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두에 가는 리더에게 불안한 목소리가 전달된다. 등산 내내 귀에 피가 나도록 반복해서 물어본다. 백패킹에 참여한 회원들 어깨에는 20킬로그램짜리 박배낭이 힘겹게 걸려있다. 완만한 등산로를 올라가더라도 박배낭 무게 때문에 몸 안에 비축해 있는 모든 에너지를 뽑아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오르는 길은 탐방로가 아니다. 정상적인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산꾼들은 사람이 다니기에는 힘들고 산짐승들만이 겨우 다닐 수 있다고 해서 '짐승길'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경사도는 깔딱 고개 수준으로 경사져 있다. 그래서인지 여성 총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의혹이 짙어지면서 짜증의 뉘앙스가 더해진다.
11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은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서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없는 길을 헤쳐나가면서 가시넝쿨의 날카로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후미에 따라가던 회원은 힘에 부쳐 철퍼덕 주저앉은 채로 원망의 레이저 눈빛을 마구마구 발사한다.
백화산(해발 933m, 한성봉)은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바위가 많고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산이다. 다행히 오늘의 박지(텐트를 설치하고 잠을 자는 곳)는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고, 중간즈음에 위치한 활공장이다. 과거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어 간혹 백패커들이나 방문하는 곳이다.
한 달 전쯤에 밴드 동호회 공지에 '360도 뷰, 시원한 전망, 야경, 운해'라는 글귀와 더불어 기가 막힌 운해가 주위를 둘러싼 멋진 사진이 올라왔다. 위치가 충청도 끝자락이다 보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멋진 사진에 혹해서 '참석' 버튼을 과감히 눌렀다.
'360도 뷰, 시원한 전망, 야경, 운해'
백화산 집결시간은 오후 1시였으나 서울팀은 일찌감치 아침 7시에 만나서 출발, 충청도팀과 금강휴게소에서 조인해서 여유 있게 점심식사를 하고 들머리에 도착했다. 고개를 돌려 왼쪽 산을 올려보니 깎아지른 듯한 산등성이가 우릴 내려다보고 '어서 올라오라고' 손짓한다.
가까스로 오른 박지는 역시나 밴드 공지에서 안내해 준 것처럼 사방이 탁 트였다. 저 멀리 이름 모를 산들이 사방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뻥 뚫려있는 시야와 사방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에 그동안 도심에서 쌓아온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준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쉘터 위치를 잡고, 각자 텐트를 후다닥 설치한다.
늦가을의 계절에 비예보까지 있었지만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여도 봄날씨로 착각할 정도로 햇살이 따뜻하다. 자연스럽게 쉘터 안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밖에 테이블을 설치하고 캠핑의자에 둘러앉아 납작 만두와 호떡으로 '오늘의 캠핑요리'를 시작한다. 먹고, 마시고, 깔깔대며 이야기하는 동안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공간이 도심 속 생맥주집이 아니라 산속 오백미터 고지 위의 공터이다 보니 마음이 더욱더 편안해진다. 산에도 어둠이 내려 달이 떠오르고 저 멀리 동네 가가호호에는 불빛이 켜지면서 밤이 깊어진다. 6개의 텐트에도 LED 등이 꺼지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눈을 감자마자 빗방울이 텐트 지붕을 '두두둑' 두들긴다. 내일 하산길이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 잠시 빗방울 소리를 감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