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앵그르는 제국 행정관이자 가까운 친구였던 샤를 마르코트 다르장퇴유에게 편지를 보낸다. 얼마 전 그가 주문했던 작품의 완성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작품은 주문자가 1810년 로마에 체류했을 당시 앵그르의 작업실에서 보았던 미완성 스케치에 기반한 것이었다. 교황 비오 7세가 추기경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스케치한 이 작품에 마르코트는 감명받았고 이후 부임지가 로마에서 저지대 국가로 바뀌자 로마에 머물렀던 기념품으로 앵그르의 작업실에 있던 그 작품을 완성품으로 만들어주길 요청했던 것이다. 1812년 당시 교황이 로마가 아닌 퐁텐블로에 억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마르코트의 요청은 다소 의아하다. 물론 마르코트가 나폴레옹 정권을 위해 일하는 관료임에도 자신의 저택에 별도의 예배당을 건설했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은 그가 교황의 모습을 담은 회화 작품을 원했던 이유를 뒷받침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이 앵그르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사실까지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당시 앵그르는 로마상 수상으로 3년간의 로마 체류 기간을 끝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탈리아에 머무는 중이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여러 가지 주문과 이탈리아 내에 머무는 프랑스인들의 주문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앵그르는 1814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공교롭게도 그가 로마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해는 나폴레옹의 첫 번째 몰락이 시작된 해이자 마르코트가 교황의 미사 집전 장면을 주제로 하는 회화 작품을 주문한 해이기도 했다. 세로 74.5cm, 가로 92.7cm의 비교적 작은 사이즈는 이 그림이 동시대 살롱에 전시되던 그림들처럼 어떤 특수한 정치적 목적이 아닌 기념품이자 저택의 실내 장식품이라는 주문 의도에 맞게 제작된 그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단순히 한 개인의 로마 체류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단순한 해석 이상의 암시를 준다. 마르코트가 이 작품의 제작을 주문했을 때 그가 보았던 작품은 1809년 앵그르가 완성한 한 점의 스케치였다. 성좌에 앉아 있는 비오 7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스케치는 그대로 1814년 작품 속의 비오 7세의 모습에 반영되었다. 앵그르는 마르코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흰색 미사복을 입은 교황의 모습이 "교황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음을 고백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이런 복장의 선택은) 앵그르 자신이 교황의 미사 집전 장면을 보았던 기억에 의존한 것이었다"라고 해명했다. 그가 편지에서 스스로 밝혔듯 앵그르는 이 장면을 그가 멀리서 보았던 교황의 미사장면을 토대로 완성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온전히 작가의 창작으로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자체는 비록 주문자의 요구에 맞게 제작된 작품이었을지언정 그것의 세부적인 구성에 있어서는 온전히 작가의 창작이 들어갔으며 따라서 작품을 제작했을 당시 교황이 처한 상황에 대해 화가가 느꼈을 감정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림 속에서 설정하고 있는 장소와 작품 속 교황의 모습 그리고 인물들의 배치와 구성방식을 보면 이 작품 속에서 앵그르가 노리고자 했던 것은 구질서의 복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속에서 교황은 높은 성좌 위에 앉아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렇듯 교황을 화면 속 사건의 중심인물로 위치시키는 것은 작품 제작에 착수했을 당시 교황의 입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이후 비오 7세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 시기 교황령은 프랑스의 속주로 편입되어 과거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주교임명권 또한 나폴레옹의 지속적인 요구로 인해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유럽 내부에서 교권은 땅에 떨어졌고 사실상 교황 자신의 신변 또한 나폴레옹의 변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다. 가톨릭 내부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이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한 여론은 나폴레옹의 교황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력 행사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다. 다비드의 작품 <대관식>에서 수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교황의 모습은 이러한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각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속적인 교황권에 대한 억압 속에서 교황은 나폴레옹을 파문시키는 등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모두 취했지만 이는 나폴레옹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교황과 황제 사이의 갈등은 결국 교황의 납치와 유폐라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했다. 