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는 영웅을 숭배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화가들은 역사화라는 형식에 기대 혁명을 선도한 정치가, 군인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며 화폭에 담았다.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프랑스를 영광의 길로 이끌 새로운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군사적인 천재성으로 주변국들을 꺾을 때만 해도 그러한 생각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상자가 누적되고 국가가 빈곤해지자 찬양일색의 붓질들이 점차 의혹으로 바뀌게 된다. 화가들은 영웅숭배의 장막을 걷어내고 새로운 주제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일반 병사들의 죽음, 공포, 절망이 있었다. 숭배의 뒷면에 가려졌던 불편한 진실들이었다.
역사화가들이 평범한 사람들에 주목한 것은 영웅숭배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였다. 신고전주의에서 묘사되었던 영웅들과 달리 낭만주의 시대의 영웅은 고결한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차가운 조각상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때로는 분노에 차서 무모한 돌진을 시도하기도, 때로는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기도 하는 존재들이었다. 초월적 힘과 완전무결에 가까운 순결성으로 무장한 신고전주의 시대의 영웅들과 달리 낭만주의의 영웅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는 점에서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과 보통사람의 차이는 단지 선천적으로 천재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로 결정되었다. 신과 인간이라는 전혀 다른 위계를 가정하는 신고전주의 시대의 영웅관념에 비교했을 때 낭만주의 시대의 영웅은 적어도 인간의 육체를 가졌다는 점에서 범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아무리 영웅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한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영웅의 위업만큼이나 실패, 좌절,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낭만주의 시대에 널리 유통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알베르 폴 부르주아의 <에슬링 전투에서 란 원수의 마지막 순간>과 테오도르 제리코의 <레르티에 장군의 초상>은 영웅을 묘사하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부르주아의 작품은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포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는 장 란 원수가 나폴레옹과 만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둘의 재회는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의 최후처럼 숭고한 장면처럼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동시대 장군들의 죽음을 유사한 방식으로 그려냈던 벤자민 웨스트의 선례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전투에서 그는 다리에 포탄을 맞아 왼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는데 당시의 열악한 야전의료 기술을 고려했을 때 피가 튀는 끔찍한 광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된 맥락이 아닌 영웅의 장렬한 최후와 그것을 지켜보는 나폴레옹의 모습 그 자체에 있었다. 전쟁의 비정한 현실은 작품에서 불필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이렇듯 영웅의 최후를 장엄하게 묘사한 부르주아와 달리 제리코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던 한 군인의 최후를 아무런 윤색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레르티에 장군의 마지막 모습에서 과거 그가 전쟁에서 활약했던 군인이었다는 흔적은 어둠 속에 보이는 군복을 통해서나 드러날 뿐이다. 가슴에 드러난 총상의 흔적은 그가 권총 자살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의사들은 그의 자살을 사회적 질서 붕괴에 따른 충격이 가져온 정신병에 의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장을 누볐던 강건한 군인도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편 사회적인 관점에서 화가들이 일반 병사들을 묘사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전 시대에 대한 저항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프랑스에서 낭만주의는 나폴레옹 정권 하의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를 기반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낭만주의자들이 정권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국가의 공공예술 사업에 관여하며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했고 또 어떤 이는 전쟁에 참여해 나폴레옹이 추구하는 대의에 동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나폴레옹의 모험주의적 행보가 영광만을 낳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나폴레옹 정권의 행보는 멈출 줄 모르는 폭주기관차와 유사한 무엇이었을 것이다. 확신에 넘치던 프로파간다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르포르타주로 변모한 것은 그것의 명백한 징후였다. 전쟁의 참상을 표현한 예술가들은 역사적 사건에 휘말린 인간들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냈다. 1850년 촬영된 아일라우 전투에 관한 파노라마는 바로 그러한 전환을 보여준다. 뮈라 장군의 기병돌격 장면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 그로의 작품에서 나타났던 영웅 나폴레옹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작품 속에는 해당 장면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뮈라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다. 대신 화폭에는 눈밭 위를 나뒹구는 병사들과 말, 대포잔해들이 뒤엉킨 혼란스러운 광경이 펼쳐진다. 19세기 중반 하나의 오락거리로 전시되었던 이 작품에서 전쟁은 이제 칭송되어야 할 무엇이 아닌 끔찍한 무엇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전쟁의 참상과 그것의 후유증을 노골적으로 재현하는 일군의 회화들은 아일라우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만 해도 두드러진 경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는 1814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가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낯선 무엇이 아니게 된다.
