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시험평가위원의 목소리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지짐누름적은 익히기 위해 프라이팬에 올려 두고 더덕 생채를 가늘게 찢기 위해 가져간 나무 꼬치로 더덕을 가르고 있을 때였다. 누름지짐적이 익으면 형태를 유지했던 꼬치를 빼서 완성 접시에 올리고 더덕 생채는 체에 내린 고춧가루에 버무리고 미리 만들어 놓은 양념으로 무쳐내면 된다.
"10분 남았습니다."
아뿔싸! 지짐누름적에 문제가 생겼다. 지짐누름적은 불을 약하게 해서 부쳐야 하는데 센 불에 부치는 바람에 달걀옷이 눌어붙어 뒤집히지 않았다.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손이 덜덜 떨렸으나 이내 내 몸은 교육원에서 배운 것을 기억해 냉정을 되찾았다. 달걀물을 덧입히고 또 다른 과제인 더덕 생채부터 완성 접시에 담아냈다.
"1분 남았습니다." 에구머니나! 지짐누름적은 조리 과정 마지막에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게 나무 꼬치를 살살 돌려서 빼내야 한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은 일 분밖에 없다. 왼손으로 조리된 지짐 적을 꽉 잡고 오른손으로 꼬치를 집어 순간적으로 힘을 줘 확 빼버렸다. 모양이 흐트러졌지만 대충 손으로 매만지며 완성 접시에 올려 거의 30초를 남겨두고 평가 칸막이를 통과해서 제출했다.
정년퇴직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누구나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동안 오랜 시간 직장에 매달려 살던 사람이 일과 직장을 떠나서 일상생활을 독립적으로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오십이 넘은 퇴직자들은 수많은 ‘삼식이’로 전락한다. 삼식이는 스스로 밥을 챙겨 먹지 못하고 아내에게 하루 세끼를 챙겨달라고 하는 남편을 일컫는다. 결국 아내는 평생 밖에서 생계를 책임져온 남편을 처음에는 '측은지심'으로 대해주다가 나중에는 '골칫거리'로 생각한다. 주위에 미리 퇴직한 선배들이나 동료들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아내로부터 눈칫밥을 먹으면서 그럭저럭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낸다. 그래서 시작한 게 바로 '삼식이 탈출 프로젝트'이다.
제일 먼저 나 같은 직장인을 위해 주말 과정을 운영하는 접근성 좋은 요리학원을 찾아봤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조건이 맞고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요리학원이 있어 상담받았다. 그런데 수강생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말에 ‘그 세계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주눅이 들어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나 며칠 고민 끝에 ‘그래 부딪쳐 보는 거야’ 마음먹고 용감하게 ‘국민 내일 배움 카드’로 긁었다. 이 카드를 통해서 거의 반값에 등록하고 '삼식이 탈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칼을 쥐는 방법과 냄비 밥을 짓는 방법부터 배웠다. 학원에서 처음 음식을 만들 땐 매우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나게 먹는 것을 보면서 보람도 생겼다. 비록 “먹을 만하다.”가 최고로 큰 칭찬이었지만 더 잘하고 싶은 동기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2년간 주말마다 이어졌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이라 쉬고 싶을 때도 있고, 지인들 모임 약속과도 충돌이 있었지만 거의 빼먹지 않고 요리 수업에 참여했다. 결국 5개 과정(종합 기초, 한식 초급, 국 찌개, 카페 브런치, 일본 가정식)을 작년에 마쳤고 회사는 작년 말로 명예퇴직을 했다. 처음에는 잠시 쉬었다가 다른 회사에 지원하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아는 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조건을 낮춰서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류전형조차도 통과하지를 못했다. 그러던 중에 깨달은 것은 이제까지는 '할 수 있는 것'을 했다면 앞으로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재취업 교육기관인 '서울 동부기술교육원'에서 조리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을 운영하고 재취업까지 소개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울 동부기술교육원'에서 조리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을 운영
서울 동부 기술교육원 관광 조리과의 요리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업은 재취업을 위한 과정이다 보니 취미로 했던 요리학원의 주말 과정과는 전혀 달랐다. 평일(월~금) 내내 하루 종일(9:00~16:10) 이론과 실습을 병행한다. 5개월 동안에 한식조리기능사, 중식조리기능사, 양식조리기능사, 그리고 떡 제조기능사 취득이 최종 목표다. 다행스럽게 필기시험은 한 번 만에 모두 합격했다. 다음 단계는 실기시험이다. 한식은 총 31개 요리 중에 2가지가 출제된다. 일상생활에서 늘 먹던 비빔밥이나 무생채, 두부조림에서부터 이름도 들어보지도 못한 섭산적, 탕평채, 홍합초 등을 요리 선생님의 설명과 시연, 그리고 따라 하기를 한다. 꾸준히 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고 있었지만,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과정은 꽤 어렵게 느껴졌다. 모든 요리의 조리법을 완벽하게 알아야 하고 요리마다 요구하는 규정을 지켜 제한 시간 안에 제출해야 한다.
