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가 끝났을 때 그것은 단순히 나폴레옹 정권의 몰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을 휩쓸었던 전쟁이 끝나게 된 이 사건은 한 시대의 끝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1815년 6월 29일 영국의 타임스 지는 이 전투의 승리가 "고대와 현대의 역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당대의 관점에서 이는 언론의 과장된 수사가 아니었다. 승리자와 패배자뿐만 아니라 전투를 숨죽이며 지켜보며 바라보았던 유럽의 많은 사람들에게 워털루 전투의 결과는 유럽의 역사를 새롭게 재편할 중대한 사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요성은 전투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며 19-20세기 문화 콘텐츠에서 다양한 매체로 수 없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물론 나폴레옹 전쟁의 전체적인 전개를 보았을 때 전쟁의 결정적 국면은 1812년의 러시아 원정과 이후 독일,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일련의 전투들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또한 혹자는 프랑스가 오랜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하고 징병 가능 인구가 부족해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몰락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요컨대 프랑스가 적대국들과의 강화에 실패하고 전쟁을 속개하는 순간 전쟁 수행 능력의 한계가 드러났고 그것이 파멸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적 관점에서 워털루 전투가 그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것이 당대인들의 문화적, 심리적인 측면에 있어 큰 영향을 행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워털루 전쟁에 참가했던 전쟁 당사국들에게 있어 이 전투는 단순히 전쟁의 승리라는 측면을 넘어 국가의 집단 기억과 시각적 표상 전통의 일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예상컨대 프랑스는 워털루 전투의 결과로 말미암아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일 것이다. 엘바 섬에서 탈출해 빠른 속도로 정권을 재탈환한 나폴레옹은 정부에서 내려온 진압군을 회유하며 빠르게 수도 파리로 향했다. 나폴레옹이 퐁텐블로에서 파리로의 입성을 준비하고 있을 때 루이 18세는 동맹국들이 오기 전까지 파리를 사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왕실 근위대의 호위 속에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헨트로 굴욕적인 망명을 떠나야 했다.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시선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전과 같은 억압적인 형태가 아닌 유화책을 통해 반대파를 회유하는 한편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전쟁보다는 평화 협상을 통한 타개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빈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던 유럽 국가들은 나폴레옹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결국 일곱 번째 대프동맹이 결성되고 나폴레옹은 다시금 전쟁의 수렁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벌어진 워털루 지역 인근의 전투에서 그는 정치적 입지와 군사적 역량을 상실했고 결국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돌아올 수 없는 유배를 떠났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격변은 그 과정에서 벌어진 수많은 장병들의 피해와 지도층의 변화 그리고 일부 프랑스인들이 느꼈을 굴욕적인 감정을 남겼다. 이것이 일부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은 자명하다. 오라스 베르네가 그린 일련의 작품들은 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 <전쟁과 평화>(1820)에서 작품 속 농부는 밭을 갈던 중 나폴레옹 전쟁 시기 근위대의 투구를 발견한다. 한 손에 쥐고 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남자의 다부진 체격, 팔의 문신 그리고 관객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이 장구가 자신의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이 누구의 것인가는 작품의 주제 전달에 있어서 그렇게 큰 중요성을 띄지 않는 듯하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흙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옛 영광의 편린은 우리를 응시하는 농부가 한 때 나폴레옹과 함께 유럽 전역을 누비며 그가 누렸던 영광을 함께했다는 군인이었다는 점을 전달해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어두운 표정, 공손하게 모은 두 손 그리고 결정적으로 땅에 처박힌 병장기의 위치는 그의 영광이 한순간에 끝났으며 이제는 단지 농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남자가 느꼈을 감정은 비단 전경의 소품들뿐만 아니라 후경에 보이는 폐허와 같은 건물들의 모습에서도 전달되고 있다. 나폴레옹과 함께 군 시절을 함께했던 충성스러운 군인들이 왕정복고 이후 느꼈을 감정을 화가는 여러 가지 시각적 장치들과 인물의 표현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네의 그림은 세간에 공개되자마자 자유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을 환기시키는 그의 이미지들은 명백하게 현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보였다. 1815년 군대의 해산 이후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전쟁 베테랑들과 자유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그를 민족의 화가라고 칭송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지지아래 베르네는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하는 일군의 그림들을 계속해서 그려나간다. 그렇게 탄생한 일련의 나폴레옹 전쟁에 관한 그림들은 오늘날까지도 나폴레옹 전쟁에 관한 글과 영상 콘텐츠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며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전달해주고 있다.
