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룸매거진이 전하는 삶의 내러티브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요즘 투룸매거진의 정체성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있다. 투룸매거진이 어떤 이야기를 담는지, 투룸매거진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생각의 변화를 일으키는지 등이 이 고민에 속한다.
투룸매거진은 기본적으로 이방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방인이었다가 다시 모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모국에서조차 이방인의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장면들도 포착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살며 이방인들의 삶을 엿봄과 동시에 저 멀리 어딘가의 삶을 꿈꾸며 상상하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독자가 전체 독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투룸매거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독자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의 삶은 불평을 늘어놓기에 좋다. 기본적으로 외국어라는 핸디캡이 이국의 땅을 밟는 순간부터 전반적인 삶의 템포를 한 단계 낮춘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언어문제가 이국에서의 삶을 제한하는 무언가가 되어간다. 언어능력이 향상되는 건 분명하지만 실질적으로 체감되지 않아 정기적으로 꾸준히 이방인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사람과의 소통이 없으면 이곳의 삶 또한 흘러가지 않는다. 부족한 언어지만 어떻게든 그 사회 속의 인물들과 눈앞에 펼쳐진 사건에 기꺼이 마주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에 가고, 직장을 구해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살아간다.
해외에서의 삶을 꿈꾸며 품었던 환상도 빠른 속도로 산산조각 난다. 어딜 가나 삶이란 고된 것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모국에서의 삶과 마찬가지로 별안간 불안과 고독이 틈을 타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곳의 생활은 ㅇㅇ하다.”라는 생각을 하며 이곳의 삶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한다. 물론 거기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을 완벽하게 정의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삶은 삶일 뿐이고 각자가 결정한 속도대로 흘러갈 뿐이다.
투룸매거진이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 너머의 이야기다. 여러 고생 서사들을 꼭 극복해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빠른 속도로 물이 흐르는 계곡의 돌다리를 건널 때 누군가는 두려워하며 건너기를 주저할 수 있고,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고 건널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물살이 잠잠해질 때까지 돌 위에 앉아 노련하게 기다린다. 물론 고민 없이 쉽게 돌다리를 쓱 건너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이 모든 서사들은 서로에게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주저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이에게는 나머지 인물들의 모습이 용기와 위안이 되기도 하고, 여유롭게 돌다리를 건너는 이는 눈을 꼭 감고 돌다리를 하나하나 건너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게 된다. 물가의 풀밭에 앉아 돌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이들은 다리 건너 저 너머의 풍경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현실을 억지로 꾹 참고 견디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다른 이의 삶도 동일하게 존중하며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복잡한 존재여서 누군가의 삶의 서사가 때로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투룸매거진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나의 삶이 왠지 모르게 부족해 보이지만 멈춰있거나 정체된 상태가 아닌, 느리지만 분명 어떤 방향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믿게 한다. 그 믿음은 한 개인 스스로와 삶에 대한 믿음으로 확장되어간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그 과정에서 ‘이런 삶도 있구나.’하고 깨닫는다. 어떤 삶이 더 났거나 별로일 수는 없다. 삶의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가며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어갈 뿐이다.
투룸매거진이 담는 이야기들이 타이포에 묶여 스마트 폰 화면 속 작은 공간에 갇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편집자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매달 발행되는 이 이야기의 묶음들이 독자들의 삶에 작지만 확실한 파동을 주고 있다고 믿고 싶다.
글 차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