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초록 Apr 29. 2023

명명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일을 향해 발을 내딛어야 하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감정은 단연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과거에 나를 붙잡아두고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살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지극히 아름다운 순간에 나의 모든 감정을 쏟는 것을 경계한다. 한때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나의 마음을 쏟아붓고는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내 손에 쥐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여러 번 아파했던 것 같다. 모든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 과거에 예속되기 때문에, 적은 마음만 쏟아야 뒤따르는 고통이 견딜만 하게 된다. 나의 모든 것을 쏟는 순간 과거를 절실하게 그리워하며 살 수밖엔 없게 된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아직 사랑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엔 사랑의 경험이 얕다. 예술 작품이나 노래 가사에서 사랑을 표면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니다. 그저 제3자 간의 감정일 뿐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사랑이다.


나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남녀간의 이성적 사랑은 인간의 다양한 감정 중 하나일 뿐이다. 슬픔, 질투, 후회나 두려움 같은,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부정적 감정들 또한 실은 사랑과 어느 정도 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무언가를 사랑하고 원할 때만 느낄 수 있는 부속적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감정을 통칭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어떤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유발된 감정일까? 아쉽지만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난 인간의 감정은 양자역학과 굉장히 밀접하게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 수 없듯, 감정도 심연한 원인과 표면적 감각을 동시에 확실히 분석할 수 없다고 믿는다. 지극히 작은 미시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세계를 설명하는 감정역학을 꿰뚫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우리의 오늘을 좌지우지한다. 사랑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도 주지만, 끊이지 않는 고통도 준다.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 바로 사랑의 유무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이상 우리는 '의미'라는 무책임하고 막연한 것들을 조성하며 살아야 한다. 단순한 생존의 개념이 아니다. 한 번의 선택이 긴 시간을 빌리기도 하고, 선택의 폭이 좁은 순간에는 삶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린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조금씩 더 깊어지고 세분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아픔의 스펙트럼도 다양해지면서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는다. 한 사람을 향한 감정은 계속 변하고, 나의 삶을 향한 감정도 계속 변한다. 흑백이라고 해서 완벽한 검정과 완벽한 하양만 있는 건 아니다. 어둠과 밝음의 정도가 제각기 다른 다양한 회색이 공존하듯이, 우리의 감정도 단순히 하나의 이름으로 명명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이 같지 않은 이유다. '마음 맞는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하고, 우리는 잠깐 사랑했다가 오래도록 멀어진다. 그럼에도 우리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난 인간의 모든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단지 나의 사랑은 더 격해져 그리움이 되었고, 당신의 사랑은 그 대상을 더는 알기 어렵다.

작가의 이전글 행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