이 시기 교황은 사실상 나폴레옹의 정치적 볼모였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앵그르의 회화 작품을 보았을 때 이 작품이 단순한 작가의 상상력의 발현일뿐만 아니라 작가의 열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비드의 작품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던 교황은 이제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며 화면 속 모든 사건을 주재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고전적인 장식이 덧대어진 노트르담 성당과 교황의 권위가 구현된 시스티나 성당의 대비는 작품이 명백하게 다비드의 대관식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화면의 좌측 교황청 경비병의 복장을 한 앵그르의 모습은 이러한 대비를 더욱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과거 <대관식>에서 사건의 목격자로 자신을 작품 속에 포함시켰던 다비드처럼 앵그르는 이 미사의 목격자로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 속 모든 구성의 사실상 상상에 의거한 창작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목격자로서의 작가는 의사-현장감을 전달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을 묘사했던 스승 다비드에 대한 명백한 오마주다. 여기에 더해 화면의 우측, 작품의 1/5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최후의 심판>은 앵그르가 어떤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는지 드러내고 있다. 작품 속에서 최후의 심판이 묘사된 벽면과 좌측의 벽면은 직각 형태의 실제 성당의 모습과 다르게 완만한 각도로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원근법의 일반적인 묘사 규칙에서 어긋난듯한 내부의 모습은 앵그르가 의도적으로 <최후의 심판> 강조하기 위해 마련한 회화적 장치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로마 체류 기념품을 원했던 주문자의 의도대로 화면 속 장소가 시스티나 성당임을 알려주는 고유한 지표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점에 더해 <최후의 심판>은 교황의 권위를 침해한 존재(이를테면 나폴레옹)가 어떠한 최후를 맞게 되는지를 강조하는 시각적 알레고리로 기능하고 있는 듯하다. 화가의 이러한 암시는 1812-13년 교황의 수난과 나폴레옹의 최후라는 당대의 정치적 환경과 결부시켜 생각할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여러 회화적 장치들을 보았을 때 작품은 황제의 영광을 칭송하려던 <대관식>과 명확한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앵그르가 이 작품을 완성한 1814년은 모든 것이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시기였다. 비록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본토로 돌아오지만 첫 번째 몰락 이후 그가 누렸던 영광은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때문에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 비오 7세가 로마로 돌아온 것은 마침내 유럽이 과거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그의 작품이 비단 한 개인을 위한 기념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유럽의 질서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시각적인 상징물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징물은 비단 앵그르뿐만이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제작, 유통되었다. 루이필리프 크레팽의 작품 <1814년 4월 24일 부르봉 왕조의 복귀에 대한 알레고리, 프랑스의 폐허에서 일어난 루이18세>(1814)은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나폴레옹의 첫 번째 유배 이후 제작된 이 작품 또한 명백히 다비드의 작품 <대관식>을 의식하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이 그의 아내 조세핀에게 관을 수여했다면 이 작품에서 막 망명에서 돌아온(후경에 있는 배는 그가 망명에서 막 돌아왔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루이 18세는 부르봉 왕조의 전통적인 관과 의장을 갖춘 채 쓰러지려고 하는 한 여인을 일으키려고 한다. 프랑스 알레고리로 등장하는 이 여인은 지난날의 고통에서 벗어나 루이18세의 부축을 받고 다시 일어나려고 한다. 그러한 모습을 좌측에 있는 루이 16세의 딸인 앙굴렘 공작 부인(마리테레즈 드 프랑스)과 대신들이 지켜보고 있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행위들과 상징들은 모두 과거 공화국이라는 오명 속에서 더럽혀진 프랑스를 다시 회복시키고 절대왕정으로의 회귀를 표명하는 시각적인 선언처럼 그려지고 있다. 비록 다비드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크레팽의 작품은 인물들의 뻣뻣한 묘사와 다소 기계적으로 처리된 중경 속 인물들의 모습으로 인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의미 자체는 다비드의 작품 <대관식>에 견줄만하다. 이렇듯 유럽의 왕들이 복귀하는 장면을 담은 일련의 회화 작품들은 1814년을 기점으로 유럽 곳곳에서 제작되었다. 다비드의 제자였던 독일 화가 요한 페터 크라프트의 작품 <1814년 6월 16일 파리 평화 조약 이후 비엔나로 입성하는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1828), 고야의 <야영지에서의 페르난도 7세>(1815) 모두 유럽이 왕 중심의 구질서로 복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각적인 상징물로 기능했다.
