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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폭탄과 유도탄들 Aug 20. 2023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

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15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고 있던 앨 고어를, 공화당은 조지 H.W. 부시의 아들이자 텍사스 주 주지사를 지내고 있던 조지 W. 부시를 후보로 내세웠다. 농구선수 출신의 전직 상원의원이었던 빌 브래들리와의 경선에서 일찌감치 승리해 여유로웠던 고어와 달리 부시는 부침을 겪었다. 아버지 부시의 영향력과 막강한 자금 지원, 플로리다 주 주지사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동생 젭 부시의 지원 덕분에 쉽게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는 듯했으나 TV 토론에서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이며 지지율이 뒤집히는 위기를 겪었다. 접전 끝에 적극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펼친 부시에게 표심이 향했다. 고어는 대선 기간 초반에 부시에게 넉넉히 앞서는 페이스를 보여주었으나 TV 토론에서 부시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 실책을 저질러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1996년 대선에 출마했던 랄프 네이더가 다시 도전장을 내밀어 고어의 표를 잠식했다. 정국에 드리워진 안개는 짙어져만 갔다.


개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고어는 48.4%를 득표하며 47.9%를 득표한 부시를 근소한 차이로 앞질렀다. 그런데 선거인단은 부시가 271명, 고어가 266명을 확보해 오히려 부시가 앞섰다. 더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한 이가 대통령이 되는 미국 대선의 규정상 대통령 당선인은 부시였다. 그러나 혼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5명의 선거인단이 배정된 플로리다 주 개표 직전까지 고어는 249명, 부시는 24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상태였기에 플로리다 주의 개표 결과에 따라 당선인이 결정되는 상황이 되었다. 개표 결과 부시의 승리였으나 두 후보 간 득표율의 격차가 0.05% 이내로 좁혀져 플로리다 주의 규정에 따라 재검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선인을 확정할 수 없었다. 재검표 공방은 한 달이 넘게 이어졌고 최종적으로 부시가 고어를 단 537표 차로 이긴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은 전면 수작업으로 재검표할 것을 요청했으나 연방대법원에서 기각되어 대선 결과가 확정되었다. 부시의 승리였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가운데 아들 부시 행정부는 출범하게 되었다.


#1. ABC(Anything But Cliton): 클린턴만 빼고 다 좋아!

부시는 취임하자마자 ABC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Anything But Cliton, 클린턴만 빼고 다 좋다는 뜻이 담긴 슬로건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 펼친 정책들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부시 행정부는 일관적이지 못했던 대(對) 중국 외교 정책을 다시 수립하려 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중국을 견제하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만큼 부시는 중국을 강도높게 견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을 노골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강경책으로 수정했고, NATO를 중국을 견제하는 데 동원하기 시작했다. 부시 행정부의 목표는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를 확고하게 수립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패권은 부시의 생각과 달리 안정적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단계였다.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 행정부를 거치며 미국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세계를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었음은 물론 러시아도 체제를 정비하고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즉 부시 행정부는 수립하지도 않은 패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안정화 전략을 제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동맹국들의 반발을 불러왔는데, 부시 행정부는 동맹국을 상대로도 실력을 행사하려 했다. 이는 계속해서 부시의 발목을 잡는 최악의 선택이 된다.