삼십년 동안 책상에 앉아서 근무했던 몸이 하루 종일 서서 요리하게 되자 쉽게 피로해졌다. 저녁이 되면 허리와 다리에 통증이 몰려오고 잠이 쏟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당일 배운 요리 과정을 머릿속으로 복기한 후 동영상으로 조리요령을 꼼꼼하게 챙겨보았다. 주말에는 시장에서 재료를 사서 학원에서 배운 요리를 꾸준히 실습했다. 직접 오징어와 동태를 사서 오징어볶음, 동태 전, 동태찌개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정육점에서 홍두깨살 600그램을 사서 포 뜨기와 채 썰기를 연습하기도 했다. 교육원 실습중에 밥을 태우는 실수를 해서 그날 이후로 일주일 동안 매일 밥 짓기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 동안 머리로만 일하던 터라 조리법을 외우는 과정은 어렵지 않지만, 몸으로 익히는 과정은 오로지 연습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보니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다시 연습했다.
31가지 요리를 교육원에서 3번 정도 실습하고 다시 집에서 최소한 2번 이상은 자가 실습을 해서 실기시험을 보기 전까지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시험 보기 전날에는 시험장과 같은 환경 속에서 모의시험까지 치르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 당일 주어진 과제는 '지짐누름적'과 '더덕생채'였다. 지점누름적은 실습 시간에 몇 차례 실패했던 경험이 있어서 다른 과제보다 더 많이 연습을 한 과제이다. 그리고 더덕 생채는 시험을 보기 며칠 전 강원도가 고향인 친구로부터 더덕 선물을 받아 두 과제 모두 부담 없었다. 하지만 낯선 시험장 도구들과 분위기 때문인지 제한 시간을 임박해서야 완성 그릇 두 개를 가까스로 제출했다. 시험장을 나오는 길은 홀가분하기는 했지만 영 지짐누름적의 완성상태가 마음에 걸려서 '한 번 더 시험 치르면 되지 뭐~' 하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 사이 몇 주 전 교육원 지도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채용정보 중에 '서울시 교육공무직 조리실무사'에 지원했던 것이 신경이 쓰였다. 조리사 자격증이 필수 요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 취업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교육원에서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식조리기능사 발표를 각자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클릭했다. 여기저기서 환호와 함께 한숨도 뒤섞여서 들렸다. 나도 확인해야 하는 데 자신이 없어 주저하고 있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화면을 누르고 점수를 확인했다. '합격'이라는 글자에 깜짝 놀랐다.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지만 불합격한 같은 반 수강생들도 있어서 조용히 속으로 '아자, 아자!!!'를 외쳤다. 자격증 발표 다음 주, 서울시 교육공무직 조리실무사 1차 결과도 '합격 통보'를 받아서 당당하게 자격증 사본을 제출했다. 내 인생의 2막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은 다시 시작하는 인생의 지렛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