한편 연합군의 승리는 어떤 화가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영국 화가 토마스 로렌스는 그러한 기회 속에서 승리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당대에 초상화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1814년 5월 나폴레옹의 첫 번째 유배 직후 런던에 모인 세 나라의 왕과 원수들(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의 초상을 제작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얼마 안 가 나폴레옹이 다시 정권을 잡고 유럽은 100일간의 짧은 전쟁에 돌입해 로렌스의 첫 번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그가 이 시기 잡았던 초안들은 이후 로렌스의 삶에서 중요한 여정을 형성한다. 1818년 9월 엑샤펠과 빈에서의 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로렌스는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샤를 스튜어트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승리의 주역들을 묘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일련의 초상화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초상화에 묘사된 인물들을 대표하는 시각적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인물은 블뤼허였다. 1814년 런던 회담 당시 참석했던 이 프러시아의 늙은 원수는 저돌적인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 전장 속에서 지휘를 하는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로렌스는 1814년 회담 당시 블뤼허를 그린 스케치를 여러 점 그려놓은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비교적 빠른 시간이 이 원수의 초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한편 엑샤펠에 체류했을 당시 로렌스는 러시아의 황제 알렉상드르 1세의 초상을 완성했다. 블뤼허와는 다르게 손을 모은채 다소 온화한 모습으로 그려진 황제의 모습은 러시아 정부의 후원 속에서 제작되었다. 이 그림이 러시아 정부의 후원 속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은 로렌스가 남긴 기록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에서도 나타난다. 화면의 우측에 보이는 외투와 모자는 알렉산드르 1세가 라이프치히 전투 당시 착용했다고 알려진 복장으로 로렌스가 엑샤펠에서 초상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당시 러시아 사절단이 보낸 소품들 중 하나다. 외투와 모자가 단순히 알렉산드르 1세의 군사적인 업적을 상징하는 장치가 아닌 구체적인 전투(라이프치히 전투) 당시 착용했던 물품이었다는 점은 러시아 당국이 로렌스의 황제 초상화 작업에 대해 간접적으로 관여하고자 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러시아 당국이 생각하기에 황제의 모습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라이프치히 전투를 배경으로 해서 묘사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이 러시아에서의 후퇴 이후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던 이 전투는 알렉산드르 1세의 군사적인 업적을 칭송함과 동시에 전투 자체가 나폴레옹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초상화의 배경으로 더없이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이렇듯 전투의 장면을 초상화와 결합하는 것은 이전 글들에서 살펴보았듯 당대의 초상화 관례에서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초상화에서 그런 점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블뤼허의 초상화에서 작가가 배경을 포연과 구름으로 모호하게 처리했던 것처럼 알렉산드르 1세의 초상에서 배경은 거의 추상화에 가까운 형태로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검은 색조가 주를 이루는 배경은 황제가 전장 한가운데에 있다는 점을 암시해 주는 듯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전투인지 작품만을 보고서는 알 수 없다. 비록 소품들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전장이 라이프치히 전투와 연관이 있는 어딘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겠으나 지역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풍경의 부재가 이러한 연상작용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로렌스가 그린 초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빈 체류 당시 완성한 연합군의 사령관 카를 대공의 초상은 이러한 특징을 더욱 극단적으로 끌고 나간 것으로 보인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적수였다는 평가와는 달리 작품 속에서는 그 어떤 군사적인 소품도 화면 속에 등장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원수들과 황제의 초상화에서 최대한 배경은 생략하고 인물의 묘사에 집중했던 그의 