나폴레옹과 관련한 이미지들이 지속적으로 억압받고 있던 왕정복고 하의 프랑스에서도 꾸준히 이와 관련된 주제를 화폭에 묘사했던 베르네는 동시대에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화가가 되었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그가 뛰어난 전쟁화가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심지어 부르봉 왕실마저도 그에게 작품 주문을 맡겼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처럼 프랑스 내에서 자신의 강점인 전쟁화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그가 결정적으로 프랑스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루이필리프의 7월 왕정이 들어선 이후이다. 이 시기 루이필리프는 이전 정권의 억압적인 정책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표현을 권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한다. 이러한 점은 공식 미술에서 사실상 금기시되었던 나폴레옹 전쟁 관련 주제들이 살롱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심지어 루이필리프는 베르사유 궁 내의 전쟁의 방에 전시할 작품 주문을 오라스 베르네에게 맡기기로 했다. 1836년에 완성한 세 점의 회화, <예나 전투>, <프리들란드 전투>, <바그람 전투>는 프랑스의 역사에서 나폴레옹 시절의 군사적인 업적이 적어도 문화의 영역에서는 복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상징성과 다르게 작품 자체는 그 해 살롱에 공개되자마자 몇몇 비평가들의 반발을 낳았다. 비난의 핵심은 작품이 그것이 담고 있는 기념비적 크기에도 불구하고 그에 수반되는 의미, 즉 도덕적인 메시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당대 아카데미에서 요구되었던 도덕적 메시지에 대한 강박은 베르사유 궁을 장식하는 베르네의 작품을 독해하는 데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한 비평가는 베르네의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아침 산책을 나온 말 조련사처럼, <프리들란드 전투>에서는 "첫 승마 교육을 받는 징집병"처럼 그려졌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그간 베르네가 완성한 그림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타당한 지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요컨대 작품 속 나폴레옹은 형식적인 관점에서 해당 전투의 극적인 현장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가 치렀던 수 없이 많은 전투 중 하나를 관망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도 아니면 그 모든 극적 사건이 끝난 뒤에야 사건의 현장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베르네의 나폴레옹 전쟁 3부작은 그 거대한 크기와 주제에 맞지 않는 메시지(요컨대 군인의 용기나 희생정신)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병사들의 전투 장면을 포착한 것과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이런 감상은 당대에 베르네가 그린 <아르콜 다리를 건너는 나폴레옹>이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더욱 분명하게 다가온다. 아르콜의 다리 전투 장면은 다리를 건너는 나폴레옹이라는 극적인 장면이 한 군인의 용감함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해 보였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실제 아르콜 다리를 둘러싼 일화들이 신화에 불과했고 진실은 그보다 더 따분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프랑스의 감상자들에게 아르콜 다리의 사건을 묘사한다는 것은 군인의 용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평론가들은 프랑스 역사에서 손꼽히는 전쟁영웅인 나폴레옹이 아르콜 다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투의 극적인 순간에 극적인 장면으로 묘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론가들의 비난과는 별개로 대중들에게 베르네의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것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해당 전투를 설명하는 많은 글, 영상에서 그의 작품이 전투의 대표적 삽화로 등장한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평론가들과 대중들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후일 미술사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서 전문가 집단과 대중들 간의 취향 차이를 예고하는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괴리가 어찌 되었든 베르네가 베르사유 궁 전쟁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완성한 3점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가 그린 나폴레옹 전쟁 주제의 회화가 다른 곳도 아닌 베르사유 궁에 들어간 것은 워털루 전쟁 이후 느꼈던 프랑스인의 굴욕감이 어느 정도 청산되었으며 다른 한편 사실상 금기되었던 나폴레옹 도상이 문화계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각적인 증거다.