#2.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취임 초기부터 부시 행정부가 숱한 오류를 범한 데에는 수장인 부시뿐 아니라 주변 관료들의 영향도 컸다. 부시의 주변에는 아버지 부시 행정부 시절 국방장관을 지냈던 딕 체니가 부통령으로, 제럴드 포드 행정부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과 국방장관을 지냈던 도널드 럼즈펠드가 다시 국방장관으로, 러시아 전문가로 알려져 있던 콘돌리자 라이스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자리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결함이 있었다. 먼저 체니는 부시로부터 외교군사에 관한 권한을 넘겨받은 사실상의 실세였다. 문제는 그가 강경한 보수주의자였다는 데에 있다. 부시 행정부의 실책은 모두 그의 입을 통해 나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럼즈펠드 역시 보수주의자였고 나이가 일흔에 달할 정도로 많았으며 고집이 세서 주변인의 충고를 잘 새겨듣지 않았다. 라이스는 당시 미국이 외교적인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지역이었던 중동과 아시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외교, 안보 분야의 책임자 자리에 있으면서 보수주의자 일색인 내각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걸프 전쟁 당시 합동참모의장으로서 사막의 폭풍 작전을 지휘한 콜린 파월이 국무장관으로서 보수주의자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부시와 관료들은 속된 말로 앞뒤가 꽉 막혀 있었다. 9.11 테러에 대비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테러의 징후는 계속해서 있어왔다. 알 카에다는 비밀리에 미국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입국시켜 항공기 조종 훈련을 받게 했다. 이를 먼저 파악한 것은 FBI였는데, FBI는 이를 테러리스트의 개인적인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CIA에게 테러리스트의 정보를 공유해줄 것을 요청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고 했으나 CIA가 이를 거부했다. 중동의 정보당국으로부터 알 카에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에야 CIA는 FBI와 소통하여 항공기 납치를 동반한 대규모 테러 행위가 있을지 모른다는 보고를 백악관에 제출했다. 그러나 부시와 관료들은 중동 지역에서 미국인을 겨냥한 테러 행위를 벌인다면 몰라도 미국 땅에서 대형 테러 행위를 벌일 테러리즘 단체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CIA의 보고를 무시했다. 수뇌부에서 보고를 묵살하자 FBI나 CIA 모두 더 이상 공작을 펼치기 어려웠고 그 사이 알 카에다의 조직원들은 순조롭게 테러 준비를 해나갔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13분, 모하메드 아타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아메리칸 항공 11편 여객기를 납치했다. 이 여객기는 8시 46분경 뉴욕에 위치한 제1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다. 오전 8시 43분에는 마르완 알 셰히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알 카에다 조직원들에 의해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납치되어 9시 3분, 제2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다. 제1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는 항공기 사고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거의 곧바로 제2세계무역센터마저 공격받자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한 항공기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부시 역시 백악관 비서실장으로부터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당시 부시는 플로리다 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보고를 받고도 계속 책을 읽어주다가 7분이 지나서야 초등학교를 떠났다. 8시 51분에는 하니 하뇨르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납치한 아메리칸 항공 77편을 이끌고 펜타곤을 타격했다. 한편 지아드 자라를 비롯한 네 명의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납치한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백악관, 국회의사당, 그리고 동북부 원자력발전소 중 한 곳을 목표로 향하던 중 승객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광산에 추락했다.


테러의 여파로 세계무역센터 두 곳이 모두 무너져 내렸고, 이로 인해 최소 3천 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만 하더라도 최소 6천 명에서 최대 2만 5천 명에 달하며 건물이 붕괴하며 발생한 다량의 분진을 흡입한 이들과 테러 장면을 목도하여 PTSD를 호소한 이들까지 피해자로 포함하면 수십 만에서 수백 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야말로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참사였다. 부시 행정부는 깊은 분노에 휩싸였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전 세계의 테러리즘 단체를 축출하겠다고 선언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테러리즘 단체를 숨겨주거나 지원하는 국가, 조금이라도 옹호하거나 미국의 계획에 반발하는 국가는 적으로 간주하고 보복할 것을 천명했다. 미국의 분노에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었고 북한을 비롯해 그동안 반미 노선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던 국가들도 미국에 조의를 표하는 것은 물론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심지어 알 카에다가 아닌 다른 테러리즘 단체들은 미국의 표적이 되는 것이 두려워 자진해서 미국 정부에 9.11 테러와 자신들이 아무 관련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정보기관을 총동원해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가 테러의 배후임을 알아낸 부시 행정부는 알 카에다를 보호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알 카에다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륙국이었기에 파키스탄이 육로나 하늘길을 미국에 내어주지 않는 이상 공격받을 가능성이 적었다. 게다가 탈레반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에 도취되어 미국도 이길 수 있다는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미국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판단해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알 카에다 조직원들에게 출국을 권고했다. 그러나 권고였기에 강제력은 없었고 미국의 분노만 살 뿐이었다. 파키스탄은 탈레반에게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국에 보내라고 조언했으나 여의치 않자 미국에게 영공 이용료를 받고 하늘길을 열어주었다. 파키스탄은 하늘길을 내어주는 것만큼은 거부하려 했으나 전쟁을 통해 강제로 육로를 열겠다는 미국의 엄포에 물러서야 했다. 동시에 미국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아프가니스탄을 포위하는 군사기지를 설치했다. 탈레반은 순식간에 미군에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그렇게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고 길고 긴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3. 선을 넘는 미국

