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운다. 기념사업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하니 제막하는 순간, 기념비는 한없이 건재하리라 믿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하다.
군사점령이나 정치변동처럼 세상이 바뀌면, 기념비가 먼저 가차 없이 당하기 마련이다.
그 정도는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 혁명이 정변으로 바뀐 상황에서는, 관련 기념비는 어떤 처지인지. 5·16 군사정변과 1972년 10월 유신에 얽힌 기념지를 찾아보자.
기념비가 잘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하는가?
1. 五·一六(5·16) 혁명 기념비
청주 도심의 중앙공원은 충청 병마절도사 영이 있던 옛 관아 터이다. 그런 덕인지, 3대 기적비, 척화비, 송공비 등 50여 비석들이 있어 일명 '비림 공원'이라 한다.
이 공원 내 문화원 뒤편 한구석에 버려진 듯 ‘五·一六(5·16) 혁명 기념비’가 겨우 서 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듣자 하니 몇 차례 자리를 바꾼 모양이다.
청주 중앙공원의 5·16 혁명 기념비
그래도 이 기념비는 전통양식을 제대로 갖추었다. 높이 2.5m에 그 모양새가 반듯하다. 다만 측면이 좁아서 너무 날씬할 정도이다. 비문은 한글과 한자를 섞어 새겼다. 건립은 10만 명의 청주시민 명의로 되어있다.
5·16 혁명 기념비 이면
5·16 군사정변 후 1년 만에 세웠으니, 당시 이 기념비가 지녔을 위세는 대단하였으리라.
그러나 이제 비는 뒤안길로 쫓겨난 듯,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곳 비림 대열에 당당히 섞이지도 못하였다. 심지어 낙서는 물론, 훼손 자국 일부도 아직 남아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당연한 귀결인가? 그러면 그때 청주시민 10만 명은….
2. 五一六革命發祥地(516 혁명 발상지) 박정희 흉상
서울 영등포구 문래 근린공원의 북측 경로당 앞에 자리하고 있다. 안내도에는 '조형물'로 작게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과거 육군 제6관구 사령부가 주둔했었고, 1970년대부터는 경인 위수사령부가 있었다. 일명 "박정희 벙커"라 알려진 지하공간 바로 옆이다. 장소의 의의는 충분하다.
그런데 발상지의 기념은 박정희의 흉상이 전부다. 옆 벙커는 굳게 닫혀 속내용을 알 수 없다.
서울 문래공원의 5·16 혁명 발상지 기념물
흉상의 기단은 지대석 위에 작게 세우되 틀을 짜듯 조형성을 갖추었다. 양편에 성화 부조를 새겼다. 불 요소는 기념 조형에 거의 단골로 등장한다.
흉상은 육군 소장의 복장이다. 모습도 익숙하고, 단호한 표정이 여전하다.
그런데 흉상은 쇠사슬 경계와 에워싼 스테인리스 스틸 철책 속에 가두어졌다. 경고문에 감시카메라까지. 오래전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복하고자 동상에 덧칠을 한 듯하다만, 결과적으로 흉상 자체가 번득거린다. 얼굴과 군복 등 색상을 구분해 표현했다. 더 어색하다. 우중충한 색상에 어떤 품격도 찾기 어렵다.
5·16 혁명발상지의 흉상 정면과 측면
기단 이면 건립문: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不正(부정) 不義(불의) 無能(무능)의 天地(천지)를 볼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라는 一片丹心(일편단심) 沈着(침착) 勇斷(용단) 果敢(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蒼空(창공)을 향하여 聖火(성화)를 높이 들다. 一九六六(일구육육)년 七(칠) 월 七(칠) 일"
5·16 혁명 발상지의 박정희 흉상
이 기념물에 대한 시각은 극과 극이다.
차라리 벙커 속에 기념공간을 만들고 역사적 사실 판단과 함께 보존하면 어떨까?
3. 十月維新(10월 유신) 탑
창원시 진해구의 중원 로터리 한편 작은 녹지 속에 자리하고 있다.
10월 유신 발표 1년을 기념하여, 처음 관문 교차로에 건립하였다. 이후 3년여 만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되어있다. 이런 탑이 있었는지 생소하다. 짐작컨대 이런 사례는 더 있었지 않았을까.
창원시의 10월 유신 탑(4인 군상)
10월 유신 탑은 2m 높이의 기단 위에 키가 3m가 넘는 사람들이 커다란 책자(아마 유신헌법)를 함께 들어 내보이며 주장하는 모양새이다. 신사복과 해군 수병 그리고 재건복의 모습이다.
석재기단의 부조는 연기를 뿜는 굴뚝과 공장과 고속도로를 배경으로 사력을 다하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시대가 추구했던 생산하고 건설하는 국가발전의 이미지이다.
진해구 중원로터리 10월 유신 탑 원경과 기단의 부조
그런데 훼손 탓인지 덧칠된 4인 상은 이미 기념탑이 아니다. 칙칙한 흉물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에 안타까울 뿐….
4. 장준하 공원
장준하 사후 43년 만에, 통일로 길목에 조성된 추모 기념지이다.
한적한 이곳에는, 낮은 언덕 아래 텅 빈 넓은 잔디밭에 몇몇 콘크리트 벽체가 서로 어우러져 있다. 벽체는 좌우로 나뉘어, 높고 낮게 또 길고 짧게 구성되었다. 마지막 9번째 추모벽으로 이어진다.
벽마다 그를 기리고 있다. 장준하 생애의 모든 것을 압축한 듯하다.
파주 장준하 공원 전경
벽 이면 1- 공원 조성 취지문:
"…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자 사상계 발행인, 국회의원, 민주통일운동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선생님, 황토의 유택은 님을 흠모하는 우리들 마음을 시리게 했습니다. … 목숨을 바쳐 지켜낸 자유혼, 민족혼, 민주혼은 만민이 우러러 함께 지켜나갈 정신입니다. 암울한 시대, 온몸을 던져 지성과 사상을 계발한 개척 혼과 이를 실천한 용기와 성실, 강인함과 헌신을 배우고 꿈꾸면서 우리 모두 어울려 자유와 통일의 대해로 나아갑니다."
장준하 공원의 벽체 동판부조와 글 1, 2
벽은 이제 기록물이 되었다. 작은 아카이브인 셈.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눈길을 이끌어 준다.
그런데 이곳은 궁색하지도 않아 오히려 절박함이 사라질 지경이다. 추모공원인만큼 경건한 분위기를 갖추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너무 고즈넉하니, 그의 의문사로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실재 상황조차 잠시 잊힐 정도이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한 탓인가 싶다.
장준하 공원의 벽 8, 9
벽 전면 9: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 돌베개 중에서
추모도 심미적일 수 있다. 그만한 가치와 의의가 있다면, 가능하리라. 이러하니 기념은 합당하고, 포용적이어야 한다.
이 기념지는 오래가겠지?
관련 기념지(건립 순)
1. 5·16 혁명 기념비: 1962년 5월 16일 건립,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사로 115 청주 중앙공원, 건립: 10만 청주시민, 글씨: □□□, 제작: □□□
2. 5·16 혁명 발상지 박정희 흉상: 1966년 7월 7일 건립,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 3가 66 문래 근린공원, 글: 박종화, 글씨: 손재형, 조각: 최기원
3. 10월 유신 탑: 1973년 3월 관문 교차로에 건립, 1976년 8월 1일 중원로터리로 이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편백로 39, 건립: 진해시장 박용범, 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