패배자였던 프랑스만큼이나 워털루 전투의 승리자들 또한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다수의 회화를 제작했다. 이 중에서 연합군 측으로 참전한 네덜란드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일군의 화가들에게 워털루 전투 당시 네덜란드 군의 활약을 담은 일련의 회화들을 제작하게 했다. 그들에게 있어 워털루 전투는 국가의 존망과 직결된 중요한 전투였다. 게다가 워털루 전투의 전장이 다름 아닌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승리로 끝나자 이를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하는데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조치 중 하나가 워털루를 일종의 성지이자 관광지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유럽 각국의 관광객들은 네덜란드 당국이 인위적으로 쌓아놓은 사자의 무덤 같은 기념물과 표지판, 여행 가이드북, 바이런, 워즈워스과 같은 명사들의 작품집들을 안내 삼아 이곳을 방문했다. 이 중에서도 사자의 무덤 건립은 네덜란드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대표적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오라녜 공이 부상당한 위치에 6년에 걸쳐서 완성한 이 정체불명의 기념물은 그 꼭대기에 네덜란드 왕가를 상징하는 사자상을 놓음으로써 이곳이 네덜란드의 영광을 기리기 위한 장소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워털루 전투라는 역사적 사건에 네덜란드의 공헌이 적지 않음을 대외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 달리 당대 유럽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건립 당시 이 구조물은 몇몇 비평가들에게 나쁜 취향의 대표적인 예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그것이 본래 있었던 병사들의 무덤까지 훼손하고 있다고 여겼다. 당대의 비평에서 사자의 무덤은 워털루에 자란 사마귀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렸는데 낮은 구릉이 지배적인 주변 경관과 다르게 우뚝 서 있는 구조물의 피라미드 같은 외양으로 인해 그런 별명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전투의 당사자였던 웰링턴은 기념물 건립 과정에서 자신이 지휘 했던 구릉 인근이 크게 훼손된 것을 보고는 "나의 전장을 망쳐놨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구조물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쨌든 오랜 기간에 걸쳐서 만든 거대한 구조물이었고 나선으로 만든 길(이후 경사면을 따라서 올라갈 수 있도록 바뀌었다)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가면 주변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 또한 존재했다. 워털루 인근에 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을 넘어 네덜란드 정부는 국립 박물관인 레이크스 박물관을 중심으로 워털루 전투와 관련된 유물들을 적극적으로 수집, 전시하기도 했다. 이런 열성적인 수집의 결과 네덜란드가 모은 워털루 관련 컬렉션은 영국의 개인 컬렉터들이 모은 유물들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컬렉션으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영광스러운 전투의 현장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 기념하는 것에서 나아가 전투에 참가했던 인물, 대표적으로 참전 당시 오라녜 공이었던 빌렘 2세의 전투 당시의 모습을 화폭에 표현함으로써 지배층의 위대함을 부각하고자 했다. 그렇게 완성된 <워털루 전투>(1824)는 제1군단장으로 전투에 참전했다 부상을 당한 오라녜공을 포함해 영국과 네덜란드의 주요 지휘관들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크기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웰링턴의 모습과 좌측에 위치한 오라녜공은 빛의 처리와 구성 등을 통해 강조되고 있는데 비록 그가 전투에서 중요한 활약을 했다고는 하나 전투의 또 다른 주역인 프로이센군의 지휘관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작품이 네덜란드 왕가의 주문에 의해 의도적인 생략과 강조가 이뤄졌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비록 왕실 주문으로 그려졌지만 영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워털루 전투 10주년을 기념해 1824년 런던에 전시되었을 때 작품은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성황리에 전시되었다. 심지어 직접 작품을 위한 스케치 모델을 서기도 했던 웰링턴 자신도 이 작품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렇듯 <워털루 전투>가 당대에 런던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국가 후원이 프랑스만큼은 활성화되지 않은 영국에서 전투 장면을 거대한 회화 작품으로 표현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8-19세기 영국은 프랑스 같은 대륙의 유럽 국가들과 달리 국가 후원보다는 귀족 단위의 후원이 보다 발달했고 중앙집권적인 전시, 주문 체제보다는 화랑을 중심으로 하는 분권적인 전시 방식이 발달했기 때문에 역사화에서 볼법한 거대한 전쟁 기록화를 만들 일이 드물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로 8미터 세로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작품은 엄청난 스펙터클로 다가왔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전투의 격렬한 현장을 담은 작품도 아니고 워털루 전투에 참여한 주요 국가의 지휘관들을 모두 담고 있지는 않지만 런던에서 큰 인기를 얻은 데에는 이러한 요인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들의 승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시각화하고 또 홍보했던 네덜란드와 다르게 다소 복합적인 태도를 보였던 국가도 있었다. 전쟁 당사자이자 사실상 워털루 전투의 주역 중 하나였던 영국이 그 대표적 예다. 웰링턴이라는 걸출한 영웅을 탄생시킨 워털루 전투는 영국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중요한 전투였다. 그들에게 워털루 전투는 영국의 오랜 적수이자 폭군인 나폴레옹의 야욕을 꺾고 유럽을 다시 평화와 안정의 시대로 만든 중요한 전투로 여겨졌다. 전투 이후 나온 다양한 문학 작품들과 판화들, 회화들은 이러한 점이 영국의 예술계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국의 예술적 관례와 전통은 이 나라에서 프랑스나 네덜란드와 같은 거대한 전쟁 기록화가 탄생하는 것을 방해했다.
