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이었을까요.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저는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향했습니다. 긴장감과 힘이 잔뜩 들어간 체로 교수님 연구실에 앉아서 앞으로 수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들었습니다. 저 빼곤 전부 유학생들이었기에 저에게 수업과 관련해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니 남으라 하셨습니다.
뭐.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쩌다 그 나이에 직업도 가지지 않고 공부만 하게 되었는지. 이렇게 공부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기간제 교사를 오래 했었는데 임용고시는 다시 치지 않을는지. 여기서 계속 공부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라는 등 다양한 현실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저도 다 아는 이야기였습니다. 친구들이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은행과 대기업에 취업할 때 학부시절 항상 일등이었던 저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임용고시는 아슬아슬하게 자꾸만 떨어져 희망고문이 계속되었고 친구들은 성공하자 변해버렸습니다. 그동안 스스로나 주위로부터 제게 비교당했던 자격지심을 가지고 저에게 마치 앙갚음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굴 무시하거나 괴롭힌 적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정신 차려 보니 계속 실패만 했습니다. 그러다 몸이 아프고 마음도 아파졌습니다. 그렇게 위축된 체로, 너덜너덜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열심히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제 자신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제 자신이 가여워 눈물 흘린 적이 숱하게 많죠.
교수님은 계속 대학원을 졸업하고 어찌 될지 걱정이라며 임용고시를 다시 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다 그래도 결혼했으니 여자는 성공에 대한 부담이 적어서 다행이라 하시다가 따뜻한 보리차를 한 잔 주셨습니다.
그때까진 교수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제 안의 상처가 기억나 슬퍼져 보리차를 마시며 멍해졌습니다. 차 한잔을 겨우 마시고 일어나려는데 교수님께서 스쳐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야. 너 그래도 열심히 살았구나? 돈 벌면서 공부도 하러 오고. 그 사이 교원자격증도 2개나 땄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게. 뭐?'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오래 근무한 저로선 제 조건이 썩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임용고시에 합격해 대학원도 다니고 성과급도 기간제인 저보다 두 배나 받고, 교원자격증도 다 한 두 개는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걸 열심히 한 걸로, 잘한 걸로 인정해 준 것. 그것이 제게 위로였습니다.
꼭 임용고시에 합격해야 열심히 산 건 아니니까요.
그날 학교에서 돌아와 상담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 순간엔 잊고 있었는데 상담을 하며 열심히 제 이야기를 떠들면서 뭔가 오늘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상담을 하면서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는데요. 오히려 상담이 다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뭘까 생각하다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오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뱉은 교수님의 인정 어린 말에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요.
여러분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고, 한 땐 잘 나갔는데 지금은 주저앉아 있다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한 번도 잘 살아본 적이 없다고 느끼는 분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전부 열심히 살았어요.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어요. 지금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노력입니다. 그 많은 상처를 안고도 버티고 있으니까요.
여러 분은 초등학교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걸 이루어냈는지 모릅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쌓고 있는 중인 겁니다. 제 자신이 보기엔 하찮고 실패한 것일지 모르지만 남이 보기엔 대단한 것일지도 몰라요. 지금 혹시 '나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됐지. 왜 나보다 못했던 그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위치에 있지?' 하시는 분들 제가 인정할게요.
"그래도 당신은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