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7
1960년이 되자 미국이 떠들썩해졌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인기는 대단했기에 일각에서는 그가 3선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해리 S. 트루먼의 재임 당시 헌법에 대통령직을 3선 이상 재임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했었기에 아이젠하워는 자연스럽게 1960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자 공화당 내부에서 위기론이 터져나왔다. 아이젠하워 개인은 인기가 있을지 몰라도 공화당이 인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화려한 정치 경력과 뛰어난 감각, 그리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황태자라는 프레임을 이용해 선거에서 승리하고자 했다. 민주당은 존 F. 케네디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정치 명문가인 케네디 가문 출신의 잘생기고 젊은 정치인이었다. 유권자의 선택은 젊음을 강조하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실책을 언급하며 뉴 프론티어(New Frontier) 정신을 외친 케네디에게 향했다. 그렇게 케네디 행정부가 출범했다.
#1. 뉴 프론티어 정신과 국제주의 행보
뉴 프론티어 정신이란 케네디 행정부를 관통하는 이념으로 국가 또는 사회가 개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개인이 국가 또는 사회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말로 대표된다. 케네디는 낡은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대의 개척자 또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시대의 개척자로 개인을 제시했고, 개척해야 할 분야로 우주와 과학 기술을 제시했다. 그는 개인이 적극적으로 미개척 분야를 개척하는 데 동참할 것을 주문했다. 뉴 프론티어 정신은 외교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케네디는 신생 독립국과 저개발국이 주로 위치한 아시아와 중남미에서 빈곤을 퇴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경제적인 지원을 필두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자연스럽게 이식해 자유주의 진영의 새로운 구성원을 늘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이 목표를 숨기려 했다. 빈곤을 퇴치하는 것은 당연히 옳고, 미국이 그 당위의 짐을 짊어지는 것은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뉴 프론티어 정신에 따라 지원을 제공받는 국가에서 미국과 국제사회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을 요청했다. 뉴 프론티어 정신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진영에 합류할 것을 타진했던 것이다.
케네디는 자유주의 진영을 확대해 냉전의 악화를 초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소련과의 대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의 국가들이 이념을 초월해 빈곤을 퇴치하는 데 힘을 보태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소련이 이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고 자유주의 진영을 경계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젊은 초보 대통령 케네디를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케네디는 겉으로는 냉전의 완화와 공산주의 진영과의 대화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며 뒤로는 자유주의 진영의 우위를 공고히 하고 스푸트니크 쇼크 등으로 인해 실추된 과학 기술 분야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2. 초보 대통령의 실수,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
1950년대 쿠바에는 친미 성향이 짙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바티스타는 군인 출신으로 1933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헤라르도 마차도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당시 바티스타는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쿠데타 이후 수립된 카를로스 마누엘 정권도 마차도 정권만큼 무능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쿠바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경제와 교육을 개혁하는 데 힘썼고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또 쿠데타로 집권한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재선에 도전한 선거에서 패배하자 쿠바의 정계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그는 이미 독재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1952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세 번째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를 통해 정권을 잡고 본격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쿠바의 대중은 바티스타의 쿠데타를 지원한 것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 사실 쿠바가 미국에 반감을 가진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 군정을 실시했다. 1902년에는 쿠바에 독립을 안겨주었는데, 말이 좋아 독립이지 사실상 속국으로 만든 것과 다름이 없었다. 독립 당시 쿠바의 헌법에는 재정과 외교에 관한 권한을 모두 미국 정부가 가진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미국 정부가 원할 때 쿠바 전역을 미군의 군사기지로 활용할 수 있고 쿠바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도 반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쿠바는 5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미국의 식민지로 온갖 수탈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상황이 이러니 쿠바의 대중이 미국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쿠바에 공산주의가 퍼졌다. 공산주의자로서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선 이들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뒤늦게 그의 편에 합류한 체 게바라("Che" Guevara)였다.
