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말은 미술의 역사에서 변화의 시대임과 동시에 파괴의 시대였다. 그것은 일련의 정치, 사회 분야의 격변과 맞물려 일어났다. 대서양 양안에서 벌어진 혁명의 물결은 왕과 귀족이 아닌 시민들의 시대를 열었다. 지배계층의 변화 앞에서 미술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나섰지만 모든 분야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특히 공공조각 분야는 그것의 특성상 사회의 변화를 신속하게 반영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시기 벌어진 공공조각에 대한 파괴 행위들은 그것의 결과였다. 미국에서는 조지 3세의 동상이 철거되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의 조각이 같은 운명을 맞았다. 뒤이어 벌어진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시기의 전쟁들은 조각에 대한 대대적인 반달리즘에 더욱 불을 지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에 따라 혹은 단지 경제적인 이득에 따라 공공조각들은 파괴되거나 지하의 창고에 유폐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탈리아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에게도 이런 위협은 예외가 아니었다. 베니스 공화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목격했던 광경은 혁명으로 인한 미술품 방화와 파괴, 그리고 이후 프랑스군에 의해 자행된 대대적인 약탈이었다. 르네상스 시기 교회와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 아래 수 없이 많은 미술품들을 쏟아냈던 베니스는 그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전쟁터가 되었고 프랑스에서 온 약탈자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파괴는 새로운 기회를 낳기도 했다. 카노바와 같은 동시대 조각가들에게 있어 그것은 신화화된 초상 조각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개척을 추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예술이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앙투안 와토는 귀족들의 야유회 장면을 단순히 실제 장면의 기록에 국한시키지 않고 신화화된 존재들과 결합시켰다. 그의 대표작 <키테라 섬의 순례>(1717)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모습을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듯 동시대 인물과 신화적인 존재를 결합시키는 방식은 비단 프랑스에서만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 레이놀즈의 <삼미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라 번버리>(1763-1765)는 그러한 경향이 서유럽 전반의 예술에서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미술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상반된 시각에서 바라본다. 하나는 역사화의 전통이 초상화 분야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관점으로 신화적 요소의 포함은 그 자체로 특정 소재가 포함된 작품들만을 주류 미술로 인정하던 당대 예술계의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초상화가들의 선택은 동시대 예술계에 편입되기 위한 일종의 타협책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초상화 분야에 도입된 신화적 요소는 장르의 위계가 붕괴하고 있다는 징조로 읽히기도 한다. 서양예술의 전통에서 초상화는 그것이 동시대인을 묘사하고 판매용으로 그려지는 소품이 대종을 이룬다는 점으로 인해 역사, 성경, 신화적 요소를 거대한 화폭에 표현했던 역사화 분야보다 수준 낮은 장르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르상의 지위는 초상화가 가지고 있는 실제 인기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적 관점에서 초상화가들은 귀족, 왕, 부유한 시민들의 주문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부를 획득했고 그로 인해 그들의 지위는 과거 르네상스 시절 초상화가들이 누렸던 지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초상화 분야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예술 장르의 위계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초상화가들은 이제 이전과 같이 장르화를 그린다는 오명 아래 낮은 취급을 받지 않게 되었고 그들 중 일부가 아카데미 제도 안에 편입되어 사회적인 명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신화가 포함된 초상은 격상된 사회적 지위에 대한 초상화가들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공고한 지위를 누리고 있던 역사화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신화적 요소는 초상화가들이 단순히 주문자의 외형을 그대로 모사한다는 측면을 넘어 신화적인 지식을 갖춘 지식인이라는 점을 부각하는 장치였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요소는 그들이 기교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장인이 아닌 예술가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예술 장르 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행위였다.
카노바가 살았던 시대의 조각가들이 동시대인을 신화적 지식과 결합시켰을 때 그들은 바로 이러한 전거들을 참고해 새로운 영역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미술 장르 간의 긴장 이외에도 그들의 선택에는 당대의 정치적인 변화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이러한 관련성은 그들이 이동과 제작이 용이하지 않은 조각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에 미술품은 줄곧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그러한 약탈이 불가능한 작품들의 경우 무자비할 정도의 파괴 행위가 동반되었다. 조각 작품은 그러한 파괴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교회나 궁전에 위치한 거대한 조각 작품들은 그것을 운반하는데 상당한 수고가 들었기 때문에 조각내어져서 보내지거나 파괴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특히 동시대 인물들을 묘사한 조각 작품들은 그러한 위협에 더욱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카노바가 나폴레옹의 전신상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그가 했던 고민 또한 이러한 반달리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불안정한 유럽의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파괴되지 않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작가의 고민은 동시대의 인물상에 비교적 정치적인 색채가 덜하고 유럽 전반에 걸쳐 널리 알려져 있는 신화적인 요소들을 작품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평화의 중재자 마르스로 분한 나폴레옹>은 그렇게 세상에 처음 등장했다.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카노바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 기간이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카노바에게 직접 편지를 써 약탈과 파괴로부터 그의 스튜디오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을 정도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폴레옹의 호의와 다르게 카노바는 줄곧 프랑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베니스가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카노바는 프랑스의 위정자를 위해 그 어떤 작품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적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1802년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이 다시금 그에게 접근했을 땐 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번에 나폴레옹은 카노바를 파리로 불러 작품 제작을 의뢰하고자 했다. 일전보다 더 강경한 방법에 카노바는 온갖 핑계를 대며 파리행 자체를 늦추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하루는 병을 핑계로 밖을 나가지 않고 또 하루는 도로 사정을 탓하며 출발일자를 미뤘다, 심지어는 날씨가 안좋아 출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대거나 다른 주문이 밀려 파리로 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핑계들은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이었던 에르콜레 콘살비와 비오 7세의 편지 앞에 무력해지고 말았다. 결국 1802년 10월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서 나폴레옹을 접견한다.
