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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Jul 03. 2023

식물 엔딩

식물은 생각할 수 있을까? 식물도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의 감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연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결코 여타 동물처럼 사고하지는 못한다. 어려서는 양파도 욕을 들으면 주눅이 들어 잘 자라지 못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어서 양파에게 별별 오글거리는 칭찬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바보야

한편으로는 식물이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만일 식물이 감정이나 고통 따위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면 난 식물학대범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즈음 초등학생 시절에는 식물을 많이 키웠다. 집에서는 큰 산세베리아 화분을, 교실 선반에서는 작은 산세베리아 화분을 키웠다. 요란한 것보다는 잔잔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성격인데, 식물 키우기만큼은 내 성격과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집에서 키우던 거대한 산세베리아 화분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잎이 썩어간 것도 모자라, 화분을 거실에 세워두고서 야구를 한답시고 배트를 휘두르다 보니 잎을 다 꺾어버렸다. 작은 산세베리아 화분은 집으로 가져와 발코니에 두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그 존재를 까먹은 나머지 바싹 말라 죽였다. 생명력 면에서는 으뜸인 산세베리아를 각양각색 죽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작년 봄,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간 격리를 했다. 보건소에서 PCR 검사를 받고 오는 길에 왠지 확진이 될 것 같은 낌새에 얼른 다이소에 가서 바질을 샀다.

바질 새싹

처음에는 애지중지 키웠다. 내 성씨를 본따 이름을 '오바질'로 지어준 뒤 흙이 마르지 않도록 밤낮으로 꾸준히 물을 주었다. 어릴 적 산세베리아를 죽인 과오를 거듭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 같은 게 생겼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줄기가 휘어질 만큼 높이 자란 바질은 푸릇한 기염을 토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줄기가 꺾여버릴 것 같아 얼른 나무젓가락 하나를 가져와 지지대를 세웠다. 애정이 과했던 탓일까, 지지대를 설치하는 도중 의도치 않게 줄기를 꺾었다. 꺾인 줄기를 손에 쥐고 쪼그려 앉아 적어도 10분은 멍하니 그렇게 있었다. 실의에 빠진 나는 그 이후로 바질에게 물도 관심도 주지 않았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바질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식물과 나의 인연은 몽땅 용두사미였다. 첫 만남부터 모든 사랑과 관심을 쏟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소원해졌다. 살다 보니 모든 인연의 끝이 식물처럼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때는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던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며 생사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요즘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그 관계에 충실하기가 어려워졌다. 어차피 나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먼저 판단해 버리고, 일찌감치 겁을 먹어 관계를 진전시킬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맺은 모든 인연이 마치 나와 식물의 관계처럼 소원한 끝을 맞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랑했고 그러다 내가 그 관계를 죽였다.


어려서 애지중지했던 강아지 인형이 있다. 멍멍이라는 전형적인 이름을 가진 그 인형이 좋아서 옆에 앉혀 밥도 먹여주고 따뜻한 이불도 덮어주었다. 멍멍이 말고도 토순이, 쥐돌이, 당근이 등 일명 멍멍이 패밀리가 있었지만 언제나 대장은 멍멍이였다. 난 진심으로 멍멍이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멍멍이는 어린 나의 세계관의 전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찾아온 멍멍이와의 이별은 그리 산뜻하지 못했다. 화장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얼굴에 유성매직을 들었고, 그렇게 엉망이 된 얼굴을 수습해 보려 다시 여러 번 선을 그었다. 쓰레기통에 멍멍이를 유기했던 그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너무도 허무하게 끝을 맞았으나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흐지부지 내게서 멀어졌다. 바질을 너무 사랑해서 지지대를 세워주고 싶었고, 멍멍이를 너무 좋아해서 얼굴을 예쁘게 꾸며주고 싶었다. 서툰 애정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불러일으켰고, 나의 작은 선택은 모든 관계를 죽였다. 사랑해서 그랬다고 변명한들 나의 잘못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탓에 내게서 멀어진다. 난 모든 사람과 식물 엔딩을 맞는다. 서로를 전혀 싫어하지 않는데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잊힌다. 여전히 좋아하는데 정해진 것처럼 엔딩을 맞는다. 바질 이후로 식물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멍멍이 이후로 인형에 이름을 붙이거나 밥을 먹이지 않는다. 내가 좋아했다가 또 황당한 식물 엔딩을 맞을까 지레 무서워서 그렇다. 시작은 쉬운데 오래 잇는 것은 어렵다. 탕진은 쉬운데 반복은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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