피델 카스트로가 1953년 7월, 산티아고에 위치한 몬카다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시작으로 쿠바 혁명이 발발했다. 카스트로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성난 여론 때문에 금방 풀려났다. 그러자 카스트로도, 대중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게릴라(guerilla) 전술을 활용한 쿠바 정부와 혁명 세력의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고, 1958년 12월에 이르러 대중의 반정부 시위와 혁명 세력의 총력전이 한꺼번에 쿠바 정부를 덮쳤다. 쿠바군이 혁명 세력에 항복하고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쫓기듯 망명하면서 쿠바의 친미 정권은 무너지고 카스트로를 수상으로 하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하루아침에 최대의 적을 턱밑에 두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당연히 이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쿠바를 침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망설였다. 자신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부담이 상당했던 것이다. 그는 정보당국과 군부에 정보를 수집하고 쿠바 침공을 위한 시나리오를 제작할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2506여단(Brigade 2506)이 창설되었다. 쿠바 출신 망명자들로 구성된 이 여단은 비밀리에 쿠바에 침투해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릴 요량으로 게릴라 전술을 훈련받았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마치 로마의 독재자 카이사르가 믿었던 브루투스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던 것처럼 카스트로 정권도 믿었던 쿠바인에게 손에 무너지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 작전을 브루투스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이 작전이 빛을 보기 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섰다. 정보당국과 군부는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케네디가 브루투스 작전의 폐기를 지시할 경우 2506여단의 유지와 훈련을 위해 들어간 시간과 돈이 아깝고 혹시나 정보가 새어나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얻게 될 부담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보당국과 군부는 무리해서라도 어떻게든 쿠바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케네디는 피그만 침공과 노스우즈 작전(Operation Northwoods)이라는 두 편의 쿠바 침공 시나리오를 받아보았다. 케네디는 쿠바를 침공하고 싶지 않았다. 뉴 프론티어 정신을 내세우며 대외적으로 화해 모드를 천명한 상황에 쿠바를 공격하는 것은 리더십에 큰 타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와 함께 일하며 높아진 정보당국과 군부의 주요 인사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게다가 CIA는 수많은 정보를 근거로 들며 쿠바를 침공할 경우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하며 케네디를 부추겼다.
결국 케네디는 피그만을 침공하는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노스우즈 작전에는 쿠바를 대대적으로 침공할 명분을 얻기 위해 미국이 적당한 자작극을 벌인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그 적당한 자작극이라는 것이 여객기 격추, 주요 도시 폭격, 도심 테러 등과 같이 말도 안 되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961년 4월, 미군은 2506여단을 중심으로 한 피그만 침공을 감행했다. 그런데 이는 정말 어처구니 없게 실패하고 만다. 먼저 피그만 침공의 주력 부대였던 2506여단은 게릴라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였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나 새벽에 몰래 침투하여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야 보안을 유지하고 미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보당국과 군부의 주요 인사들은 오래 기다린 한이라도 풀겠다는 것인지 폭격기와 함정까지 동원하는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작전의 규모를 잔뜩 키우는 실수를 범했다. 이 정도 규모의 작전을 준비한다면 당연히 쿠바를 비롯한 소련의 정보당국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국 정보당국이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미국의 언론들이 쿠바를 목표로 한 군사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보도를 낼 정도였다.