개전 약 2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 전역이 미국의 손에 떨어졌다. 탈레반은 축출되었고 미군이 탈레반의 본거지를 소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하미드 카르자이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재건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군은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안정화 작업을 수행할 것을 선언하고 탈레반이 빠져나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된 아프가니스탄을 살려놓겠다고 선언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국의 완벽한 승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사실상 실패했다. 두 가지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알 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하지 못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유는 탈레반 정권이 알 카에다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미국의 최종 목표 역시 탈레반 정권의 붕괴가 아니라 알 카에다 소탕과 빈 라덴의 생포였다. 탈레반 축출은 최종 목표로 향하기 위한 중간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군은 빈 라덴을 잡기는커녕 알 카에다를 소탕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알 카에다는 미군이 탈레반과의 전투에서 힘을 빼는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가 중동으로 흩어졌다. 이로 인해 알 카에다는 중동 전역을 근거지로 삼아 규모를 더 키울 수 있었다.


다음으로, 탈레반을 완전히 축출하지 못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축출했다고 자신있게 발표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본거지는 함락되었을지 몰라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밖에도 근거지가 있었다. 탈레반은 다시 세력을 규합해 2003년 중반부터 아프가니스탄 내외에서 테러를 수행하며 미군을 비롯해 아프가니스탄 안정화 작업을 수행하던 다국적군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미국 역시 살아남은 탈레반 세력의 위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아프가니스탄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해 현대화된 군대를 양성하려 노력하는 등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안정화 작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내전까지 일어나 혼란이 계속되었다. 미국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데도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고 20년 정도가 지난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미군을 비롯한 다국적군의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다국적군이 철수하자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고 다시 탈레반 정권을 수립했다.


부시 행정부는 알 카에다의 잔당이 중동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에 분노했다.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의 다음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가 눈에 들어왔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라크 출신 망명자들의 입을 통해 이라크가 핵무기와 탄저균 등 세균전에 활용할 화학무기, 그리고 UN이 금지하고 있는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부시에게 보고했다. 부시는 즉시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침공할 것을 천명했다. 부시는 테러리즘 단체를 보호하는 것을 넘어 이제 국가 차원의 테러를 자행하기 위해 끔찍한 무기를 개발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 중동에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심어놓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반발했다. 이라크가 WMD 등 위험한 무기들을 개발하고 있다는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망명자의 말만 믿고 주권 국가를 침공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무장관이었던 파월 역시 이라크를 침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시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이라크 침공을 밀어붙였다.


부시 행정부는 망명자들의 증언을 믿고 후세인 정권과 알 카에다의 연관성, 그리고 WMD와 알 카에다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는 것이 곧 알 카에다를 소탕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과 알 카에다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할 증거가 나오지 않자 후세인을 축출해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다며 말을 바꾸었다. 이라크 전쟁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삐걱거렸지만,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운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폐허가 되었고 후세인은 도망쳤으며 이라크 전역이 미국의 손에 떨어졌다. 후세인은 훗날 미군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2006년에 처형되었다. 미군은 본격적으로 이라크를 샅샅이 뒤져 핵무기와 WMD, 화학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 애초에 없었으니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라크는 앞서 언급한 무기들 중 어느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는 망명자들의 거짓말만 믿고 이라크에 들어가 9.11 테러에 대한 분풀이만 한 셈이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의 주요 동맹국들이 만류하는 것조차 뿌리치고 전쟁을 벌였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미국은 하루아침에 세계의 경찰에서 외국의 주권을 유린하고, 지도자를 내쫓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국제사회의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애먼 곳에 분풀이나 해대는 철딱서니로 전락해 버렸다. 동맹국들은 등을 돌렸고 반미(反美)를 외치는 국가가 쏟아져 나왔다.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안정화 작업과 병행해서 이라크 안정화 작업 또한 수행하겠다고 밝혔으나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후세인이 사라지자 억눌려있던 이라크의 극단주의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곳곳에서 서로 싸움을 벌여댔으며, 테러리즘 단체가 유입되어 이라크는 테러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 미군은 무너진 치안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이라크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2009년에 미군은 이라크를 버리고 철수하기 시작해 2011년 9월에 철수를 끝마쳤다. 그러자 곧바로 이라크에 내전이 벌어졌고 오늘날까지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곳을 동시에 지옥으로 만들었다.