퐁텐블로성에서 나폴레옹을 만난 카노바는 그리스 전쟁의 신 마르스로 분한 나폴레옹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처음에 나폴레옹은 카노바의 제안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이자 병사들과의 유대의 상징인 부사관 복장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기를 바랐다. 나폴레옹의 요구는 결코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작품 제작의 권한을 가진 주문자라는 점을 제하고서라도 현대적 복장을 입은 동상은 지도층을 묘사하는 조각 작품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도상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작품이 이 분야에서 유명한 동상 중 하나였던 장 앙투안 우동의 <조지 워싱턴>과 같은 작품으로 완성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카노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고전적 누드가 나폴레옹의 업적을 불변하는 무엇으로 상상하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우월성과 역사와의 관련성을 강조했다. 어떤 형식으로 조각을 완성할 것인가라는 논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격렬한 논쟁 와중에 카노바는 나폴레옹을 설득하기 위해 이런 위험천만한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폐하께서 프랑스 복장을 입고 계시면 신이 와도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가 없을 겁니다" 결국 한 발 물러선 쪽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카노바의 구상안에 손을 들어줬다. 그가 이미 당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가였기에 내려진 파격적 결정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결정이 한 유명 예술가의 고집 있는 설득 끝에 그가 의견을 꺾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나폴레옹에게도 나름의 계산은 있었다. 그가 조각 제작을 의뢰한 1802년은 아미앵 조약을 체결한 역사적인 해였다.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있어 아미앵 조약은 그가 이후 프랑스의 지배자로 발돋움하게 해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프랑스에 대한 대외적인 위협을 잠시나마 억제하고 프랑스 국내에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지게 되었다. 조약이 2차 대프동맹국들간의 전쟁을 멈춘 평화 조약이었던 만큼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단순히 유명한 장군, 통치자가 아닌 평화를 가져온 인물로 여겨졌다. 이런 나폴레옹에게 마르스의 이미지는 더없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1802년을 전후로 한 시기 나폴레옹을 묘사한 여러 작품들에서 평화, 중재를 상징하는 알레고리들이 등장한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카노바의 구상이 비록 나폴레옹 본인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시의성이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로 돌아간 이후 카노바가 조각상을 완성한 것은 1806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완성품을 바로 받아보지 못했다. 알프스를 건너는 육로 루트는 지나치게 위험해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해로는 기상상황과 영국 해군의 방해 때문에 바닷속에 사라지거나 노획될 위험이 있었다. 수로를 통해 작품을 운반하도록 한 나폴레옹의 지시로 작품은 가까스로 파리에 당도할 수 있었다. 작품은 루브르에 전시되었으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전에 나폴레옹이 먼저 작품을 관람했다.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폴레옹의 조각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본 후 그것을 창고에 집어넣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비단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동시대인들은 카노바의 작품이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기이한 작품이라 여겼던 듯하다. 이것은 당대에 동시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누드가 부자연스러운 것을 넘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 당시 프랑스 예술계가 비프랑스인 예술가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탈리아인 예술가라는 그의 정체성은 작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준거로 작용했던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박물관에서 빛을 보지 못한 채 수장고의 한 구석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의 웰링턴 공작이 작품을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한 기념으로 자신의 저택에 가져갔다. 그 후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웰링턴의 저택이었던 앱슬리 하우스에 전시되고 있다.
카노바의 사례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반드시 국가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다비드, 그로, 앵그르 등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신고전주의 화가들이 국가적 프로파간다에 동원되어 혁명과 황제를 찬양했던 것과 다르게 그가 구현했던 신고전주의 조각은 그런 것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카노바 한 명에게 국한된 사안은 아니었다. 스페인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신고전주의는 그것의 탄생 시기 왕실 중심의 로코코 미술에 대항하는 강력한 시각적 언어로 시민 세력의 예술적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시대가 흐를수록 그것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프로파간다의 언어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애국심과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국가에게 있어 적절한 시각 양식은 감정을 예술의 주된 요소로 여겼던 낭만주의 화풍이었다. 비록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 화풍을 배운 많은 화가들이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에서 여러 문화 사업에 동원되었지만 그들이 초기의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버리고 점차 낭만주의와 유사점을 찾아가는 현상은 이러한 두 양식의 차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