피그만은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와 매우 가까워 상륙지로 선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역이었으나, 카스트로 정권 역시 피그만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어서 미국이 모종의 작전을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전부터 이미 다른 지역보다 경비를 신경쓰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피그만을 상륙지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니 카스트로 정권은 부대와 무기를 좀 더 배치하는 수준에서 방비를 마칠 수 있었다. 모든 부분에서 미국은 너무 어설펐고 피그만 침공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게임 체인저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미국이 압도적인 항공 전력을 활용해 공중에서 열띤 지원을 제공한다면 작전은 성공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2506여단의 상륙 직전에 폭격기를 투입해 피그만의 군 기지를 습격했다. 효과는 대단했고 피그만에 주둔한 쿠바의 공군 전력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전략도 빛났다. 미 공군은 당시 쿠바 공군의 주력 폭격기였던 A-26 기종을 성조기 문양을 깔끔하게 지운 다음 공습에 투입했다. 쿠바군에게 내부에 반란 세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혼란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군은 2차 폭격을 진행하지 않았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는 당연히 2차 폭격을 준비하려 했다. 오히려 1차 폭격 때보다 규모를 키워 더 많은 폭격기를 투입해 쿠바군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히려 했다. 그러나 CIA에서 이를 막았다. 쿠바군의 내부에 있는 반란 세력의 공격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A-26을 동원하고 성조기도 지운 것인데 곧바로 2차 폭격이 이루어지면 미국이 개입한 것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르메이는 미국이 개입한 사실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작전의 규모가 너무 큰 탓에 불가능하고, 따라서 반드시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공군의 대대적인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으나 묵살되었다. 이를 두고 르메이는 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은 피그만에 상륙하는 순간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통찰력 있는 말을 남겼다. 결국 2차 폭격 없이 상륙한 2506여단은 혹시 모를 2차 폭격에 대비하던 쿠바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서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정보당국과 군부는 늦게라도 공군을 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2506여단의 모든 부대원이 죽거나 포로로 붙잡히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피그만 침공이 실패하자 케네디의 미국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쿠바와 소련은 피그만 침공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선언하며 공세에 나섰다. 미국은 이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훗날 포로들을 송환받기 위해 쿠바와 협상에 나서면서 완전히 인정하게 된다. 카스트로 정권은 피그만 침공을 계기로 쿠바 내의 반공 세력과 친미 세력의 대부분을 정치범이라는 명목으로 소탕하는 데 성공했고 소련은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쿠바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쿠바에 더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턱밑에 자리한 적이 훨씬 더 확실하고 단단해진 것이다.
케네디는 적어도 외교정책에서 천명한 뉴 프론티어 정신이 위선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리더십을 잃고 크게 망신을 당했다. 그는 즉시 CIA의 국장을 경질하고 CIA 자체를 해체해 정보당국을 새롭게 개편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군사적인 개입에 굉장히 소극적으로 변해 임기 중에 미군을 해외로 파병하는 것을 사사건건 반대하기도 했다. 한편 군부는 노스우즈 작전을 수정해 몽구스 작전을 케네디에게 제시했는데, 쿠바군으로 위장한 미군을 관타나모 해군 기지에 투입해 시설과 전함을 파괴하게 해 미군 사상자를 만들어 쿠바를 침공할 명분을 얻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케네디는 거부했고 본격적으로 군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3. 초보 대통령의 소심함, 베를린 위기(Berilin Crisis)
케네디를 얕잡아 보면서도 경계하고 있던 흐루쇼프는 피그만 침공이라는 자충수를 두고 무너진 미국을 바라보며 케네디 행정부가 소련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세계의 패권을 소련으로 가져오는 전략을 펼쳤는데 1961년의 베를린 위기도 그 중 하나이다. 베를린은 지리적으로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베를린 역시 동서로 분할되어 관리를 받았기 때문에 동베를린은 동독과 소련의 관할이었지만 서베를린은 서독과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의 관할이었다. 그런데 베를린의 위치 자체가 동독의 한복판인지라 소련은 자유주의 진영을 압박하기 위해 서베를린을 위협하는 행동을 자주 보였다. 트루먼 행정부 시기의 베를린 봉쇄가 대표적이다.