#4. 폭주하는 미국

부시 행정부는 민주평화가설에 입각한 정책을 펼쳐 나갔다. 민주평화가설이란 평화를 누리는 국가들이 대부분 민주 국가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나온 일종의 신념으로 독재자를 색출하고 제거하여 민주적인 정부를 강제로 수립하는 것만이 평화를 불러온다는 과격한 생각이 담겨있다. 부시 행정부는 민주평화가설을 실현하기 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공중전과 해전에 대비해 해군공군 중심으로 군사 부문의 개혁을 단행하고 세계에 흩어져 있는 미군들을 북한,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를 잇는 이른바 불안정의 호(Arc of Instability)에 재배치했다. 나아가 독재 국가를 대상으로 핵무기를 활용한 선제타격을 벌일 수 있다고 선언하고 실제로 미사일 개발과 미사일 방어체계 개발에 속도를 냈다. 부시 행정부는 세계에서 미국이 유일하게 핵무기를 탑재한 미사일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을 겨냥한 모든 종류의 핵무기와 미사일은 방어체계를 통해 막아낼 것이라 주장했다.


부시 행정부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러시아북한으로 향했다. 부시 행정부는 러시아를 상대로 압박을 가하면서도 관계 회복의 문을 열어두는 외교를 펼쳤다. 2001년 12월, 미국은 탄도탄요격미사일체계 제한에 관한 조약(ABM Treaty)을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시간이 흘러 2002년 5월이 되자 미국은 러시아에 새로운 전략적 관계를 구축할 것과 양국의 전략핵탄두를 감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전략공격무기감축조약(SORT)을 체결할 것을 요청했다. 부시 행정부는 ABM Treaty에서 탈퇴한 것을 무기로 러시아에 힘의 우위를 보여주고 곧바로 손을 내밀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 미러 관계의 개선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부시 행정부는 대러 외교에서 사실상 손을 놓고 말았다. 아쉬울 것이 없었던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동유럽 국가들의 미래를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뚜렷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면서 미러 관계는 개선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걸었다.


한편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상대로 시종일관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 이후 저자세를 유지했음에도 북한을 이라크에 이은 또 다른 악의 축으로 지목하며 신뢰하지 않았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약속한 지원을 북한에 제공하지 않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북한이 정말 핵실험을 중단했는지, 또 핵 관련 시설을 전부 폐쇄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며 북한의 주장에 신뢰성이 없다고 판단해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핵개발 시설의 봉인을 해제하고 감시 카메라를 철거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북핵 감시단을 추방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기에 비밀리에 북미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북한은 북미 불가침 협정을 통해 서로가 가진 안보 불안을 해소할 것을 요청했으나 부시 행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의 대표들과 함께하는 다자회담의 형식으로 대화할 것을 요구했다. 2003년 8월, 북한이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6자회담이 열렸다.


여느 행정부들처럼 부시 행정부 역시 동맹의 강화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가 제시한 동맹정책의 방향성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을 무조건 중심에 두고 싶어했다. 미국을 중심에 두고 여러 동맹국들을 마치 마차의 바큇살처럼 연결시켜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놓이게 하려 했다. 이를 차륜동맹정책(Hub and Spoke Alliance)라고 일컫는다. 부시는 동맹의 존재 이유는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며 동맹국들이 서로 돕게 하고, 그 결과로 나온 열매를 미국이 함께 받아먹는 그림을 그렸다. 이는 바꾸어 말해 동맹국일지라도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라크 전쟁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5. 가까스로 재선, 그리고 변화를 도모하다

오늘날 아들 부시 행정부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지만 당시 미국의 여론은 아들 부시에게 꽤 호의적인 편이었다. 9.11 테러에 대한 초기 대응과 상황 수습이 다소 어수선한 면은 있었으나 부시는 정부를 빠르게 추슬러 테러리즘 단체에 대한 반격에 나섰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한편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들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테러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미국 국민에게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대응은 시원한 사이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 이전까지 부시에 대한 지지율은 90%에 달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의 배경에 감춰진 추악한 진실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면서 부시를 향한 비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시가 주요 동맹국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부시의 리더십에 물음표가 따라붙기도 했다.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집계한 부시의 지지율은 50%를 간신히 유지하는 선에 그쳤다.