영국에서 전쟁화의 전통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시대의 사건에 그리스, 로마 시기 예술품에서 나타나는 자세를 활용하고 그것에 고귀한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역사화 형식은 일찍이 영국에서 활동했던 미국 화가 벤자민 웨스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가 완성한 <울프 장군의 죽음>(1770)은 오늘날까지도 역사화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며 이 분야의 거장 중 하나인 다비드 또한 그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웨스트의 선구적인 사례를 따라 영국에서 전쟁화는 이렇듯 장군이나 유명한 전쟁 영웅의 죽음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된다. 존 싱글턴 코플리의 <피어슨 소령의 죽음>(1783), 로버트 홈의 <뱅갈 공성전에서 무어하우스 대령의 죽음>(1793) 모두 그러한 전통이 영국 회화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전후 전쟁화에 새로운 유행이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 전쟁화는 전투와 주인공이 어우러지기보다는 전투 장면을 배경으로 처리하거나 주인공들과 구성상 분리시키는 구성을 취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일군의 작품들은 전쟁기록화라기보다는 집단 초상화에 더 가까운 형태를 보였다. 이러한 두 경향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 예술계에서 전쟁 장면을 묘사하는 두 경향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동시대의 전쟁을 묘사하는 것이 시민적 덕성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본 웨스트와 다르게 혁명 이후 탄생한 새로운 장르는 이러한 메시지의 전달 측면보다는 사건의 현장성을 강조하고 전투와 인물의 세부 디테일을 묘사하는 것을 강조했다. 마치 프랑스에서 다비드의 제자들과 르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쟁화를 그려냈던 것처럼 영국에서도 서로 다른 두 경향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균형이 급격히 무너진 것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였다. 이 시기 전쟁화는 그것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예술가들에게 큰 도박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 전쟁화는 하층민과 프랑스를 함의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군사주의적 모험을 담은 장면이나 암시를 화폭에 묘사하는 것이 중산층과 상류층들에게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 장르를 바라보는 부정적 분위기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격화되자 더욱 심해졌는데 심지어 전쟁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과 그가 후원하는 프랑스의 역사화가들과의 친연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르면 전쟁화는 자신의 친나폴레옹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시기 전쟁화를 그린다는 것은 이적행위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러한 억압은 심지어 벤자민 웨스트조차 나폴레옹 전쟁 시기 전쟁을 주제로 하는 소수의 스케치만을 남겼다는 점을 통해 드러난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이후였다. 영국의 대중들과 지배층들 모두 자신들이 쟁취한 승리가 시각적 결과물로 표현되길 원했다. 1815년 9월 1일 워털루 전투 이후 채 100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뉴 먼슬리 매거진에 실린 한 기사는 "우리의 예술가,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이 이 견줄 데 없고 결정적인 워털루 전투를 위해 일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중의 요구는 1816년 브리티쉬 인스튜티션이 상금을 걸고 워털루 전투에 관한 대규모 공모전을 개최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적인 노력과 대중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워털루 전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제작은 영국의 화가들에게 외면받았다. 공모전이 시작된 이후 1826년까지 단 16점만이 출품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무관심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것이 무관심인지 아니면 중산층과 상류층 관객들의 혹독한 비판을 피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바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이때까지도 온존 해있던 전쟁화에 대한 영국 지배층의 부정적인 감정은 이 나라에서 전투 장면을 통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공모전 기간 동안 16점이 출품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워털루를 기념하는 회화가 영국 내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회화나 조각 분야가 아닌 판화, 파노라마와 같은 대중 매체의 분야에서는 워털루 전투 장면을 그린 작품들이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상기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이 시기 워털루 전투를 대표하는 회화는 전투 장면을 담은 일련의 작품들이 아닌 아닌 데이비드 윌키의 작품 <워털루 급보를 읽는 첼시의 연금수령자들>(1818~1822)이 꼽히고 있다. 이 그림은 아서 웰즐리 즉, 1대 웰링턴 공작이 워털루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의뢰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문자의 명성에 걸맞게 1822년 작품이 전시되었을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작품이 단순히 그것의 주문자 때문에 인기를 모은 것만은 아니었다. 작품은 그 자체로도 당대의 회화적 관례를 독창적으로 결합한 파격적 작품으로 여겨졌고 이로 인해 고평가 받았다. 작품 속 배경은 런던 첼시 지구에 위치한 퇴역 군인들의 요양소다. 다양한 군복과 나이대의 퇴역 군인들은 워털루 전투의 소식을 담은 소식지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있다. 