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위한 여정.
에디터 홍자
그 두 번째. 정의正義1)의 이름2)으로 그 죄를 묻고
그렇게 내 성급한 판단으론 그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도, 면책권을 부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판단할 자격이 더는 내게 있지 않다고 느꼈다. 내가 한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해도 그건 곧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난 스스로에 대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와 다르게 영화 속 인물들은 독재자에게 죄를 물을 자격에 대해 따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다. 그들은,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토록 자연스럽게 타인의 죄를 물을 생각을 했던 것일까. 우린 어떻게 타인에게 죄를 물을 자격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 시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고대 왕들이었다. 그 옛날의 왕들은 신과도 같았고, 그래서 그들의 말 한마디 혹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신성했다. 그랬기에 황제는 본인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신과 왕이 다름을 깨달았다. 그렇게 왕들은 신의 대리인이자 신의 말씀 아래 복속된 존재가 되었다. 이제 왕들은 신의 이름을 빌려 사람들에게 죄를 묻게 되었다. 또다시 긴 시간이 흘러 오늘이 되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신의 이름이 사람에 의해 쉽게 휘둘린다는 것을 배웠고, 그렇게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판결권은 일정한 자격을 갖춘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본인의 이름이나 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정의의 이름을 빌릴 뿐이다. 심지어 만화 속 인물들조차도 이렇게 말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개인의 이름으로 타인의 죄를 물을 수 없다. 개인은 자격이 없고, 그 자격을 앗아간 것 또한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세계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 알 수 없다. 인생 어느 곳에든 운이 깊게 개입되어 있고 그 모든 변칙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사람은 결국 감정이 있기 마련이라 타인의 죄가 자신과 관련이 있을수록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즉, 필연적으로 상대적이다. 그래서 개인이 개인의 이름으로 내리는 심판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고 신의 이름으로 타인에 죄를 물을 수 없다. 신의 이름은 그동안 많은 사람에 의해 남용되었고 오용되었던 역사가 쌓였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측정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죄를 묻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게 하려면 적합한 명분과 적절한 과정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이 정의와 사법제도이다. 모든 판결이 항상 모든이들의 만족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 정의와 사법제도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의 보호막이 되어준다. 그러나 어느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독재자는.
1)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2)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
그 세 번째. 그 죄를 올바르게 심판3)하여
그가 내린 판결의 영향은 다시 돌고 돌아 본인에게 돌아가고야 말았다. 정의의 이름을 빌리지 않은 독재자는 결국 본인의 이름으로 그 판결이 가져온 화살들을 맞이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순간 독재자는 더는 악인 혹은 악마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에게 면책권을 주지 않겠다 다짐한 사람들마저도 이 최후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마 그 죽음이 합당하다 여기더라도 그 방식이 그들이 생각한 정의와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사람들은 독재자를 심판하는 방식을 가지고, 각자의 방식이 옳은 것이라 믿으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 오래전 기요틴이 기요틴에 당한 것처럼.
“총 쏘지 마. 저놈이 내 눈앞에서 외아들을 목매달았어. 손자를 목매달아야 해”
“다 때려치워. 저놈이 우리 형을 산채로 불태웠어. 태워죽이자. 괴물을 태워죽입시다.”
“불태우긴 왜 불태워. 이놈 목에 걸린 게 1백만 달런데. 놈을 백 등분하면 한 사람당 1만은 돌아가겠네”
이 외침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이 가장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배를 굶고 일을 하는 어린아이에게 정의란 빵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반란군에게 정의란 독재자를 처단하고 새로운 정부를 꾸리는 것이다. 또한, 아들을 잃은 어미에게 정의란 독재자의 눈앞에서 손자를 죽이는 것이었지만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에겐 독재자를 판결에 맡기는 것이 정의였다. 형이 불타 죽은 사람에겐 독재자가 불타 죽는 것이 정의고, 당장 살길이 없는 사람에겐 현상금을 받는 게 정의였다. 사람들의 방관 속 강간당한 신부에겐 그 군인을 누군가 말려주는 게 정의였겠지만, 방관한 사람들에겐 그 상황 속에서 살아남는 게 정의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정의를 외치고 있는 그 순간, 그 풍경을 본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속에 정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여러 생각과 외침과 믿음들은 ‘정의’라는 하나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이 영화에서 춤이 나오는 방식과 같다. 러닝 타임 동안 춤이 나오는 장면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독재자 집권 당시 손자가 약혼자와 함께 격식을 갖춰 추는 춤이고 두 번째는 국내에서 도망 다니며 위장을 위해 추는 춤이며 세 번째는 독재자의 처형식을 등으로 지고 바다에서 추는 춤이다. 이 세 가지의 춤은 ‘장단에 맞추거나 흥에 겨워 팔다리와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여 뛰노는 동작’이라는 정의에 의해 ‘춤’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춤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이름에 다양한 정의가 공존하듯이 하나의 정의에는 또다시 여러 의미가 포함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단어와 하나의 정의로 말하면서 동시에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그렇게 정의를 말하면서도 정의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3) 어떤 문제와 관련된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잘잘못을 가려 결정을 내리는 일
그 마지막. 정의를 찾겠노라.