피그만 침공 이후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흐루쇼프는 시종일관 케네디를 무시했고 각종 의제에서 의견 차이를 보이자 대뜸 서베를린에서 즉시 철수하고 베를린 전역에 대한 동독과 소련의 관할권을 인정하라고 통보했다. 케네디가 당황하자 흐루쇼프는 만약 자유주의 진영이 서베를린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핵무기를 동원한 전쟁도 불사할 것이며 회담에서의 통보가 최후통첩이라고 밝혔다. 베를린에서의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인지 여부는 오로지 미국의 판단에 달렸다며 압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케네디가 회담장에서 곧바로 흐루쇼프의 요구를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었다. 베를린의 분할 통치는 분할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얼핏 보면 공산주의 진영에 둘러싸인 서베를린이 압도적으로 불리해보이나, 자유주의 진영의 위세를 생각하면 오히려 자유주의 진영이 관할하며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구역을 내어준 공산주의 진영이 더 불리했다. 따라서 서베를린의 존재는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아주 매운 작은 고추에 해당했다. 케네디로서는 서베를린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거부하자니 흐루쇼프가 꺼내든 핵전쟁이라는 단어의 위압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상회담은 아무런 소득 없이 결렬되었다.
케네디는 귀국하자마자 TF를 구성해 가능한 모든 핵전쟁 시나리오와 이로 인한 피해 규모를 진단해 보고할 것을 명령했다. TF의 단장에는 트루먼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냈고 애치슨 라인으로 유명한 딘 애치슨을 임명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핵전쟁은커녕 자유주의 진영과 작은 전투조차 벌일 생각이 없었다. 베를린 위기를 조성한 것은 베를린 장벽을 세우기 위한 연막 작전에 불과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태도와 미국에서의 행동을 보고 베를린 장벽을 세워도 미국이 반발할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소련은 동독과 협력해 베를린 장벽을 세울 준비에 들어갔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가로막는 장벽이 생긴다는 소문이 돌자 급하게 동독을 탈출하는 난민이 급증했다. 자유주의 진영은 미국을 향해 대응할 것을 요구했다. 케네디는 동독과 소련이 베를린에 장벽을 건설하는 것은 포츠담 선언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는데 이는 원론적인 것이었다.
동독과 소련은 끝내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케네디 행정부는 급하게 전투기를 베를린으로 보내기도 했으나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방관했다. 케네디는 핵전쟁의 위기를 벽 하나 세우는 것으로 막을 수 있다면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초에 흐루쇼프에게 핵전쟁을 실제로 벌일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케네디의 판단은 다소 아쉽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베를린 장벽의 건설을 방관한 미국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케네디 행정부는 뒤늦게 공산주의 진영이 서베를린에 침범할 경우 대응하겠다며 미군을 파병했으나 이것으로 자유주의 진영과 서독인들의 실망을 달랠 수는 없었다. 케네디 행정부가 베를린 장벽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 과거의 행정부들과 달리 유약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결국 피그만 침공의 실패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피그만 침공의 실패로 얻은 리스크를 털어내기도 전에 베를린 위기가 터지며 지나치게 소심해졌던 것이다. 한편 베를린 장벽은 1989년 겨울, 베를린 시민들의 손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4. 초보 대통령의 성장,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
흐루쇼프가 소련으로 패권을 가져오기 위해 펼쳤던 전략 중 가장 유명하고 또 강렬한 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소련은 자주 핵무기의 투입을 거론하며 핵전쟁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방식으로 자유주의 진영을 위협했지만 당시 소련의 전력에 비추어볼 때 이는 허세에 가까웠다. 소련이 가진 핵무기는 양과 질 모두 미국이 가진 것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련에게는 선제타격능력이 없었다. 소련이 핵무기로 미국의 본토를 타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같은 사거리가 긴 미사일에 탄두를 탑재해 날려 보내야 했다. 그마저도 반면 미국은 터키(튀르키예) 등에 곧바로 투입이 가능하면서 모스크바를 포함한 소련 전역을 사정권으로 하는 핵무기를 많게는 15기까지 배치해둔 상황이었다. 미국과의 전면적인 핵전쟁에서 소련의 선택지는 최대한 빨리 무조건 항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은 소련의 핵전력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스푸트니크 쇼크 등으로 인해 소련의 기술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날 수 있다는 맹목적인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노련한 흐루쇼프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더욱 공세적인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정보의 불균형을 이용한 공세적인 외교술이 언제까지나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미국에 가까이 다가가 핵무기를 심어놓음으로써 억지력(deterrence)을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때마침 소련에게는 쿠바라는 완벽한 선택지가 있었다.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고 추후 기지에 핵무기를 반입하기만 하면 워싱턴 D.C.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사정권에 두는 것과 동시에 유례없는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 역시 계속되는 미국의 위협을 스스로 견뎌낼 수 없다고 판단해 소련에 여러 지원을 요청했다. 흐루쇼프는 공산당 간부회의에서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할 것임을 선언했다. 더하여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을 파병하고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방안 또한 간부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속전속결로 미사일 기지를 세우기 위한 자재와 미사일, 그리고 핵탄두를 쿠바로 옮기기 시작했다.
