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에디터가 만난 UN 실무직원 노마드 강은경
꿈과 현실의 간극 앞에서 고뇌하는 철학자, 아니면 파르르 떠는 사시나무 밖에 될 줄 몰랐던 나에게 은경은 늘 거대한 미스터리였다. 그녀에게는 꿈을 말하면 반드시 이뤄내는 힘이 있다. ‘반드시'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렇다고 대외활동에 참가하느라 부산을 떨거나 요란한 퍼스널 브랜딩과 인맥 쌓기에 열을 올리지도 않았다. 조용히 지내다가 별안간 장학금을 받고, 경쟁률이 높은 해외 인턴십과 봉사활동을 하고, 특별해 보이는 해외여행들을 떠났다. 은경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은 30대에 들어선 지금, 또다시 취준생처럼 꿈과 현실의 간극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나 자신을 다잡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본 기사는 유료 모바일 매거진 투룸매거진 22호에 수록된 콘텐츠입니다.
에디터 주원 테일러 사진 강은경
은경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내린 모든 결정이 그 꿈을 따랐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4년간 몸 담았던 그녀의 첫 직장 한국광물자원공사도 그중 하나였다. “보수적인 조직문화가 성향과 맞지 않아 불행했어요. 생각해보니 애초에 공기업에 들어갔던 것은 내 꿈에 따른 결정이 아니라 부모님의 꿈에 따른 결정이었더라고요. 딸이 서울의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 잡는 것을 늘 바라셨던 시골 분들이셨고, 그 바람을 이뤄내야 성공이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의 바람을 어느 정도 이뤄드렸으니 이제는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볼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직서를 제출한 뒤 은경은 1년 동안 인도, 인도네시아, 그리고 유럽과 남미의 이나라 저나라에서 정처 없이 노마드 생활을 했다. 여행비용은 프리랜서 번역일로 충당했다. 어릴 적부터 간직하고 있던 꿈, ‘해외에서 국제적인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을 복기하고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그 꿈은 식견보다 상상력이 곱절은 풍부한 중학생이 꿀 만한 아주 추상적이고 막연한, 그러나 강력하고 원초적인 것이었다.
2020년 UN입사 후에도 1년에 한 번 꼴로 근무지를 바꾸는 노마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은경은 자신이 꿈을 이뤄낸 여정이 결국은 ‘Learn & Unlearn’의 연속이었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환경으로 옮길 때마다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게 있는 법이죠. 그리고 그만큼 Unlearn, 즉 버려야 할 것도 많아요. 몸에 밴 습관, ‘당연하다’의 기준, 또는 사회와 상대에 대한 기대치 같은 것들 말이에요. 비울 수 있어야 배울 수 있어요”
노마드의 지혜에 무릎을 딱 쳤다. 여태껏 나는 꿈을 이뤄내는 과정을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처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언제나 다음 순간이 지금보다 ‘레벨업’ 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은경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꿈을 현실화하는 것은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보다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꿈의 해상도를 높여가면서 꿈과 현실의 간극을 발견하는 것은 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간극은 비극의 무대가 아니라 미지의 신대륙일 뿐이었다. 새로운 광경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 환경에 적응하려 하는 노력하는 동시에 꿈을 멀리서 흐릿하게 바라보았던 날에 가졌던 기대와 아집과 오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잠깐 길도 잃고 뒷걸음질도 쳐보면서 말이다. 나는 버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은경이 막연했던 해외살이의 꿈에 ‘UN 입사’라는 닻을 내린 것 이탈리아 로마에서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UN의 식량농업기구(FAO) 로마 지사에서 일하던 대학 선배의 초대를 받아 방문한 UN 빌딩 로비의 ‘World Hunger 사진전’ 에서였다. 대학시절 멕시코 어느 시골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 느꼈던 뭉클한 마음이 사진들 속에 다시금 피어올랐다. 인류 행복의 증진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이야 말로 엄청난 특권이며 평생 하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UN이라는 ‘꿈의 신대륙’ 역시 녹록지 않은 곳이었다. 세계적인 인재들이 앞다투어 지원하는 곳이 바로 UN 인 데다 직원의 대다수를 현지인으로 채용하는 고용 정책 때문에 취업의 문이 매우 좁다. 관련 경력이 부족한 이들은 그나마 한국 정부의 국제기구 파견 사업들에 도전해볼 만하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프로그램인 ‘다자협력 전문가’(KMCO), 외교부가 선발하는 ‘국제기구 초급 전문가’ (JPO)가 대표적인 예다. UN근무 3년 차인 은경은 매해 계약 조건을 바꾸며 새로운 근무지로 옮겨왔다. 2020년에는 유엔 난민기구 콜롬비아 지사, 2021년에는 국제이주기구 케냐 지사, 그리고 올해는 유엔 난민기구 에콰도르 지사다. UN에서는 연차가 쌓인다 해도 승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매해 이직 준비를 하듯 새로운 프로젝트 계약을 위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직원 로테이션이 잦은 이유는 첫째로는 기구 운영의 투명성, 둘째로는 각 프로젝트에 지급되는 펀딩이 굉장히 유동적이기 때문이에요. 컨설턴트나 발룬티어와 같은 비정규직 포지션은 3개월에서 12개월, 정규직도 1년마다 연장되는 계약직의 형태를 띠죠. 정규직의 경우 연장이 이뤄져도 대개 2년, 길어야 5년 한 곳에 머물죠.” 불안정한 노마드 생활은 과연 은경에게는 꿈의 일부였을까, 아니면 꿈의 대가였을까? 그녀는 아무래도 역마살을 지닌 팔자인 것 같다고 농담처럼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수긍하면서도 'Learn & Unlearn'이 해가 바뀔수록 점점 힘들게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돌아가 콩고, 에티오피아, 수단과 같이 인프라가 케냐보다 열약한 국가에서 근무해보고 싶다며 열의를 보이면서도, 불안정한 주거 환경 때문에 UN 여성 직원의 이혼율이 높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식이었다. 노마드의 경험이 쌓일수록 오히려 Learn & Unlearn이 힘든 이유는 그 경험 속에서 개인만의 고유한 서사와 안목과 정체성이 함께 형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각 장소마다 인생의 굵직한 성취를 남기기도 하고 말이다. 은경은 케냐에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파트너를 만났고, 콜롬비아에서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성교육과 보호소를 제공하는 로레알 펀딩 프로그램의 사업제안서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UN직원인 동시에 사랑에 빠진 연인이고 중남미 문화의 뿌리 깊은 마초이즘이 야기하는 열악한 여성인권을 진심으로 우려하는 한 여성이었다.
은경은 에콰도르 키토에 정착하는 지난 3개월이 유난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했지만 나름의 돌파구들을 찾아낸 듯했다. UN에서 직원들을 위해 지원하는 정신상담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요가 학원에 등록했다. 케냐에서 키우던 고양이 ‘게이’를 에콰도르까지 데려와 나름 작은 가족도 이루었다. Learn & Unlearn의 교훈을 몸 깊이 체득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차근히 삶을 다시 배워보고 있었다.
‘해외에서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다’라는 중학생 은경의 막연하고 허황된 꿈이 ‘UN에서 에콰도르 난민의 이주 정책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범인류적인 꿈으로 구체화되는데 채 20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꿈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내 것이 아니라고, 혹은 이기적이라고 무시해 버렸을까. Learn, and unlearn. 계속해서 자신만의 신대륙을 탐험해 나가고 있는 은경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조용한 Dreamer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