족 살이는 소녀의 숨통을 조여 왔고 그 맑은 영혼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것밖에 못하니?” 수도 없이 들었던 부모의 호통이 소녀의 가슴에 깊이 각인돼 영원히 떠나지 않을 참이었다. 어느 순간서부터 소녀는 집이 감옥처럼 느껴졌다. 조그만 자극에도 예민해지고 성을 내었다. 자해 욕구가 심해질 정도로 우울해졌고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는 증상이 찾아왔다. 집에서는 귀족 자재로써 지켜야할 원칙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엄청난 체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을 맞을 때에 입어야하는 코르셋과 드레스, 그리고 깨끗한 구두가 필요했다. “야, 이게 뭐냐. 이 년아” 실수로 구두가 닦여져 있지 않으면 아빠는 딸에게 하지 말아야할 욕설들을 아주 쉽게 내뱉었다. 엄마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공부를 매일 강요했다. 그리고 수사학 공부를 미루면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렸을 적부터 견뎌야만 했던 억압과 강요는 이제 소녀의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시킬 터였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이런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까지는 터놓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녀는 정처 없이 떠돌다가 이 수도원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소녀에게 크리스마스는 행복한 날로 기억되지 않았다. 휴일만 되면 이상하게 아빠는 괴물이 되었고 엄마를 괴롭혔다. 아빠는 밖에서 느낀 모욕감을 가족들에게 퍼부었고 이 모든 게 엄마와 소녀 탓이라고 몰아갔다. 

 예배당 강단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채 서있었다. “도대체 뭐 때문일까요? 당신은 구세주인가요?” 안에서 응어리 맺힌 것들이 소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소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하고 싶었다. 만약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단정하고 명료한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소녀가 있는 세계는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세계였다. 소름끼칠 정도로 칼칼한 늑대 울음이 서리가 낀 창에 부딪쳤다. 이에 뒤질라 고라니가 사람 같이 울기 시작했다. 이젠 아무데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소녀는 두 다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옮긴 채 무릎을 꿇었다. 소녀는 누군가에게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그 기도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도 상관없었다. 누가 됐든지 자신의 이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을 들어줬으면 했다. 소녀는 문득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 어둠을 조금 밝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세상에 혼자만 놓인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거기엔 외로움뿐만 아니라 사무치는 고통도 있었으며 공허와 허무함, 해결되지 않은 번민도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부모의 손을 잡고 자신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드는 아이가 허상에 실루엣처럼 나타났다. 소녀는 그것이 환각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때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게 그 아이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소녀에게만은 예외였다. 칠흙같은 어둠은 이곳에 숨 막히는 적막을 한 층 더 심화시켰다. 소녀는 이제 이 세상에 어떤 미련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을 공감해주지 않고 누구도 소녀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겐 속마음이라는 게 있다. 소녀의 내적 세계는 이미 황폐했다. 소녀는 자신에게서 사람다움이 소멸됐다고 생각했다. 증오와 동물적인 본능이 소녀 마음 한쪽에서부터 솟구쳤다. 소녀는 바른 것에서 일탈하고 마구마구 타락하고 싶었다. 강단 옆쪽 샛문 사이로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졸음이 몰려왔다. 소녀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숨을 만한 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쉽게 볼 수 없었다. 마침 집을 나올 때 챙겨왔던 성냥들이 떠올랐다. 소녀는 가방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힘겹게 불을 붙였다. 이토록 작은 불빛이 이 거대한 얼음세계에 맞서 싸워 홀로 살아남고 있었다. 소녀는 그 불빛이 꼭 자신처럼 느껴졌다. 예배당을 나서니 다행히 몸을 뉠 수 있는 작은 창고가 있었다. 아마 마구간일지도 몰랐다. 소나 말을 먹이기 위한 풀 더미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소녀는 주변을 짚으면서 혹시나 위험한 게 없는지 체크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말은 없는 것 같았다. 소녀는 풀 더미에 머리를 뉘었다. 첫 번째 성냥은 이미 꺼져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여서 다른 성냥을 꺼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여기는 다는 아니지만 하늘이 보였고 거기에 떠 있는 별들도 볼 수 있었다. 별똥별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혜성 같은 존재가 동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동양에서는 그것이 어떤 위대한 영웅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소녀는 뜬금없이 그 존재가 오늘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냥불은 별들의 작은 광휘에 힘입어 더 힘차게 타올랐다. 세상의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를 지금이 조금은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홀로 남겨진 창고 속에 소녀는 동물적인 감각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성적 욕구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서서히 올라왔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매만졌다. 야릇한 기분이 소녀의 안쪽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빨간 치마를 들쳐 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판타지가 머릿속을 채웠다. 아래 속옷을 살짝 벗긴 채 손가락으로 수풀처럼 뒤엉켜버린 음모를 천천히 매만졌다. 아드레날린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로 샘솟는 기분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이 어둠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고 믿었다. 오른쪽 검지를 살짝 밀어 넣었다. 남자에 대해선 아직 잘 몰랐지만 대충 그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던 남자의 그 크고 딱딱한 것이 자신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무서웠다. 하아 …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성기 안으로 더 집어넣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 고통 뒤엔 이상한 카타르시스가 있어서 소녀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어른들이 서로 몰래 얘기하던 오르가즘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녀는 한동안 그런 찝찝한 마스터베이션을 계속 했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건조하고 쌀쌀한 창고 속에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건 오직 소녀 자신의 아랫도리 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녀는 이 신비로운 경험이 오늘 자신을 살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별을 향해 눈을 들었다. 깊은 잠이 쏟아졌다. 

 오르간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주변은 어스름하게 밝았다. 찬양소리가 쳇바퀴처럼 반복되었다. 신도들의 박수소리가 일정한 박자를 울려 퍼졌다.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창고 속에 소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진홍 색깔의 새벽 불빛이 저편에서 자기보다 거대한 산맥을 움켜 싸고 있었다. 빛은 딱딱한 고체가 아니라 흘러 다니는 유체와 같았다. 힘은 없지만 가벼워서 자신이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족족 삼키며 다녔다. 소녀는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창고 천장은 소녀 키보다 훨씬 높았다. 아침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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