프랑스 예술계 전반에 감도는 전쟁에 대한 회의주의적인 시선은 일찍이 장르화에서도 등장하고 있었다. 루이 레오폴드 부아이는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가다. 그는 혁명 이전에는 로코코 풍의 관능적인 작품들을 그리던 화가였다. 화가 생활 초기에는 부유한 부르주아들과 귀족들의 초상화 작업들을 도맡아 그리며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혁명 이후 상황은 180도로 바뀌었다. 관능적인 화풍은 혁명정부 하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로 인해 당국의 감시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 시기 그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공안위원회와 파리 경찰은 공공도덕의 부패를 초래하고 불온한 작품들을 판화가들에게 유통시켰다는 죄로 그를 기소했다. 당시의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그가 사형을 당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사형언도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그는 목숨을 보장받기 위해 혁명을 이상화하는 그림을 제작한다. 이 즈음 착수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라의 승리>는 그런 절박함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나게 된다.
비록 당국의 압력에 굴복해 혁명을 찬양하는 작품을 그리기는 했지만 그것이 부아이의 회화 세계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부아이는 역사화를 그리던 여타 다른 화가들과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초기작 중 <우유를 위한 대기열>은 혁명 정부 하에서 빈곤을 면치 못하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에는 혁명 이전 보여주었던 관능적인 표현은 거의 사라졌다. 화면의 왼쪽에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과거 화풍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로코코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대신 작품에는 동시대의 생활상에 대한 가감 없는 묘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현재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이 작품은 1796년 살롱에 출품된 바 있다. 당시 살롱은 혁명 영웅들을 기념하는 역사화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작품은 분명 이질적인 무엇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불어온 네덜란드 풍속화에 대한 유행은 이 작품을 그러한 경향의 연장선으로 독해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풍속화에 대한 유행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논조로 읽혔을 것이다.
1807년, 아일라우 전투와 그 여파로 파리가 시끌벅적하던 그때 부아이는 오늘날에도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작품 두 점을 선보인다. <1807년, 징집병들의 출발>(1806)과 <프랑스 대육군 회보를 읽는 가족>(1806)은 프로이센으로의 원정이 일반 가정에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보여주는 당대의 기록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계속된 전쟁으로 부족해진 병력들을 충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이 있을 때마다 징집령을 내렸다. 문제는 전쟁이 지속될수록 성인 남성들이 부족해졌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를 징병 조건의 완화로 해결하려 했지만 각지에서 폭동이나 자해, 탈영과 같은 여러 종류의 저항들이 발생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병역 기피를 막고자 징병거부자들에 대한 강력한 행정적 조치를 내리는 한편 이미지를 활용한 프로파간다 정책으로 징병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키고자 했다. <1807년 징집병들의 출발>이 살롱 전시장에 걸렸을 때 많은 대중들은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와 작품을 연결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혹자는 이 작품이 프로이센 원정을 위해 떠나는 용감한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생 드니 문을 배경으로 다양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구경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간다. 모자를 흔드는 일부 징집병들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이 원정이 과거 나폴레옹이 이끌었던 원정들이 그러하였듯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묻어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당시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 작품이 원정에 대한 부정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작품의 왼쪽에 보이는 맹인들은 그러한 생각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관객들은 마치 행렬을 따라가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최종적으로는 개에 의지해 거리를 걷는 맹인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징집병들이 맞이할 최후를 보여주는 은유적인 장치이자 전쟁 그 자체에 대한 화가 자신의 비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위하여 전쟁을 하는가? 누군가는 혁명의 이상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머나먼 프로이센의 땅에서 차가운 주검이 되었던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했다. 추정컨대 일반 병사들의 눈에 전쟁은 각자의 대의에 눈먼 자들이 벌이는 무의미한 살육행위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같은 해 부아이가 그렸던 또 다른 작품은 작가의 지향점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대육군 회보를 읽는 하층민 가정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에서 화면 중앙에 위치한 인물들은 지도를 가리키며 회보에 묘사된 원정군의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 노인이 들고 있는 종이에 쓰인 XII은 그것이 프러시아 원정 내용을 담은 대육군 회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에는 당시 전쟁에 대한 다양한 종류의 알레고리들이 가득하다. 전경에 보이는 개와 고양이의 대치는 당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경 왼쪽에 나무막대기로 만든 가짜총을 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국가적 위협에 맞서는 프랑스인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꼿꼿이 서 있는 남자아이의 바로 위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가 제작한 나폴레옹의 흉상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서 화면 속의 가족이 나폴레옹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부아이의 그림은 애국심을 고취시켜 징병을 정당화하려는 그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노인의 반대편에 굳은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전쟁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손등에 키스하고 있는 그녀의 남편(혹은 가족구성원 중 한 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 또한 자신의 배우자를 전쟁터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녀의 표정은 당시 전쟁을 앞두고 있었던 프랑스 일반 대중들의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는듯하다. 국가를 위한다는 고결한 대의는 미망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였다.
이렇듯 역사화와 장르화 전반에 걸쳐 나타는 전쟁에 대한 회의론은 나폴레옹 정권이 추구하는 예술정책의 근간을 흔들었다. 프로파간다의 기수가 되어야 할 살롱 전시장은 전쟁에 대한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제리코가 <돌격하는 황제근위대 엽기병>을 전시한 것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 작품은 공개되자마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키며 프랑스 예술의 역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인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