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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대 Apr 07. 2021

으뜸가는 탑 셋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기념 풍경Ⅰ

비장하다. 기념은 이 비장함에 다가가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갑오년 내내 계속되어 그해 겨울을 겨우 넘긴다. 수많은 현장을 남겼다.


여러 기념지 중에서 빼어난 셋을 골랐다. 이중 첫째 것은 승전의 기념이요, 나머지 둘은 패전의 위령이다.



1.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동학농민혁명 70주년을 한해 앞둔 1963년 가을, 기념탑이 정읍 황토현 전적의 황토재 옆에 한달 여만에 건립되었다.


이 탑은 3가지 “최초”라는 수식이 붙는다. 최초로 승전하였고, 최초로 "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기념탑으로서는 최초인 것이다. 이때는 아직 "농민"이 포함되지 않았다.


언덕 위에 자리한 탑 좌우로 작은 비문석과 부조벽도 들어섰다. 높이 7.5m 되는 탑신은 8각 수직 기둥이다. 탑신의 가장자리를 마치 단단하게 묶듯이 돌의 테두리를 둘렀다. 각지게 되니 더 힘차 보인다.

황토현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승전 기념인데도 어떠한 자축 분위기는 없다. 과묵하리만치 탑은 담담하게 또 분명한 형태를 갖추었다. 잔 기교도 보이지 않는다. 직선이 주는 듬직함을 당당히 밝힌 듯하다. 


이 기념 자체가 첫 승전을 통해 추구하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리라.

 

비문은 밝히고 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과 척양을 기치로 … 갑오동학혁명은 … 농민 대중을 안아 들여 우리 역사상에 처음 보는 대규모의 민중 전선을 이룩하고 위국위민의 뚜렷한 지도이념 밑에서 줄기차게 싸웠던 것이니 … 농민 대중에게 정치적 의식을 깨우쳐주었으며 고루하고 불합리한 봉건체제의 낡은 권위를 뒤흔들어 국민생활의 근대화를 촉진시켰고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민족전선으로서 항전하여 우리의 민족정기를 현양 시켜 뒷날 3·1 운동의 선구를 이루었다. …"

탑신의 전서체  除暴救民 保國安民(제폭구민 보국안민)

탑신의 전서체가 모던한 구성을 이루어 전체와 조화롭다.


탑 우측 부조벽에는 전봉준과 농민혁명군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과한 동작은 드러나지 않고 그저 성난 표정 중심으로 부각되었다. 어떤 사족도 없이 모두가 일체감을 보여준다.

탑 우측 부조와 탑신 이면 하부의 두 노랫말

탑신 뒤 하부에는 두 노래가 새겨졌다. 서툰 듯한 한글 서체가 정이 간다. 노랫말이 처연하다. 특히 두 번째 노랫말은 갑오(甲午), 을미(乙未), 병신(丙申) 순을 따라 토속 민요조로 부른 셈이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보리"



2. 우금치 동학 혁명군 위령탑

이곳은 패전의 현장이다.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이 황토현에 건립된 지 10년 만에, 격전장이었던 이곳 우금치 기슭에 동학 혁명군 위령탑이 세워졌다.


크게 보면 수직형으로 두 탑의 형태가 닮았다. 일곱 개 석판을 쌓아 만든 탑신도 비슷하다.


다만 디테일이 다르게 드러난다. 또 기단부 처리가 별개다. 게다가 탑명을 내건 방식이 다르다.

우금치 東學革命軍慰靈塔(동학혁명군 위령탑)

탑 높이 약 8m. 갑옷을 입은 듯 탑신에 판석을 겹으로 둘렀다. 단단해 보인다.


그런데 탑 바로 뒤 둥근 황토벽의 봉화대가 자리하였다. 수직선에 가까이 곡면이 있으니 전체 모양새가 어색하다. 탑과 조화롭지 않고, 너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공주 우금치 전적과 동학혁명군 위령탑

탑 기단부의 앞뒤로 건립문과 감사문을 새겼다.


전면 오석판의 탑 비문 일부,

"…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 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그런데 1985년에는 비문의 일부 문구(5·16 혁명, 10월 유신, 박정희 대통령 등)가 훼손되기도 했다.

동학혁명 위령탑 탑 비문(전면), 봉화대 속에서 본 연돌, 탑 비문(후면) 감사문

탑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황토현 현장이 펼쳐진다. 텅 비었다. 기슭에 비틀어진 나무 장승 여럿이 뭔가 할  말이 있는지 기우뚱거린다.


우금치에서만 두 차례 격전이 7일 동안 이어졌다. 동학혁명군 2만 6천 명이 전사하지만, 일본군은 단 1명 전사란다. 


26,000:1


이것은 전투가 아니다. 살육이다!



3.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최후의 보루였던 북실전투 현장 인근이다.


북향 산비탈 숲 속에 탑이 홀연히 서 있다. 여기 드넓은 기념공원에는 조형물과 관련 시설이 전시하듯 배치되어있다.

위령탑으로 오르는 통곡의 계단과 배경 조형벽

주차장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면 성벽과 민중의 광장, 그 옆으로 돌담 사이 좁은 계단이 옥죄듯 이어진다. 모두 109단. 이름하여 "통곡의 계단"이다. 그 정점에 위령탑이 가만히 나타난다.


현실에서 거룩한 곳으로 다가가는 공간적 전개 과정을 이루었다.

탑 높이 약 17m. 직사각형 탑신이 모서리를 두고 섰고, 그 아래 일부를 드러냈다.


그 천장이 뚫리어 조각하늘이 있다. 꼭대기에는 동학의 여러 슬로건이 새겨졌다. 그리고 앞에 동상.

위령탑 탑신과 공원 내 전봉준의 유시 비석

위령탑 건립문,

"… 초저녁 종곡리 북실마을에 도착한 동학군은 주먹밥을 먹고 모닥불 옆에서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밤에 누가 공격해 오겠는가?' 긴장을 풀고 모처럼 만에 휴식에 들어갔다. 밤이 깊어졌을 때 상주에 있던 일본군과 청주에 있던 관군이 연합하여 눈 속을 뚫고 기습공격을 해왔다.


치열한 전투는 그 이튿날 오후까지 계속되었고 동학군 2,600여 명의 피가 눈 덮인 하얀 북실 뜰을 붉게 물들였다. …"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의 동상

사실적으로 표현된 두 사람은 쓰러지고 울부짖고 …. 하늘을 원망하는가? 아니 복수를 맹세하는가? 동학은 "인내천"이라  …. 상황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세 탑 모두 뛰어난 모양새이다. 저마다 나름의 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먼저 죽은 이를 위로하는 예와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한 사실을 허식이나 기교 없이 전하면, 비로소 탑은 기념이 되고 위령도 가능해진다.


더하여 비장미를 느껴야, 과거로 다가갈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도 그 소중한 가치를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념지(건립 순)

1.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1963년 10월 3일 건립,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 3, 건립 추진위원장: 이병기, 명문: 김상기, 탑명 글씨: 송성룡, 전액 글씨: 김상기, 제작: □□□

2. 우금치 동학 혁명군 위령탑: 1973년 11월 건립,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327-2, 제자: 박정희, 탑 비문 글: 이선근, 글씨: 양재한, 탑 설계 감수: 정인국

3.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2007년 탑 건립~ 2015년 위령탑 정비,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산 16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문안: 시인 문병학, 설계 및 제작, 조각: 이두한, 배승현, 김남운, 김동숙, 조경: 에버 조경, 조명: 대신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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