1962년 9월, 소련이 쿠바로 건축 자재와 무기를 반입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가 쏟아지자 케네디 행정부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케네디는 소련이 쿠바에 제공하는 무기는 공격 용도가 아닌 방어 용도이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여론을 다독이면서도 소련을 향해 만약 공격용 무기를 배치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실제로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쿠바에 공격용 무기를 반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인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흐루쇼프는 케네디 행정부의 과민 반응에 의아해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은 이미 소련을 사정권으로 하는 핵무기를 유럽 곳곳에 배치해둔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련이 미국을 사정권으로 하는 핵무기를 쿠바에 배치한다고 해서 미국이 딴지를 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케네디는 계속되는 실책으로 유약한 대통령, 외교를 모르는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힌 상황이었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운명을 결정지을 선거 또한 예정되어 있었기에 과거와 달리 선제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내어 소련을 위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소련도 보안에 더욱 신경쓸 수밖에 없었다. 미사일 반입은 물론이고 기지를 세우는 모습조차 미국이 포착하지 못하도록 만전을 기하게 했다. 그러나 소련의 미사일 기지 건설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기지 건설과 미사일 배치를 감독해야 하는 군사고문단의 구성원 중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쿠바인들과의 소통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소련과 쿠바에서 사용하는 전격전압이 달랐던 탓에 군사고문단이 가져온 물건들을 대부분 현지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은엄폐에 활용하려 했던 쿠바의 야자수 숲이 생각보다 울창하지 않아 은엄폐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 소련은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나는 벌판에서 미국을 겨냥한 한 핵미사일을 발사할 기지를 지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군사고문단은 즉시 모스크바로 향해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단하거나 적어도 은엄폐가 가능한 지역을 탐사한 후 건설 위치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간부들은 계획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며 이를 묵살했다.
1962년 10월, 케네디 행정부는 쿠바를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던 항공기로부터 받은 사진을 토대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에는 벌판에 미사일 기지와 미사일을 보관하는 사일로 등을 건설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군부는 사진에서 식별할 수 있는 미사일 기종의 정보를 바탕으로 그 사거리를 추정했다. 그러자 미사일의 사거리를 뜻하는 빨간색 원이 미국 전역을 덮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케네디는 즉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회의에 참석한 각료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최대한 전면전을 피하고 대화와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당장 쿠바와 소련에 핵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주로 군부의 요인들이 후자의 입장에 섰는데, 케네디는 군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핵공격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케네디가 선택한 것은 쿠바 봉쇄였다. 쿠바에 미사일 기지가 지어지고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도 스스로 기지를 철거하고 무기를 반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케네디는 연설을 통해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짓고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고 폭로한 뒤 만약 미국을 포함한 자유주의 국가를 향해 소련의 핵미사일이 향할 경우 미국은 즉각 보복할 것임을 천명했다. 