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모스크바, 1813년

by 에델
gros,12.png 앙투안 장 그로, <불타는 모스크바에서의 나폴레옹>, 1812-1813, 루브르 박물관.


그의 화폭 속에서 황제는 영웅이자 선지자 그리고 자비로운 통치자였다. 다비드의 제자로 나폴레옹 집권 시기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앙투안 장 그로에게 정권의 흥망은 자신의 흥망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수많은 그림들은 황제의 권력을 영속화하고 그것을 기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제 나폴레옹 정권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이것의 결정적인 계기였다. 영국에 대한 무역봉쇄를 통해 우위를 점하려던 나폴레옹의 전략은 러시아의 봉쇄령 파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나폴레옹은 이 막무가내인 동맹국을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켰다. 그의 원정은 단순히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원정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통해 황제로써 자신의 권위를 다시 확립하고 과거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렸던 대관식과 같은 행사를 러시아의 크렘린궁에서 열고 싶어 했다. 그가 원정을 위해 군인들뿐만 아니라 음악가, 재봉사, 예술가 등을 대동하고 즉위식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해 왔다는 사실은 이 원정의 성격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렸던 영광스러운 행사를 다시금 상기시키려는 듯 교황을 러시아로 불러 행사를 주재하려 했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몇 가지 불안 요소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의 모스크바행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보로디노에서 벌어진 파괴적인 전투는 최종적으로 러시아가 모스크바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텅 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하지만 시련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낮부터 시작된 화재는 밤을 넘기자 모스크바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은 모스크바 전체를 잿더미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모두 어그러졌다. 영광스러운 승리와 뒤이은 화려한 행사는 불타는 지옥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좀처럼 불길이 진압되지 않고 급기야 크렘린궁까지 화마가 미치자 그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가 1812년 작업에 착수해 1813년에 완성한 <불타는 모스크바에서의 나폴레옹>(1812-1813)은 당시의 상황을 과장되지만, 솔직하게 전달하고 있다. 끝내 미완성으로 스케치만 남은 그로의 작품 속에서 처음 느껴지는 감정은 혼란과 공포다. 크렘린궁을 나서는 나폴레옹과 수행단의 뒤로 불타고 있는 모스크바의 모습이 파노라마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매캐한 연기의 표현은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전경에 이르러 작품에서 전달하려는 혼란과 공포의 감정은 절정에 이른다. 방화범들을 황제 앞에 끌고 가는 대육군의 모습과 광기에 사로잡힌 듯 춤을 추는 러시아 시민들의 모습은 당시의 혼란을 전달해주려는 듯 정제되어 있지 않고 구성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신고전주의 특유의 절제된 구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그로가 신고전주의의 영향 하에서 작업했다는 사실은 러시아의 계절과 지역에 어울리지 않는 그리스 복장을 한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다소 엉뚱해 보이는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작품이 그리스, 로마의 시각적 알레고리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그가 다비드의 제자였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지만 그들이 취한 포즈와 표정은 되려 그러한 점을 가로막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할 것은 왼쪽에 보이는 세 명의 여인이다. 다비드의 많은 작품에서 여인들은 작품 해석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곤 했다. 그들은 때때로 남성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분출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6)에서 우측에 표현된 일군의 여인들(심지어 이 여인들도 3명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은 자식을 전쟁터에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남성들과의 대비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또 어떤 경우 여인들은 남성들끼리의 싸움을 멈추는 중재자의 모습으로 화폭에 나타나기도 한다. <사비니 여인의 중재>(1799)에서 다비드가 묘사한 여인들은 단순히 감정을 분출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로마와 사비니의 다툼을 중재하는 중요한 알레고리로 등장한다. 이렇듯 다양한 작품들에서 다비드의 표현 방식을 익힌 그로는 그것을 모스크바 대화재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사용했다.


1200px-The_Lictors_Returning_To_Brutus_The_Bodies_Of_His_Sons.jpg 자크 루이 다비드, <브루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오는 호위병들>, 1789, 루브르 박물관.


기존의 연구에서 그로의 표현방식은 일찍이 1789년 다비드와 함께 작업했던 <브루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오는 호위병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 왔다. 다른 작품도 아닌 20년이 넘는 시간적 간격을 가진 두 작품을 서로 연관시키는 이유는 두 작품 모두 비극 그 자체를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비드가 제작한 일련의 회화에서 여인들은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남성 인물들의 반대항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로 인해 많은 작품에서 여인들의 모습은 중요한 상징으로 기능할지언정 부수적인 역할로만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와 그로가 함께 작업한 1789년의 작품은 여타 다른 다비드의 작품과 다르게 자식을 잃은 여성들의 비통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 남성들의 희생과 여성들의 슬픔이 화면의 좌우로 동등하게 양분되어 있었던 것과 다르게 1789년의 작품에서 모든 시각적 장치들은 여성들의 슬픔에만 집중하고 있다. 어둠 속으로 잠겨 사색하고 있는 브루투스의 모습과 강한 빛으로 강조되고 있는 여인들의 대비는 이러한 점을 더욱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비록 다비드 본인에게 있어 이 작품은 자신의 예술적 커리어에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를 프랑스에서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일련의 작품들은 국가를 위한 희생, 대의의 추구와 연관이 있지 감정적 격동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에게 있어 이 작품의 제작은 이후 등장하는 그의 회화에서 슬픔, 불안, 좌절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 감정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모스크바 대화재를 배경으로 한 그의 회화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여인들의 모습은 이미 그의 예술적 커리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성향의 분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황제를 위한 프로파간다 작품이 아닌 사회 비판적 성향의 작품일까? 적어도 그로의 의도는 전자에 가까웠는 듯하다. 그로는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러시아 지배층의 비인간적인 방화 사건 앞에 고통받는 러시아 시민들을 위무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한다. 이렇듯 기층 시민이 받는 고통과 나폴레옹의 자애로움을 결합시키는 방식은 그로가 선전화가로 명성을 쌓았던 초기부터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일례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자파의 페스트 격리소를 방문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4)나 <아일라우 전장을 방문한 나폴레옹>(1808)은 역병과 전투가 가져온 일반인들의 고통을 나폴레옹의 자애로운 모습과 결합시켜 효과적인 선전 회화로 기능하고 있다. 요컨대 그로가 모스크바 화재를 작품의 주제로 택했을 때 그것의 의도는 이러한 나폴레옹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그로의 의도와 달리 회화적 결과물만을 놓고 본다면 나폴레옹의 모습은 자애보다는 공포 혹은 혐오감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머리가 벗겨진 나폴레옹의 모습은 위기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지도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혼란과 광기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한 명의 인간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로는 작품의 중심 구도를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구성해 그의 행위를 부각하려 했지만 이러한 배치 방식이 오히려 그의 적나라한 표정을 더욱더 강조해주고 있다. 미완에 그친 그로의 작품은 그가 즐겨 그렸던 프로파간다의 언어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지표다. 온갖 윤색과 구도적 기교를 이용해 지도자의 위대함을 강조하려 했던 그로의 회화 작품은 종내에 이르러 혼란과 공포만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그로 개인의 한계가 아닌 다비드와 그의 제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한계이기도 했다. 한계에 봉착한 그들의 회화만큼이나 제국은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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