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과 희생과 분노! 그리고 다시 ….
동학농민혁명의 기념지 중에는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극적인 현장도 있다. 당연할 수도 있지만, 몇 살펴보자.
1.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정읍시 고부면 주산 대뫼 마을회관 앞에 위령탑이 조성되었다.
작은 비림을 이루었다. 크고 작은 비석과 돌조각에 얼굴과 문자는 물론 낫과 죽창까지 새겼다. 그 모양은 여럿이지만, 한결같은 열망에 모여 서 있으니 더 큰 힘을 분출하는 듯하다.
그 가운데 탑명을 새긴 큰 석탑이 앞서듯 당당하다. 불안정하나마 격한 모습이다.
정읍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정면 부분 건립기에 밝히고 있다. "1894년 정월 고부 농민봉기와 삼월의 백산봉기는 우리의 민권을 위한 농민항쟁 …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바로 우리 민족의 귀감이요 또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 ".
이곳은 위령탑 치고는 매우 독특하다.
장소부터 파격적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영령을 만나는 자리가 여기에서는 일상이 되었다. 기존 형식을 벗어났다. 격식도 던져버린 듯하다.
그만큼 이 위령은 우리 의식 가운데 제대로 자리해야 한다는 명령 같다.
그런데 가신 임들을 기리는 자리치고는 너무 맹렬하지 않은가.
2.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조형물
찬란하다.
만석보 혁파 선정비를 모신 전통 비각 옆에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부터 정리하고 여러 조형성을 갖추었다. 이곳은 만석보 유지로 가는 길목이다. 서로 어색한 풍경이 되었다.
만석보 혁파 선정비각, 동학농민혁명 최초봉기 상징조형물 작품 설명,
"전체적인 형상은 보름달과 이를 받치고 있는 세 개의 날개, 그리고 그 아래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로 구성되어 있다. 보름달은 봉건적 질서에 억압받던 동학 교인과 농민들의 삶에 희망의 빛이 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표현하였고, 새로운 세상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보름달을 받치고 있는 날개는 외세의 침략과 수탈 속에서 피워낸 농민들의 자주독립 의지가 세상에 펼쳐지는 형상을 나타내며, 그 아래 거대한 그림자는 동학농민군이 꿈꾸던 반봉건 반외세 의지가 전국화 세계화되는 것을 상징한다."
상징 조형물이라 그런지, 상징과 메시지가 여럿이다.
간추리면, 보름달= 의의와 희망, 날개=의지 펼친 형상, 그림자=의지의 전국화, 세계화.
흔한 형태가 나름 큰 의미를 지니다 보면, 자칫 너무 비약적이 되기 십상이다.
설명을 제대로 납득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경우가 드물다.
그래도 조형 의도이니 이해할 수밖에 없긴 하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 나름대로 이해할 뿐인데. 설명 없이 알아볼 수만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조형물 부분 항쟁과 희생의 사건을 기리며 그 정신을 우러러보는 기념은 경건해야 한다. 물론 분노도 아울러야 한다. 더불어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리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일부는 분노를 너무 강조하고 과시하고 있다. 마치 현장학습식으로 푸는 듯하다.
특히 위령이라면, 희생정신을 숭고미로 승화시키는 격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동학농민군 생매장터
생매장이라니…. 끔찍함이 이 돌비에 배어있는 듯하다.
크기가 고작 사람 키 정도인데, 온갖 통한을 다 품고 있겠다. 새김 돌이라 자칭한 이 돌비는 그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앞뒤 면만 대충 다듬고 글과 그림을 풋풋하게 새겼다.
그런데 예를 드릴 자리조차 없다. 예천 공설운동장 시설을 겨우 비켜난 한천 비탈이다.
동학농민군 생매장터 새김 돌 정면 비문은 호소한다. “… 예천 동학농민혁명군 쪽은 우리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뭉쳐 왜를 무찌르자고 호소하였으나,
보수 집강소 쪽은 오히려 갑오년 음력 8월 9일 농민군 열한 사람을 붙잡아 이 부근에 생매장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
왜 이런 대우를 받는지 안타깝다. 혹시 아직 검증되지 못한 일방적인 역사인가?