작품의 중심 주제를 전달하는 것은 책상을 중심으로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일군의 인물들이다. 당대에 발간된 카탈로그의 설명에 의하면 작품 속 인물들은 퇴역 군인으로 7년 전쟁부터 반도전쟁까지 다양한 전쟁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왼쪽의 기수가 전달한 소식지를 앞다투어 보고 있다. 이 작품이 로열 아카데미에 처음 전시되었을 당시 작품은 <1815년 6월 22일 목요일 런던 공보 특종을 읽는 연금수령자들, 워털루 전투의 소식을 알리다!!!>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때문에 관람객들은 작품 속 연금수령자들이 받는 소식이 워털루의 승리 소식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작품에서 주문자인 웰링턴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림이 전달하고 있는 전투 소식은 그 자체로 웰링턴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더군다나 화창한 어느 날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과 퇴역 군인들이 승리의 소식을 만끽하는 장면은 애국적인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언뜻 보기에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보일법한 풍속화의 형태를 취하는 듯 하지만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온전히 역사화의 그것에 필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이 작품에 대해 대중들이 큰 관심을 가졌던 이유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작품은 오늘날 벨기에에 위치한 워털루라는 현장에 집중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영국 본국을 무대로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당대에 워털루 전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현장 답사를 기반으로 전장의 지형적 묘사와 디테일에 천착해 역사화가 아닌 당대에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던 파노라마 형식의 풍경화와 같아졌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더없이 적절한 선택이었다. 심지어 런던이라는 지역의 선택은 전투 지역을 묘사하되 그러한 행위는 피해야 한다는 족쇄에서도 자유롭게 해 주었다.
끝으로 이 작품은 관람자와 주문자인 웰링턴 모두의 입장에서 당대 영국을 관통하던 껄끄러운 사안들을 적절하게 피해 가면서도 애국심의 고취라는 본래 작품 제작 취지는 효과적으로 살리는 좋은 작품으로 여겨졌다. 우선 대중의 입장에서 이 작품이 세상에 공개된 1820년대 초는 유래없는 경기침체가 있었던 해였기 때문에 작품이 좋았던 지난날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영국은 만성적인 실업률 상승과 기근, 재정 고갈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연금을 받지 못한 채 길거리에서 구걸을 해야 했고 이렇게 늘어난 부랑자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의 동요를 초래했다. 국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던 그 시기에 윌키의 작품은 현실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유토피아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연금 수령자들이 화창한 낮에 태평하게 앉아있는 모습은 진실이 어떠하였든 사회의 조화를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한편 웰링턴의 입장에서도 작품은 그로 인한 대중의 혹독한 비난을 면제받을 수 있는 안전한 결과물이었다. 피털루 학살로 대표되는 당대의 사회적 동요는 토리당의 당수였던 웰링턴의 입지를 날로 불안하게 했다. 웰링턴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가 결정적으로 꺾인 건 캐롤라인 왕비를 두고 벌어진 정치적 다툼 때문이었다. 당시 왕이었던 조지 4세에게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이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둘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지 4세가 왕으로 즉위하자 그녀를 왕비의 자리에서 박탈시키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녀를 불쌍히 여겼던 대중들의 반발로 인해 이러한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웰링턴이 속해 있던 토리당은 왕의 입장을 따라 캐롤라인의 왕비 신분을 박탈시키는 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었다. 웰링턴의 인기가 빠르게 식어간 것은 당연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금 수령자들을 네덜란드 풍속화의 형식으로 묘사한 것은 연금수령자가 당대에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함의를 희석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당대에 웰링턴의 비판자들은 이러한 제도가 국가 재정에 심대한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을 웰링턴과 엮어 풍자하는 삽화들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윌키의 작품은 연금 수령자들을 통해 애국심이라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재밌는 것은 웰링턴의 반대자들 또한 이 작품에 대해 나쁘지 않은 평가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네덜란드 풍속화의 표현방식에 따라 다소 우스꽝스럽게 행동하는 연금 생활자들의 모습을 일종의 풍자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렇듯 세심한 선택으로 영국 예술계와 대중들 모두의 호의를 얻은 윌키의 작품들과 다르게 공모전에 출품했던 대부분의 작품들은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가령 공모전에서 우승한 조지 존스의 작품 <워털루 전투>(1816 혹은 1820)는 지나치게 높게 설정된 시점과 파노라마 형식의 넓은 풍경 묘사, 작게 표현된 인물과 디테일에 치중한 전투 장면까지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오늘날 스케치만 남아있는 제임스 워드의 <웰링턴 장군의 승리>(1821) 혹은 <사추덕(cardinal virtues)과 함께 전쟁 마차에 올라 세 악마, 무질서, 반란, 전쟁의 불화와 공포를 몰아내는 웰링턴>(1821)은 통제되지 않은 알레고리의 폭격으로 인해 작품을 위해 돈을 내고 심지어 전시까지 한다는 것이 놀림거리가 되었을 정도였다.