또 UN의 감시 아래 조속히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는 과정에 착수하라고 요구했다. 전 세계는 깜짝 놀랐고 쿠바의 동향에 관심을 쏟았다. 한편 흐루쇼프를 비롯한 소련의 각료들도 뒤집어지긴 마찬가지였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유약한 인물이므로 소련이 쿠바에 핵무기를 반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비밀리에 협상하자는 요청을 보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케네디가 공개적으로 소련을 비난하고 핵전쟁의 가능성을 시사하자 일이 틀어졌다고 판단했다. 흐루쇼프는 흥분한 군부가 독단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우려해 핵무기에 손도 대지 말라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각료들은 쿠바에 소련의 핵무기를 배치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해 맞불을 놓을지, 미국 본토를 타격할 능력이 없는 단거리 미사일만을 배치할지, 아니면 아예 모든 책임을 쿠바에 떠넘길지 토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케네디는 해군을 이용해 쿠바의 해상을 봉쇄했다. 그는 쿠바로 향하는 모든 선박, 특히 건설 자재가 실려 있는 선박에 대한 강도 높은 수색을 명령했고 무기와 같은 전략물자가 보이면 압수할 것을 지시했으며 수색에 불응할 시 무조건 격침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흐루쇼프는 당황하면서도 미국을 해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미 해군의 해상 봉쇄를 뚫고 건설 자재를 쿠바에 들여놓을 것을 명령했다. 맞불을 놓은 것인데, 이때 건설 자재가 실린 선박을 핵탄두가 탑재된 어뢰를 장착한 잠수함이 호위하도록 했다. 즉 미국이 공언한대로 수색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소련의 선박을 격침한다면 핵어뢰를 쏘아 대응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 케네디는 곧바로 대부분의 전략폭격기에 핵탄두를 장착할 것을 명령하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핵전력의 투입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당장 3차 대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심각한 분위기로 상황이 흘러가자 NATO와 WTO의 회원국들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그러나 케네디는 결코 무력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흐루쇼프도 마찬가지였다. 쿠바의 해상을 봉쇄했다고는 하나 못 본 척 지나가게 해준 선박들이 많았으며 미국의 봉쇄를 뚫고 지나가겠다고는 하나 근처를 맴돌다 회항한 선박들이 많았다. 눈치게임이 펼쳐지고 있던 것이다. 케네디는 해상 봉쇄에 참여하던 해군에게 신중에 신중을 기해 화물선 한 척을 골라 수색하고 문제가 없을 시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화물선 한 척이 미 해군의 수색을 받고 무사히 해역을 통과했다. 이 사실이 외신을 통해 세계에 알려지자 많은 국가에서 미국의 해상 봉쇄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고 결연하다고 믿게 되었다. 케네디는 세계인의 시선이 미국이 정말 선박을 수색할 것인지, 소련이 정말 돌파를 강행할 것인지에 쏠려 있는 상황을 이용해 미국에 해상 봉쇄와 선박 수색에 대한 의지가 있음을 광고한 것이다.
먼저 타협안을 제시한 것은 흐루쇼프였다.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고 모든 전략물자를 반출하는 대신 미국도 터키(튀르키예)에 배치한 탄도미사일을 제거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 UN에서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쿠바와 터키의 주권을 보장하겠다는 선언을 하자고 제안했다. 소련의 각료들도, 그리고 미국의 각료들도 이 제안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미국은 NATO와 WTO의 회원국들이 모두 동요할 수 있으니 합의의 내용은 비공개로 하되 적절한 시기에 합의를 순차적으로 이행하자고 제안했고 소련은 이를 수락했다. 그렇게 위기가 종식되는 듯했으나 몇 가지 변수가 다시 상황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과 소련 간의 비공개 합의가 단행된 사실을 몰랐던 쿠바의 카스트로는 주 쿠바 소련 대사관에 찾아가 미국의 공습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니 쿠바가 공격을 받을 경우 지체 없이 핵무기로 보복해줄 것을 소련 측에 요청했다. 흐루쇼프를 비롯한 각료들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현장의 지휘관들이 가진 생각은 달랐다. 상부의 명령 없이도 미국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군의 전투기가 쿠바 상공에 나타나자 쿠바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이 이를 격추하는 바람에 조종사가 사망하기도 했다.