그래도 허식을 비웃듯 비는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냉대가 별수냐 하듯이….
떠나며 다시 보니, 얼핏 사람 형상이다. 넘어질 수 없다는 듯 겨우 서있다.
4. 동학농민혁명 삼례 봉기 역사광장
삼례 지역의 공공시설지 진입부 좌편에 여러 기념물을 펼쳐놓았다. 녹지 속 기념공원 같다.
진입부의 등신대 기둥의 오석 부분에 집강소 통지, 삼례 제2차 기병, 삼례 뜰에 집결하는 농민군, 북상하는 농민군 등의 글과 그림을 줄지어 새겼다.
중앙에 대동의 장은 농민 군중 운집의 터를 재현하였고, 추념의 장은 농민군의 넋을 위로하고 또 인내천 사상을 인식하게 하는 사유의 장이라 한다.
안쪽 동학농민혁명 봉기 비는 높이가 7m는 됨직한 통돌이다. 서체가 뚜렷하다.
바깥쪽 동학농민군 출진 상은 거든다.
"10월의 삼례 농민봉기는 … 10만여 동학 농민 의병은 주적을 관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고 오직 애국 단심·구국의 일념으로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이곳 삼례에서 북진을 시작하였다. "
농민군 4대 명의를 큼직한 돌에 새겼다.
"1.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4. 군사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앤다."
단주의 새김 그림, 동학농민군 출진 상, 추념의 장 천장 그리고 정면의 조형물인 「힘 - 하나 되어」는, "민초 농민들의 뜻이 하나로 결집된 의지의 기치, 또는 이상의 푯대, 힘을 상징한다." 그리고 아래의 돌무덤 형식은 "누구든 소망을 담은 돌을 얹어놓는 행위를 통한 무한 다수 공동제작의 개념 참여의식이 발현에 의한 지속적인 확산과 계승을 의도"하였다.
제시하고 동참을 바라는 방식이다.
흔하지 않은 형태가 초인간적으로 크질 때, 깊은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다. 다만 동감하여 긍정적인 호응을 얻어야 비로소 기념으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조형물, 「힘- 하나 되어」 무딘 갈퀴의 쇠스랑과 움켜잡은 손이 거대하기만 하다. 시대가 어수룩하면 언제든 튀어나올 것 같다.
5. 녹두장군 전봉준 관
전봉준 장군 피체, 그러니까 잡힌 곳을 기념지로 조성하고 유적비도 세웠다.
커다란 자연 비석을 떠받치는 좌대가 모양을 내고 황동색 설명판을 끼웠다. 글자 하나라도 분명히 보여주려는 듯.
유적 비문은 설명하고 있다. "… 이곳 피노 리에 피신 중 당시 고부군 달천면 달천리(현 정읍시 덕천면)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
전북 정읍 사람이 밀고한 탓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남 순창 사람 탓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는 듯. 지역감정을 너무 의식한 것인지.
전봉준장군 피체 유적비, 창의문을 선포하는 전봉준 장군 바로 옆 작은 한옥 전시관 앞 3인 상도 황동 빛에 매우 사실적인 행색이다.
탄식은 무덤덤한 바위가 다 아울렀다는 듯이, 동상은 그저 예찬하는 분위기를 내세우고 있다.
안타까움을 찾아보긴 어렵다.
관련 기념지(건립 순)
1.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1994년 9월 11일 건립,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618 주산 마을회관, 제작: M조형환경연구소 김운성, 김서경, 김병철, 동용선, 미성 석재 김동철, 안재환, 김흥배
2.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조형물: 1994년 건립,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 제작: 나루
3. 동학농민군 생매장터: 1999년 8월 건립,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186 예천 공설운동장 한천 변, 글: □□□, 글씨: □□□, 제작: □□□
4. 동학농민혁명 삼례 봉기 역사광장: 2004년 10월 10일 조성, 전라북도 완주 삼례읍 삼봉로 215-12, 글: □□□, 작가: 배승헌
5. 녹두장군 전봉준 관: 2005년 5월 4일 건립,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길 65-29, 조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