한편 이 시기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화가 한 명도 워털루에 대한 그림 한 점을 남겼다. 윌리엄 터너는 워털루 전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제작에 착수하며 기존의 전쟁화에서 관습적으로 처리되었던 요소들을 급진적으로 전복시켰다. 그 결과 탄생한 <워털루 전장>(1815)은 동시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아연실색할만한 풍경을 창조했다. 터너는 바이런 경의 장편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를 기반으로 작품 제작에 착수했다. 바이런 경은 작품 속에서 유럽을 여행하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워털루 전장에 대해 표현한다. 제3곡에서 주인공은 전장을 둘러보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기수와 말, 적과 친구가 하나의 붉은 무덤 안에 섞여있다." 승전국 시민의 언급이라 볼 수 없는 우울한 감상은 터너의 작품 카탈로그에 인용되었으며 그의 작품에서도 시구에 나오는 이러한 감상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작품은 공개되자마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전장에서의 죽음이란 주제가 과거 영국에서 흔한 주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일반 병사와 여인들의 모습은 그러한 회화 전통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현지답사를 기반한 지형묘사와 파노라마적인 시점 선택은 이미 당대에 워털루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작품에서 시도되었던 전쟁화의 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익숙한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달하는 강렬한 이미지는 관객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과거 죽음이라는 소재가 애국심의 결과로 인한 숭고한 죽음에 가까웠다면 터너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죽음은 비참한 죽음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이 작품은 웨스트나 코플리의 작품이 일으켰던 반향만큼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당대의 평가가 어찌 되었든 작품이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 자체는 비단 당대인들뿐만 아니라 현재의 관객들에게도 전달되는 것으로 보인다. 달밤 아래 마치 덩어리처럼 모여 있는 시체들과 그들의 유품을 찾아 헤매는 일군의 사람들은 그것이 승리 직후의 광경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날 것 그대로의 전장을 보여준다. 실제 전투 직후에 지역민들에 의해 광범위한 약탈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하더라도 터너의 작품은 승리의 영광 이면에 존재하는 병사들의 고통을 가감 없이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전투가 4만에서 5만 명이 넘는 사상자로 인해 당대에도 끔찍한 유혈극으로 회자되었다는 점을 모르더라도 전투의 치열함과 참상은 그대로 전달된다. 끝으로 전투 직후 전사한 남편과 연인을 찾기 위해 전장을 돌아다닌 미망인들의 이야기가 영국 내에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굳이 알지 못하더라도 전경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전장의 비극은 그대로 전달된다. 터너의 작품은 승리의 축배와 패배의 멜랑콜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매정한 진실을 다소 과장된 풍경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장의 지옥도에서 관객들은 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 작품 속에서 승자는 없다. 오라녜 공의 용감무쌍함도 황제 근위대의 장렬한 최후도 나폴레옹의 비극적 종말도 웰링턴의 기지와 블뤼허의 극적인 합류도 없다. 오직 쌓여있는 시체더미,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아들이고 연인이었을 이름 모를 병사들의 무더기만이 있을 뿐이다. 터너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워털루의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