부시를 비판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하기를 바라는 반전파이거나 동맹국들의 존경을 받는 미국의 이미지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민주당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했다. 그러나 부시의 대항마로 평가받던 앨 고어가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수많은 군소 후보가 난립하는 혼란이 벌어졌다.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듯한 지지율로 엎치락뒤치락하던 판을 정리한 인물은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출신으로 반전 운동가로 전향해 인기몰이를 하던 4선 상원의원 존 케리였다. 케리는 강한 미국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외적으로 존경받는 미국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무의미한 전쟁을 멈추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자 민주당 지지자들은 물론 부시 행정부에 염증을 느끼던 이들까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케리에게 모여 들었다. 그렇게 부시의 재선에 빨간 불이 켜지는 듯했다. 그러나 하늘은 온갖 네거티브 공세로 무장하고 후세인의 체포라는 호재까지 안게 된 부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부시는 50.7%를 득표해 28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고 케리는 48.3%를 득표해 251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부시는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부시 행정부는 변화를 도모했다. 미국의 국익과 안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민주주의를 전 세계로 확산시킨다는 뼈대는 그대로 두면서도 뼈대를 채운 내용물을 바꿔나갔다. 먼저 보수주의자들과 거리를 두면서 보다 온건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부시는 군사력을 이용해 독재자를 축출하는 방식으로 주권국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던 라이스를 국무장관에 앉히고 변환외교(Transformational Diplomacy)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변환외교란 불량국가가 스스로 반성하고 행태를 바꿀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충분히 주어 무력을 통한 강제적인 변화 없이도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WMD와 핵무기의 반확산을 달성한다는 이상이 담긴 전략이다. 동시에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었음에도 행태를 바꾸지 않는 국가에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국가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기존에 행태를 바꾸지 않는 것의 결과가 전쟁으로 이어졌다면, 이제는 행태를 바꾸지 않는 것의 결과가 인간안보 차원에서 생존에 큰 위협이 되는 반인륜적인 행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부시 행정부는 주권 침해라는 비판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인류를 위한 일이라는 프레임을 방패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대선을 앞두고 터진 리크(leak) 스캔들이 큰 영향을 주었다. 리크 스캔들이란 말 그대로 새어나간 스캔들이라는 의미로 CIA 요원의 실명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즉 새어나간 것에서 스캔들이 출발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이라크 곳곳을 살펴도 무기가 나타나지 않자 주 이라크 미국 대사를 지냈던 조세프 윌슨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무기가 없는 것을 알고도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폭로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이라크에 무기가 없다는 보고를 백악관으로 보냈음에도 부시를 비롯한 관료들이 묵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보수 성향의 정치평론가였던 로버트 노박은 칼럼을 통해 윌슨이 정부에 흠집을 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칼럼에서 노박은 윌슨의 아내가 CIA 소속의 비밀요원인 발레리 플레임이라는 사실을 백악관의 고위 관료 두 명으로부터 전해들었다고 폭로했다. 윌슨은 정부가 고의로 아내의 신분을 누설했다고 주장했다. CIA는 곧바로 노박에 대한 수사에 돌입했고 부시는 특별검사를 임명해 이 사건을 수사하게 했다.


그런데 수사 결과 엄청난 사실이 드러났다. 부시의 재선을 이끈 전략가 칼 로브와 부통령 체니의 비서실장 루이스 리비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리비가 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만큼 체니 역시 리크 게이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게다가 리비는 부시가 자신에게 이라크 전쟁과 관련한 기밀을 언론에 흘려도 된다고 말했다고 폭로했다. 순식간에 부시까지 리크 게이트에 연루된 것이다.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대통령의 책사와 부통령의 비서가 합심해서 내부고발자에게 보복하기 위해 국가기밀을 함부로 누설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부시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곤두박질쳤다. 이로 인해 체니는 부시 행정부 1기 때의 위상과 권력을 모두 잃고 평범한 부통령으로 전락했으며 럼즈펠드는 덩달아 해임되었다. 내각의 보수주의자들이 몰락한 것이다. 부시 역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변환외교와 같이 다소 온건한 전략이 탄생한 데에는 생존을 위한 부시의 고민이 영향을 주었다.


