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6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2차 대전의 서부전선을 책임지는 연합원정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에서 연합군이 승기를 잡는 데 큰 공을 세운, 미국이 낳은 현대사의 전쟁 영웅으로 평가 받는다. 당연히 인기도 많았다. 그러자 1948년 대선에서 트루먼과 민주당은 그에게 부통령 후보를 맡아 러닝메이트로 함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군인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며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공화당의 입당 제안도 있었으나 아이젠하워는 같은 이유로 그 제안마저 거절했다. 끊임 없는 러브콜에도 요지부동이던 그는 다소 파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2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에 입당해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것이다. 거물급 정치 신인이었던 그는 경선에서 승리해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대선에서 민주당의 애들레이 E. 스티븐슨 후보를 압도하고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 아이젠하워와 공화당
아이젠하워는 소속 정당으로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을 선택한 이유로 자신의 정치 성향이 공화당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가깝다. 아이젠하워는 정치적으로 중도 성향에 가까웠고 실제로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 중 많은 부분을 계승하는 모습도 보였다. 6.25 전쟁에서 트루먼 행정부가 세웠던 정전 방침을 그대로 계승해 1953년 7월, 협정의 조인을 이끌어낸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 아이젠하워 역시 트루먼처럼 흑인의 인권에 관심이 많았기에 흑인 민권 운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트루먼과 성향이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가 공화당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가장 유력한 가설은 그가 자신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 점쳐 민주당의 장기 집권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내린 선택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민주당의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될 경우 민주당은 장기 집권의 토대를 놓게 되므로 공화당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내린 전략적인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진실은 아이젠하워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2. 미국-중국-대만, 미묘한 삼각관계: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중국-대만의 미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했다. 1954년 9월, 6.25 전쟁이 정전 협정의 체결로 막을 내린지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대만의 요새를 포격하는 무력 도발을 감행했다.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또는 9.3 포격전으로 일컬어지는 충돌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대만, 통칭 양안(兩岸)이 충돌할 가능성을 경계해 양안 사이의 바다인 대만 해협을 일종의 완충지대로 삼고자 해군 함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런데 6.25 전쟁이 마무리되자 미국 내의 반공주의자들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대만 해협에서 함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만은 중국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해 인정하지 않았으며 타이완 섬은 임시 거처일 뿐 기회를 봐서 대륙을 되찾는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반공주의자들은 이에 주목해 대만이 중국에 맞설 군사력을 수월하게 키울 수 있도록 미국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미 해군 함대의 철수 이후 대만은 대륙 진출을 위한 거점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대만 해협에 위치한 섬들의 요새화를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의 국무원 총리이자 마오쩌둥에 이은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는 인민해방군에 대만의 요새를 포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타이완 섬을 수복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대만이 이에 똑같이 무력으로 대응하면서 대만 해협 위기가 발생했다. 당시 인민해방군의 포격으로 인해 요새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인 군사고문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신흥국을 자유주의 진영으로 끌고 오려는 목적으로 미국이 주도하여 창설한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의 발족 직전에 중국이 도발을 감행하면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흠집이 났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분노했고 행동에 나섰다. 행정부와 군부 내의 일부 강경파 인사들은 미군을 파병해 대만을 지원하고 핵무기를 사용해 중국을 타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군사 개입과 핵무기의 사용은 가급적 피하고자 했고 외교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954년 12월,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합의했다.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대만에는 미군과 미군의 전략무기가 주둔 및 배치되었다. 또 대만은 제3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으로부터 즉각적인 군사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미국에 보복조치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미군과 핵무기를 실전에 투입하지 않고도 중국에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대만 해협에서의 군사 행위를 중단하고 철수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교적인 해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곧바로 도발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몇 개의 섬에 상륙해 대만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두 번째 해법으로 핵무기의 투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작전을 꺼내들었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공식 석상에서 대만 해협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핵무기를 투입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NATO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해군 제독이 핵무기의 투입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위협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중국이 움직였다. 1955년 4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의 대표들이 모여 평화와 외교 노선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반둥 회의에 중국 측 대표로 참석한 저우언라이가 인도와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의제를 다루는 자와할랄 네루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평화공존 5원칙을 발표한 것이다. 평화로운 공존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국제사회와 호혜적으로 협력하고 모든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며 내정 불간섭과 상호 불가침이라는 국제법상의 의무를 성실히 지켜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는 외교를 추구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중국은 5원칙에 따라 미국과도 대화할 의지가 있음을 천명했고 동년 8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대만 해협의 인민해방군을 철군하기로 합의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냉전 초기, 강대강 대치와 무력 충돌만이 답인 것처럼 보였던 삼엄한 시대에 노련한 외교술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 핵전쟁을 피하고 자유주의 진영의 갈등을 초래하다: 수에즈 전쟁
대만 해협 위기를 넘기니 제2차 중동전쟁, 이른바 수에즈 전쟁이 발발했다. 수에즈 전쟁은 이집트 정부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 것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반발하면서 벌어졌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집트의 젊은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줄타기 외교라는 참신한 외교술을 선보였다. 나세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얻어내려 했다. 그래서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고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댐과 같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한 것을 이유로 자유주의 진영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할 것을 거부하자 나세르는 줄타기 외교를 파기하고 친공 정책을 펼치며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에 경제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동맹을 결성해 이집트를 침공했다.
