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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대 Apr 05. 2021

대한제국의 영욕

1863년 고종 즉위에서 1910년 국권피탈까지의 몇 기념풍경

격동의 시기였다. 

드러난 사건 몇 이어지고 끝내 나라는 기울어져 갔다.  그 속내는 더욱 비통했으리라!


오늘날 그 굴욕과 통한의 면면은 흩어져 기릴 뿐이다. 자축, 한탄 그리고 비분….

이 시기 큰 사건에 연루된 그리고 대표적이라 할만한 기념물과 장소와 인물을 몇 추렸다. 어떻게 기리고 있는지 돌아보자.



1. 고종 즉위 어극 40년 칭경 기념비

어수선하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지나친다. 조선의 마지막 건물인 기념비전은 21C 서울 도시 상황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듯하다. 비는 움츠리듯 들어앉았다. 갇힌 것인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섬세한 격이 드러난다. 건축과 공예는 최고 수준급. 섬세한 만세문의 무지개 돌 아치가 귀태를 보여준다. 화려하다.      

고종 즉위 어극 40년 칭경 기념비와 비전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고종 황제 칭호를 축하하는 전통양식의 기념비. 그런데 이게 허상이란 말인가. 기념비의 진정성, 비전의 심미성이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현대 대한민국의 번잡한 정치환경 탓인가? 아니면 150여 년 전 대한제국의 허울인 탓인가?     

 

광화문광장은 또 바뀌고 있다. 혹시 이번엔 이 칭경 기념비의 격을 제대로 돋보일 수 있을지.

영욕을 떠안은 채 기념비는 그저 이 세상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데….



2. 김옥균 선생 유허와 추모비

아산시 유허는 옛 서울, 한양을 향한 듯, 자리부터 북향이다. 낮은 언덕 그 너머는 다른 동네일 뿐. 

아산시 김옥균 선생 유허,  공주시 고균 김옥균 선생 추모비

선생이 암살된 지 20년 만에 일본에서 김옥균의 옷과 머리카락을 모셔와 이장한 이후 다듬어져 지금에 이른다. 작은 무덤에 망주석, 석등, 석양, 문인석 그리고 비를 겨우 갖추었다. 낱낱이 그래도 짜임새가 왠지 어수선하다. 

요즘 말로 가짜 뉴스일 법하나, 그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사지가 전국에 흩어졌다고 했다. 한은 지금도 서울을 향하고 있다, 비록 복권되었다 하나.     

묘소 자체는 기념물로 대하기 어려우나, 이곳은 뭔가 색다르다. 


공주시의 선생의 옛 집터는 흔적이 없다. 마을도 마찬가지. 비어있다. 아니 어떤 기운이랄까 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지. 전통양식의 추모비가 빈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저 스산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갑신정변 그리고 김옥균, 닿는 대로 상상할 수 있기에 부담 없는 기념지 아닌가.



3. 고종의 길

이렇게 주제에 맞을 수가! 

덕수궁 쪽에서 들어서면, 길은 극과 극으로 꺾어지고 오르고 궁극에 문을 나서면 곧장 내리막 비탈이다. 아니 이곳이 시작점인가. 

고종의 길

도피하듯 서두르는 길인데 짧은데도 이렇게 돌아가니, 멀고도 멀었으리라. 게다가 비난과 허탈을 한 몸에 받았을 창피함 아니던가.     


폭은 거의 3m에 길이 120m의 담장 길이다. 새로 만들었고 행인이 드무니 너무 깨끗하다. 여기에서는 길을 보여주기 위해 담이 생겼다. 모양새는 나름 탄탄하다.  

    

이 길이 아관파천을 기념하지는 않는다. 옛 현장 하나를 재현했다. 그리고 고종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단편적이다. 재현은 그 시대 상황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구실을 줄 뿐이다. 그저 상상해야 한다. 이 길에서 일어난 그 상황은 우리에게 얼마나 교훈적 일지. 



4. 환구단 시민광장

대한제국의 가장 상징적인 그래서 존엄한 장소이다. 석고의 존재 자체가 그나마 다행스럽다. 