미국과 소련의 각료들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으나 현장의 군인들의 머리는 용암처럼 끓어 올랐다. 미군도, 소련군도 통수권자의 명령 없이도 당장 핵전쟁을 벌일 태세로 대치했다. 이때 핵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이 모든 핵무기를 실전에 투입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는 방어전을 지휘한다는 명목으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사령관을 맡아 전쟁을 준비했다. 이 와중에 미국은 신형 탄도미사일의 시험 발사를 강행했는데 하필이면 소련과 중국 방향으로 발사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런데 이를 케네디를 비롯한 정부 요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처럼 군의 기강도 무너지고 모든 시스템이 붕괴한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은 의도적인 핵전쟁이 아니라 오해에 오해가 쌓여 벌어지는 우발적인 핵전쟁을 걱정해야 했다.
지칠대로 지친 흐루쇼프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국이 터키(튀르키예)와 이탈리아에 배치한 탄도미사일을 철거하는 조건으로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고 모든 전략물자를 반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이를 수락했다. 소련은 곧바로 건설 자재를 싣고 쿠바로 향하던 모든 선박을 돌아오게 했다. 미국 역시 탄도미사일을 철거하고 대신 지중해에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배치했다. 미사일 기지와 핵무기를 잃게 된 쿠바나 탄도미사일을 잃게 된 터키(튀르키예)와 이탈리아는 각각 소련과 미국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3차 대전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미국과 소련은 터키(튀르키예), 이탈리아, 쿠바 3국에 불가침한다는 약속을 주고 받았으며 확실하고 직접적인 정상 간 의사소통을 위해 최초로 핫라인(Hot Line)을 개설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인류를 3차 대전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무서운 사건으로 평가 받지만, 케네디 행정부와 민주당에게 결과적으로 큰 호재였다. 케네디는 성장한 모습을 뽐내며 이전의 실책들을 만회하고 강인한 대통령을 넘어 국제사회의 확실한 리더로 칭송받았다. 핵전쟁을 막아낸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민주당도 선거에서 크게 이겨 안정적인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공화당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 눈물을 삼킨 이는 또 있다. 흐루쇼프이다.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구석으로 몰아붙여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전세를 뒤집은 영웅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케네디는 흐루쇼프와의 정상회담 이후 노련한 그가 자신을 두들겨 팼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소련과의 외교에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모든 신뢰를 잃었다. 결국 2년 뒤에 실각하고 권력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게 넘겨주었다.
#4.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1963년 6월 26일, 케네디는 서베를린에 방문했다. 베를린 위기 이후 소련이 일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고 그것을 방관하여 자유주의 진영의 질타를 받았던 케네디가 당시 서베를린의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의 초청을 받아 자신의 흑역사를 지우러 간 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흐루쇼프와의 외교 전면전에서 압승을 거둔 케네디는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서베를린에 도착했고 냉전 시대를 상징하는 연설을 남겼다. 그는 더 이상 유약한 초보 대통령이 아니었고, 자유주의 진영의 도시라고는 하나 공산주의 진영의 한가운데 위치한 도시에 당당히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방문해 독일어까지 섞어가며 서독과 서베를린, 나아가 자유주의 진영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말에서 자유주의 진영의 확실한 리더로 거듭난 케네디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5. 케네디 행정부와 베트남 전쟁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케네디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쟁광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전쟁을 극도로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 전쟁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베트남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공산당이 집권한 북베트남과 응오딘지엠이 집권한 남베트남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유주의 진영에 합류했다. 베트남 안에서의 체제 대결이 격화해 벌어진 것이 베트남 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베트남이 위치한 동남아시아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신생국들이 가득했고 이들은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채 제3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들을 자유주의 진영으로 포섭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들을 지배했던 국가들이 대부분 자유주의 진영에 속했던 탓에 호감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루먼이 SEATO까지 만들며 동남아시아를 각별히 챙겼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때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동남아시아가 순식간에 공산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행정부는 섣부르게 전쟁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전쟁의 위협에 많은 이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남베트남이 무너지지 않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되 직접적인 개입은 피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정리하고자 했다. 