수에즈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은 이집트 정부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탓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막대한 경제적인 피해를 입게 된 것에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이 있다면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느낀 두려움에 있었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세르를 아돌프 히틀러와 겹쳐 보았다. 나세르가 서유럽 국가들의 제재에 반발해 운하를 국유화하는 모습이 마치 히틀러가 서유럽 국가들에 맞서고자 주변 국가를 병합하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따라서 나세르를 방치할 경우 히틀러가 그랬듯이 기고만장해져 북아프리카발 세계 대전을 일으킬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영향력을 키울 때 이를 방관했고,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개입을 머뭇거렸다. 그 결과로 프랑스는 한때 괴뢰국으로 전락했었고 영국은 나치의 전투기에 본토를 내주어야 했으며 세계를 휘감은 화염의 원흉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외무장관으로 일하며 히틀러를 직접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던 앤서니 이든 영국 총리가 이집트에 개입할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외쳤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로 이집트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집트를 놓고 대립각을 세우는 국가는 다른 곳도 아니고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인 소련이었다.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의 이집트 침공을 강력히 규탄하며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철수하지 않을 경우 소련도 개입할 것이며 핵무기 또한 투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국은 그동안 상대했던 북한과 중국의 체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련과 전면전, 그것도 핵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또 영국과 프랑스가 나세르를 아프리카의 히틀러라고 표현하는 것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와 나치 독일의 팽창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시절 이집트로부터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과 관리권을 빼앗은 전력이 있었고, 이를 근거로 이집트가 독립한 이후에도 수에즈 운하를 무료로 이용할 권리를 달라는 도덕성이 결여된 주장을 내놓고 있었다. 이 주장에 미국이 동조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신생 독립국들이 공산주의 진영에 대거 합류할 수도 있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멈춰 세워야 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에 석유 수출입 제재를 가했다. 전쟁을 수행할 때 석유와 같은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석유와 관련한 제재는 전쟁을 멈추라는 메시지와 동일시된다. 나아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만약 상황이 나빠져 실제로 소련이 개입해 영국과 프랑스에 공격을 감행한다 할지라도 미국이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NATO의 회원국이다. 따라서 NAT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공격은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므로 미국도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의 불개입 선언은 NATO의 집단안전보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뜻이자 영국과 프랑스를 NATO의 회원국으로 보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은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마저 자신들을 압박하자 적잖이 당황했다. 이집트를 침공한 것이 오판이었음을 인정해야 했고, 결국 침공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철수해야만 했다. 미국은 제국주의를 그리워하는 향수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를 길들이는 데 성공했으며 소련과의 전면전도 피하는 최상의 결과를 안았다.
물론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 또한 존재한다. 당시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진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탓에 음모론들이 난무했다. 소련이 미국을 압도하는 전력을 갖췄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소련과의 전면적인 핵전쟁을 우려한 것 또한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이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핵전력은 미국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소련이 직접 가짜뉴스를 흘려가며 핵전력을 부풀릴 정도였다. 영국과 프랑스처럼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를 위협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을 위협하기에 소련은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두려움 때문에 동맹국을 공격하는 우를 범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세르는 히틀러만큼 무시무시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야망이 있었다. 그는 수에즈 전쟁을 계기로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아랍민족이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아랍민족주의와 아랍사회주의를 내세웠다. 이는 나세르주의로 발전해 아랍권의 혼란한 사회상이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주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우려가 어느 정도 들어맞았던 것이다. 또 미국의 불개입 선언에 충격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자적인 핵개발에 나서 결국 핵무장에 성공했다는 점과 이로 인한 핵무기의 급격한 확산을 미국이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했다는 점 또한 비판을 받는다. 당시에도 핵무기는 평화와 세력균형을 단숨에 파괴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평가 받았고 핵무기의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강대국 사이에서 비확산과 군축을 합의해 나가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핵무장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결국 국제사회는 오늘날까지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의 불균형이 갈등을 양산하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4. 정리하며
아이젠하워는 트루먼과 달리 재임 전에도, 재임 중에도, 그리고 퇴임 후에도 꾸준히 많은 인기를 누렸다. 오늘날에도 아이젠하워를 향한 평가는 긍정적인 편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국제사회가 핵전쟁의 위협 속에서 벌벌 떨었던 시기이다. 6.25 전쟁은 물론 대만 해협 위기와 수에즈 전쟁에서 모두 핵무기를 동원하겠다는 엄포와 핵무기로 보복하겠다는 대응이 오갔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핵무기를 위협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도 물밑에서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치밀한 외교전을 펼쳐왔고 대부분 외교적인 해법을 찾아 분쟁을 중재했다. 국제사회에서 힘을 가진 국가가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모범 답안까지는 아닐지라도 준수한 답안을 늘 내놓았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판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시대가 그들에게 요구한 역할이 그랬고, 자신들의 결정이 시간이 지나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그 나비효과까지 계산해 행동하라는 것은 가혹하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0년대의 정세에 비추어 필요한 역할을 해낸 행정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