환구단 석고와 안내 조형물

그런데 현대화에 부대끼어 이제 광장이라기보다 틈새 공간 같다. 시청광장 쪽 입구의 작은 옥외광고물이 눈에 띈다. 석고의 형상을 모티브로 한 경우다. 흔한 기법의 하나. 이때 필요한 것은 다만 본래의 것을 존중하고 그 아래에 드는 겸손함이다. 자칫 주객전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광고물 자체가 작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환구단 석고는 기념조형물로서 칭경 기념비와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였다. 석고는 악기를 형상화하여 몸통에 용무늬를 새겼으니 당대 최고의 조각이라 한다. 시대의 영욕과 회한을 잠시 벗어나게 만든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1902년의 기념 행위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5. 국치의 길과 거꾸로 세운 동상

국치의 길은 서울 남산의 예장자락 일대 1.7㎞의 역사 탐방길이다. 그중 일제 통감관저 터를 기억의 터로 명명하고 일종의 야외전시장이 되었다. 대지예술 방식처럼 지형변화를 주어 주제 공간으로 조성한 것이다.

거꾸로 세운 동상

이곳 중앙에 높이 약 2.7m 거친 석판 셋이 엉거주춤 물려 섰다. 얼핏 보면 석관을 세워 놓은 것 같다. 이제는 없는 동상의 이름만 바닥 유리면에 반사되어 검게 보일 듯 말 듯한다. 한편에 내건 금속의 설명 판이 너무 친절한지 더 빛난다.      

거꾸로 세운 동상과 국치의 길 부분

거꾸로 세우는 발상은 역전시키는 것이니, 뒤집어 반전을 기하는 의도이다. 이는 한 사건의 기념물 자체를 다시 기념화한 방식이다. 이럴 경우, 더 강화하고 가세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정반대로 그 사건을 부정하고 단죄하였다. 따라서 기존 기념물 자체를 “처리”한 것이다. 물건을 다루었으니 그나마 실감이 난다.



6. 충정공 민영환 선생 동상

푸대접을 많이 받은 동상이다. 지금 겨우 자리한 이곳조차 피난처도 아니고 을씨년스럽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 동상

선생의 동상은 그런 처우를 아는지. 기단을 에워싼 대나무 형상의 난간이 대죽의 주제를 조심스레 말해준다. 8각 기단은 나름 솟았다. 자필 유서를 원본과 한글로 각진 기단에 돌려가며 새겼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 동상 비문 자필 유서

뒷 구석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모습이 그때 선생의 심정 아니겠는가!



7. 충정공 민영환 어른께서 자결하신 옛터

옛터 가까이 번화한 도시공간의 중앙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기념조형물의 형태도 독특하다. 

충정공 민영환 어른께서 자결하신 옛터 조형물

대나무가 작게 조형된 문짝 형태의 틀을 배경으로 상징적인 소품- 모자, 의복, 칼, 단검 등이 구성되어 선생의 흔적을 이루고 끝내 그 너머 정신적인 것에 이르게 만든다. 선생의 충정을 혈죽으로 나타났다 했으니, 이 작은 대나무가 그 절죽이라고 믿게 한다.


비분강개를 공감하고 싶은데…. 비장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기념조형물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장 속에 뛰어들었다. 



8. 면암 최익현 선생 상

면암은 한말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대례복의 초상화가 있는 덕인지, 그의 동상은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기품도 느낄만하다.

청암군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 포천시 면암 최익현 선생 상

칠갑산 도립공원과 청성 역사공원 두 곳에 면암의 동상이 있다. 좌상은 비슷해도 좌대의 높이와 형태가 다르다. 

칠갑산 것의 좌대는 높이 3.6m에 칠각형 기둥이다. 칠갑산이라고 7을 모티브로 했다 한다.

청성 것의 좌대는 높이 1.2m에 옆면이 기울어져 있어 금석문을 읽기 편리하다. 


높게 세운 상과 눈높이로 낮춘 상. 어느 쪽이 더 면암의 기개를 더 잘 보여주는가? 그리고 존경심을 가지게 하는가? 기념 효과는 작은 데서 갈리기 십상이다.



9.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은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건물과 공간을 보존하는 것만으로는 아쉬웠던가. 결국 이 역사적 현장은 무대가 되었고 여러 소품으로 가득 채워졌다. 을사늑약의 전시장이다. 

중명전과 을사늑약의 현장 재현 전시

연출 자체가 기념이 될 수 있는지 되묻게 한다. 박물적 연출은 기념이라기보다 그저 재현이다. 물론 상상하기에 편리할 것이다. 다른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재현 무대를 관람하면서 스스로 어떤 감정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 그래서 어떤 생생한 교훈을 얻을지 궁금하다.



