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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Jul 04. 2023

책과 오렌지

책을 좋아한다. 내가 집 다음으로 자주 머무는 곳은 도서관이다. 심심하면 돈도 없이 서점에 들러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한다. 책만이 주는 아날로그적 무드가 좋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책을 그리 자주 읽지는 않는다. 올해 들어 내가 읽은 책은 열두 권 남짓. 학업과 병행하며 읽은 것치고 적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학업 외에 다른 일을 하지는 않았으므로 책을 읽을 시간은 넘치도록 충분했던 것을 고려하면 결코 많지 않다.


도서관에 자주 머문다면서 책을 자주 읽지는 않는다니. 그 시간에 무얼 하느냐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책을 펼치면 졸음이 밀려오는 독곤증이 있다. 한 페이지를 미처 넘기기도 전에 집중이 잘 안 되고 잠도 쏟아져서, 책 한 권을 완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책을 사서 읽지는 못하고 책장 한편에 쌓아만 두는 실정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책은 계획과 감정에 여유가 있을 때만 읽어야 한다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것이 있어서, 독서는 여타 스케줄에 우선순위가 밀려 뒷전이 되기 일쑤다.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가도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거나 유튜브를 보게 된다.


좋아하는 것과 오래 곁에 두고 싶은 것은 약간 다른 개념이다. 나는 오이를 좋아하지만 오이를 삼시세끼 먹고 싶지는 않다. 카더가든 노래를 좋아하지만 그리 자주 듣고 싶지는 않다. 어떤 것들은 분명 무게감이 있는데도 왠지 매력이 은은해서 잦은 만남이 매력을 소모시킬까 겁이 나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보거나 가끔씩 맞닥뜨리려 노력하는 것 같다. 내게는 책이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책은 순하고 담백한 매력이 있어서 좋지만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오고, 다른 강렬한 생각에 밀려 손이 빠릿하게 잘 안 가는 것 같다.


식탁에 오렌지 2개가 놓여있길래 부모님께 먹어도 되냐고 여쭌 적이 있다. 부모님은 네가 알아서 껍질을 까서 먹으면 된다고 대답하셨다. 오렌지 하나를 왼손에 살포시 올려두고 저글링하듯 몇 번 공중에 띄우기를 반복하다 그냥 다시 식탁에 두고 돌아섰다.


오렌지는 맛있다. 아이엠그라운드 과일 이름 대기 게임을 한다면 충분히 언급될 수 있는 유명 과일이다. 라즈베리나 패션후르츠 같은 비인기멤버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다. 게다가 다소 고급스러운 이미지 같은 것이 있어서, 우리는 뷔페에서 우아하게 누워있는 오렌지 조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렌지는 그리 끌린다는 느낌이 없다. 만약 식탁에 오렌지가 아니라 아삭상큼한 자두가 있었다면 냉큼 집어 먹었을 것이다. 시장이나 대형마트에 오렌지가 진열되어 있어도 굳이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렌지라는 과일이 내게 그런 것 같다. 분명 유명한 과일인데 막 엄청나게 먹고 싶다는 생각은 잘 안 든다. 누가 껍질을 까서 먹으라고 내놓으면 맛있게 먹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노력해 찾아서 먹지는 않을 것 같다.


오렌지색도 그렇다. 분명 주황은 무지개에 들어가는 메이저 컬러다. 그러나 역시 색칠할 때 그다지 많이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사용감이 있는 24색 또는 48색 물감이나 크레파스 같은 것을 보면 주황 계열의 색들은 다른 색에 비해 비교적 통통하다. 그만큼 빈번하게 사용되는 색은 아니다. 빨주노초파남보의 엄연한 구성원이며 나름 팬층도 두텁지만 주목받는 스타일은 아니다.


가수 스텔라장이 최근에 낸 앨범은 오렌지를 주제로 한다. 스텔라장이 이전에 발표한 노래 'Colors'에는 갖가지 색이 등장하는데, 주황색만 없다. 주황색이 그렇다. 매력이 순순해서 잊히기 쉽다. 학창 시절에 존재감은 없는데 은은하고 고급스럽게 센스와 재치가 넘치는 친구 같은 느낌이다.


어슴푸레하면서 멋진 것들이 있다. 내게는 책이 그렇고 오렌지가 그렇고 주황색이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것 같다. 뚜렷하지도 못하고 줏대도 없지만 희미하고 아득한 정체성을 지니고 산다. 은은한 매력은 재미도 없고 잊히기도 쉬움을 잘 안다. 그러나 책과 오렌지가 나의 정체성이라면, 나처럼 따분한 책에 관심을 주는 사람에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주황색을 이따금 찾는 손길을 소중하게 여기려 노력해야지. 시큼한 과즙이 손톱 사이로 물들어도 기꺼이 두꺼운 껍질을 까서 오렌지를 먹어주는 사람을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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