직접적인 개입 없이 전폭적인 지원만 제공받고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 된 국가가 있다. 한국이다. 6.25 전쟁 이후에도 북한은 호시탐탐 한국을 침공하려 했고 국지적인 도발을 반복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미국의 전략무기가 일부 한국에 전개되기도 했지만 미국은 북한의 도발을 직접 응징하지 않고 한국이 스스로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다. 한국은 미국의 기대에 부응했다. 부정부패를 비교적 잘 통제했고 지원이 필요한 곳에 이를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덕분에 더디지만 전후 복구도 이루어졌고 어느 정도 여력이 생기자 경제성장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케네디의 재임 시절에는 한국에 박정희 정권이 막 들어서 경제성장을 위한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미국은 남베트남도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은 사마리아인의 딜레마에 빠져 신음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을 향하는 지원의 대부분이 부패한 관료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데 쓰였고 응오딘지엠은 겉으로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내세웠을 뿐 독재와 학살을 자행하는 범죄자로 변모하고 있었다. 게다가 북베트남과의 대치 상황을 가지고 미국을 협박하기도 했다. 미국은 참고 또 참으며 남베트남을 지원했고 군사고문단도 큰 숫자로 늘렸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미국이 제대로 된 지원 없이 내정에 간섭하는 군사고문단의 수만 늘린다고 비판하며 독자적으로 호찌민과 접촉해 베트남의 중립화 내지는 통일을 논의하려는 시도까지 벌였다. 케네디가 군사고문단의 수를 과도하게 늘렸던 것은 사실이다. 1만 명이 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쟁 중인 남베트남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유사 시 군사고문단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내린 궁여지책이었다. 공식적으로 미군을 파병할 수 없으니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갈음하려 했던 것이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케네디 행정부는 결국 응오딘지엠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지원한다.
케네디의 동생이자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 등의 회고에 따르면 케네디는 군사고문단의 수를 늘리는 꼼수를 써서 비판을 받게 되더라도 미군을 직접 투입하는 결정만큼은 피하려 했으며 1964년에 대선이 있었던 만큼 우선은 내치에 집중해 재선에 성공한 이후 남베트남에서의 완전한 철수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케네디가 재임 중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미국 정치권에서 변화가 일었다. 새로 들어선 행정부는 석연치 않은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정을 내린 장본인은 케네디 행정부 시절 부통령을 지낸 린든 B. 존슨이었다.
#6. 정리하며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 정신을 내세운 만큼 정말 개척자의 면모를 보였다. 내치 면에서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소련에 역전을 허용했다는 생각에 무력감에 빠져 있던 미국의 우주 개발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역사적인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을 입안했으며 외교 면에서 세계에 핵전쟁의 위협이 드리워진 데 대한 책임을 느껴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를 제시해 국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비핵화 및 비확산을 위한 노력의 초석을 닦았다. 특히 아폴로 계획은 케네디 사후 1969년 7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해 우주 비행사들이 그 위에 인류사 최초로 인간의 발자국을 남긴 것을 정점으로 인류의 우주 개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 받게 된다. 그의 이름을 딴 케네디 우주센터도 있을 정도이다. 그는 미숙했던 탓에 많은 실책을 남겼으나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었고, 정책적인 측면에서 기성 정치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아이디어를 뽐내기도 했으므로 1963년 이후의 모습이 더 기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대선을 1년 정도 앞두고 평소 지지율이 낮게 나오던 텍사스주의 댈러스 지역에 유세차 방문했던 케네디는 리 하비 오스왈드가 촌 쏭에 맞아 허무하게 숨을 거뒀다. 온갖 이슈들에 파묻혀 지내다 자기 정치를 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던 찰나에 스러지고 만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세상에는 1963년 이전의 케네디에 대한 설왕설래와 평가만이 남아있다. 그가 재선에 성공했더라면, 적어도 미국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남았더라면, 미국의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케네디가 짧은 재임 기간 동안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실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내놓으려 노력했던 성장형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