10. 순종황제 어가길,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대구 달성공원 정문에 이르는 중심가로 복판 약 150여 m에 포석을 깔고 여러 조형물이 들어섰다. 그 마지막 정점에 금빛 나는 동상이 우뚝 섰다. 주변을 압도한다. 

     

주관 측은 “상징적으로 재현하여 굴욕의 역사를 미래지향적으로 승화시켜 역사적 교육공간으로 활용”이라 하고, 나아가서 다크 투어리즘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반대 측은 역사 왜곡과 친일 역사 미화 문제를 제기하며 철거를 주장하고 있다. 

조성된 지 4년이 지나는데, 논란은 여전하다.     

순종황제 어가길

표제석에 새겼다,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 이곳에 세워진 순종황제의 조각상은 당시를 재현함이 아닌 황제 즉위식의 근엄한 모습으로, 암울했던 시대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담아내고자 한다.”  

   

더하여 작은 표석에 제작 의도를 밝히고 있다, “남순행 당시 순종의 복장은 제국 군복이었으나, 백성을 걱정하는 왕의 마음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근엄한 대례복을 입은 모습으로 설정하였고, … 본 작품은 순종의 업적을 기리기보다 치욕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소망하는 상징조형물이다.”

순종황제 어가길 동상

아예 조형물로 내세웠다. 기념물이 아니니, 역사적 논쟁거리가 아니라는 주장 같다. 그러면 사극 무대가 된 꼴이다. 


그렇다면 기념 풍경도 되지 못하는가? 순수한 의도에 상징 기법을 써서, 기념지를 조형물로 각색하여 과거를 극복한다는 공식은 가능하다. 「거꾸로 세운 동상」도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석연찮다. 


우선 이 길이 다크 투어리즘의 자원으로서 그 가치가 충분한 지 회의적이다. 1909년 당시의 암울했던 현실의 아무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21c에 만든 상징조형물뿐인데, 과연 연결고리가 될지 아쉽다.

더하여 아무래도 관중의 눈높이를 너무 미숙하게 여긴 것은  아닐지.


동상은 표정조차 너무 당당하다. 과연 그때 이 행차 길에 끌려왔던 순종황제는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관련 기념지(건립 순)

1. 고종 즉위 어극 40년 칭경 기념비: 1902년 건립,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68, 비 양 글씨: 순종

2. 김옥균 선생 유허: 1914년 이장, 1976년 12월 6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3-1 지정, 1993년 묘역화 조성(옷, 머리카락 안장),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고균길 41

3. 충정공 민영환 선생 동상: 1957년 안국동 로터리에 건립, 1970년 율곡로 돈화문 입구로 이전, 2003년 현 위치 이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 글: □□□, 글씨: □□□, 조각 □□□

4. 면암 최익현 선생 상: 1973년 12월 모덕사 이전, 재건립, 충청남도 청암군 정상면 마치리 523-5 칠갑산도립공원 칠갑광장, 글: □□□, 글씨: □□□, 조각 □□□

5. 충정공 민영환 어른께서 자결하신 옛터: 1986년 8월 29일 조성,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5길 41, 글씨: 김충현, 조각: 백문기

6. 고균 김옥균 선생 추모비: 1989년 2월 22일 건립,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 생가지, 비석 글: 최창규, 글씨: 김응현

7.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 1999년 12월 건립,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포천로 1494 청성 역사공원, 글: □□□, 글씨: □□□, 조각: 김광우

8. 환구단 시민광장: 2000년 10월 28일 조성(환구단 석고: 1902년 제작),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06, 광장 설계: □□□

9. 거꾸로 세운 동상: 2015년 8월 22일 광복 70주년 조성,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26가길 6 통감관저 터, 제작: □□□

10. 고종의 길: 2016년 9월 복원 시작,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8, 미국 대사관저 ~ 덕수궁 선원전 부지 사이, 복원 설계: □□□

11. 순종황제 어가길: 2017년 4월 조성,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 공원로 8길, 조형: 김기로, 양세훈, 양장원, 시공: ㈜선진 플러스

12. 국치의 길: 2018년 조성,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 2가, 설계: ㈜시아플랜 건축사무소 조주환

13. 을사늑약의 현장: 20□□년 설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실 41-11 중명전 제2전시실,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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