그렇게 무수히 많은 정의 속에서 감독과 나는 각자의 정의를 찾았다. 감독은 감독의 정의定義를, 나는 나의 정의定義를. 그렇게 서로의 정의를 찾았다.
“ 아직도 모르겠소?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이런 망할 체제가 계속될 거요. 먼저 독재자 죽이고 다음엔 서로 싸우고 그러면 끝이 없잖소. 그럼 어쩌라고 놈을 보내주라고? 춤을 추게 합시다. 춤을 추게 해요. 민주주의를 위한 춤을!”
정의正義에는 여러 가지 정의定義가 있을 수 있다. 국가마다, 사회마다, 개인마다 정의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이 찾아낸 정의는 하나다. 혁명과 감정이 불타고 남은 재들은 바다에 맡기고, 모든 것이 끝나는 이곳에서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하는 춤을 추는 것, 민주주의를 위한 춤을 추는 것. 기요틴은 기요틴에 당했듯 복수는 복수를 가져온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위한 이 춤은 용서나 참회의 춤이 아니라 그 돌고 도는 고리를 끊어낼 용기, 시작을 위해 개인의 감정이나 파괴적 욕망을 희생할 용기를 가진 자의 춤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화하고 또 모든 것을 품어주며 또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교차하는 바다에서 손자는 춤을 춘다. 이 모든 죄와 먼지, 속박을 털어내듯 춤을 추는 그 모습을 수용소에서 나온 한 남자가 바라본다. 돌고 도는 악행과 이어지는 감정의 보복들은 바로 그 바다에서 사라지고 춤만이 남게 된다.
나는 독재자의 최후에서 그 모든 걸 단념한 듯한 눈빛과 마주했을 때 그동안 내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나의 정의를 찾게 되었다. 다시, 처음의 정의로 돌아가 보자. 나는 계속 하나의 이름에 대한 두 가지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나는 바른 의의라는 뜻의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는 정의이다. 결국, 여러 정의는 하나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그 모든 상반된 정의, 내가 나에게 내린 이질적 정의들은 모두 내 이름을 공유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사람을 하나의 고정적인 값으로 정의하려는 습관 때문에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평면적이지 않다. 입체적이다. 아니,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에게 형태란 게 있다면 그것은 분명 프리즘과 비슷한 모양일 것이다. 그래서 아주 약간의 각도 차이가, 관계 차이가, 상황의 차이가, 장소의 차이가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는 상반된 정의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질적 변화들은 모두 내 이름을 공유했다. 마치 정의라는 이름이 감독에겐 정의正義로, 나에겐 정의定義로 읽혔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부인할 수도 있겠지만 또 모든 것을 긍정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고,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 나이기로 했다.
다시, 여기 어느 독재자가 있다. 손자의 눈으로 볼 때 그는 다정한 할아버지다. 그러나 그를 처형하기 위해 온 어느 여인의 눈에 그는, 그녀의 자식을 죽인 악마다. 영화 초반 빈민들의 물건을 훔치던 그도, 영화 후반에 다친 사람을 위해 등을 내어준 그도 결국 한 사람이다. 어느 사람 눈에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을 받을 사람으로 보이겠지마는 어느 사람의 눈에는 산 채로 화형을 당해도 쌀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그렇게 그 모든 사람은 이질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다. 그 한 사람의 이름이 판단에서 비롯된 모든 정의를 품고 있다. 모든 것은 나였듯 모든 것은 그였다.
#영화리뷰 #영화어느독재자 #어느독재자 #어느독재자후기 #영화후기 #영화비평 #조지아영화 #영화비평잡지 #영화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