전략은 상징의 포화를 통해 인물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던 기존의 초상화 관습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인물의 외양이 단순히 외양적 특징을 넘어 대상의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써도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인물의 감정과 특성을 묘사하는 것에 주력했던 낭만주의 사상에 작가가 깊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초의 낭만주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평가받는 토마스 로렌스는 이렇게 지배자의 초상을 그릴 때도 자신의 회화적 신념을 화폭에 녹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역설적이게도 그림 속 인물들이 왕정복고를 주도한 지배자들의 그림임에도 19세기 초라는 시대적 상황, 다시 말해 자유, 평등, 박애(동지애)가 한차례 유럽을 휩쓸고 간 이후의 유럽을 반영하는 시대적 증거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엑샤펠과 빈에서 모였던 전쟁의 승리자들은 유럽의 체제를 프랑스혁명 이전의 절대왕정 체제로 돌려놓고자 했다. 회담 이후 그들이 자국에서 취한 일련의 정책들은 분명 반동적이었으며 그것은 아주 짧은 기간 유럽 전역에서 효과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미 새로운 시대를 향한 문은 한 차례 열린 뒤였고 그 문 너머의 세계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갑갑한 왕정의 궁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승리자를 기념하는 로렌스의 초상화가 로코코, 바로크의 초상화가 아닌 낭만주의 초상화 양식으로 제작된 것은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의 편린으로 읽힌다. 과거로 시곗바늘을 돌리려는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무위로 돌아간다는 점을 초상화는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814년부터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자들을 묘사한 일군의 초상화 제작에 착수했던 로렌스는 1819년 교황 비오 7세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그의 나이에 맞지 않은 검은 머리(비오 7세가 1823년 사망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했을 때 이런 묘사는 분명 로렌스의 의도적인 왜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를 한채 의자에 앉아 있는 교황의 모습은 과거 황제와 원수들의 초상화에서 나타났던 인물들의 모습과는 달리 소극적인 인상을 준다. 이러한 점은 비단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인물의 자세뿐만 아니라 드물게도 배경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강조되고 있다. 어부의 반지를 끼고 있는 손 위로 나폴레옹 박물관에 있다가 로마로 돌아온 두 점의 작품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라오콘>과 <벨베데레의 아폴로>는 교황이 마침내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그림에서 배경은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교황의 모습은 자신의 권위를 찾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은 보다 작게 표현된 앵그르의 교황보다 권위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두 작품 모두 화면의 주인공으로 교황이 그려져 있지만 미사를 집전하는 앵그르의 교황과 바티칸 박물관 한 켠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로렌스의 교황은 화가들의 목적이 어떠하였던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후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감상자의 입장에서 이런 차이는 그 자체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화가의 증언으로 비친다. 가톨릭은 이제 지난날과 같은 힘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19세기 내내 벌어진 가톨릭 부흥 운동의 물결에도 세속주의는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비록 문화와 심성의 영역에서 가톨릭은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축으로 남아있었지만 그것이 곧 그들이 과거 누려왔던 정치적 지위의 복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승리자들의 초상을 기록한 로렌스의 초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유지하려고 했던 구체제의 필연적인 몰락을 예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몰락이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몰락하게 된 1814-15년의 일련의 그림들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의 100년이 과거의 100년과 같지는 않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많은 격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한 번 열린 문을 통해서 목격된 새로운 정치적 풍경은 유럽인들에게 더 이상 그들의 삶의 방식을 과거와 같은 것으로 유지할 수 없게 했다. 유럽의 19세기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