변환외교는 대북 정책을 크게 바꿔 놓았다. 보수주의자들이 퇴진하고 비교적 온건한 인물들이 내각을 채우면서 덩달아 대북 온건파들도 늘어났다. 대북 온건파들은 북미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대화를 통해 2005년에 9.19 합의를, 2007년에 2.13 합의를 도출했다. 9.19 합의에는 북한이 IAEA와 핵확산방지조약(NFT)에 복귀하고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약속이 담겨 있고, 2.13 합의에는 북한이 9.19 합의를 이행한 데 따른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지원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은 2.13 합의를 통해 북한에 내려진 일부 제재를 해제하고 테러지원국에서 지정 해제하는 등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대북 강경책을 아예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북한이 위조지폐(달러)를 거래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금융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사찰과 제재를 감행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북미 관계는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변환외교는 실패작이었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듯이, 아무리 온건책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부시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였다. 1기 때의 실책을 모두 만회하기에 변환외교는 충분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변환외교는 너무나 이상적이고 교과서적인 전략이었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불량국가가 스스로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내용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땅에 추락한 미국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았고 불량국가가 개과천선한다는 스토리는 마치 위험에 빠진 공주를 이웃 나라의 왕자가 멋지게 구해낸다는 것마냥 동화적인 소리였다. 미국이 추락한 위상을 회복하고 불량국가의 태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패권을 지녔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받은 다음에야 변환외교는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결조건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변화를 부르짖으니 들이는 힘에 비해 거두는 성과는 미미했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 관료들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 악재에 악재에 악재, 잃어버린 3년 5개월

부시 행정부는 2005년 8월부터 2009년 1월까지 자그마치 3년 5개월에 달하는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악재에 악재에 악재가 겹치는 상황 속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내놓지 못하면서 진흙탕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2005년 8월 말, 강력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덮쳤다. 이로 인해 1천 명이 훌쩍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허리케인이 워낙 강력했던 탓도 있지만 부시 행정부의 실정이 불러온 참사이기도 했다. 팽창적인 외교와 잦은 전쟁, 그리고 막대한 예산을 경제 정책에 투입한 탓에 복지 분야에서 돈을 아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시민들의 방패가 되어야 할 방파제와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공공주택을 튼튼하게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카트리나가 방파제가 약하고 공공주택이 몰려있는 지역을 덮쳐 피해가 커졌다. 게다가 주로 저소득층 흑인 가구가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인종과 관련한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시는 재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늦게 대응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공화당의 정치인들마저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발언을 일삼아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인기를 잃은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은 2006년에 치른 선거에서 민주당에 상원과 하원의 다수당 자리를 모두 넘겨준 것은 물론 주지사 당선인도 민주당보다 적게 배출해 참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부시 행정부의 말년은 더욱 초라해졌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로 자신하던 경제 정책에서도 쓴맛을 보고야 말았다. 부시가 재임하던 때 미국은 전임 행정부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나은 경제지표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부동산 거품이라는 폭탄도 늘 안고 있었다. 일본의 경제위기를 보면 알 수 있듯, 부동산 거품은 독이 든 성배이기에 적절한 통제가 생명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여기에 잘 대처하지 못했고 은행들이 신용불량자에게 주택담보대출을 마구 내어주는 상황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결국 신용불량자들이 대출을 갚지 못하면서 그 부담을 온전히 떠안은 은행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이른바 대침체(The Great Recession)라고 불리는 세계경제위기가 발생했다. 세계경제위기 앞에 미국은 물론 유럽의 선진국들과 한국까지 휘청거렸고 2008년 이후 세계 경제는 전과 같은 호황을 누리지 못하고 몇 차례의 여진에 무너졌다가 잠시 반짝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부시가 이끄는 미국은 단극 체제를 유지할 힘을 잃었다. 9.11 테러 이후 세계가 테러와의 전쟁으로 단결했을 때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미국 스스로 비도덕적이고 명분 없는 전쟁을 반복해 리더십을 잃고 세계경제위기가 도래했음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해 기존의 반미 국가들은 물론 동맹국들마저 미국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 사이 러시아는 내실을 다지고 몸을 추슬러 미국과 대립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길렀고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소외받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의 파트너가 되어 미국을 대신할 대안적 패권의 위상을 다졌다. 부시 이후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통령들이 리더십의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의 실책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부시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1,020회의 휴가를 즐기며 약 1억 4천만 달러에 달하는 국비를 사용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7. 정리하며

세계경제위기가 발생하자 프랑스의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를 발전시킨 G20 정상회의의 출범을 주도했다. 이 자리에 모인 정상들은 크게 두 가지 의제를 놓고 회담을 진행했다. 하나는 세계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미국에 대한 비판이 주요한 의제였다는 사실이 미국의 추락한 위상을 잘 보여준다. 부시 개인의 위상도 끝없이 추락했는데, 올림픽이 한창이던 베이징에서 당시 러시아의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소식을 구두로 통보받은 사례가 부시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실패를 모두 부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 부시 행정부 시기 주변의 관료들과 공화당의 역량 역시 매우 부족했다. 부시가 잘못된 길로 향할 때 이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훌륭한 참모가 있었더라면 이야기는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사에 만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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