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by 에델
755px-thumbnail (1).jpg 프랑수와 제라르, <루이스 앙투아네트 란의 초상>, 1814, 휴스턴 현대미술관.


1814년 나폴레옹의 첫 번째 실각 직후 프랑수와 제라르는 한 미망인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수주받았다. 작품을 주문한 이 미망인은 5년 전 전사한 부군의 군사적 업적을 기림과 동시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억할 수 있는 가족 초상화 주문을 부탁했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 <루이스 앙투아네트 란의 초상>(1814)은 장 란 원수의 부인과 그의 자식들을 그린 가족 초상화다. 작품 완성 당시 10-13세에 불과했던 미망인의 자식들은 모두 프랑스 군복을 본뜬 복장을 입은 채 캔버스 앞에 섰는데 이를 통해 장 란 원수의 군사적인 능력과 용기가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림에서 주목할 점은 화면 좌측으로 여기에 대부분의 모습이 잘려 하반신의 일부만 묘사된 동상 하나가 서 있다. 작품의 주문자와 조각상에 묘사된 대포알은 그것이 장 란 원수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이 조각상은 비록 화면 한 켠을 전부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다른 가족들과는 떨어져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화가가 조각상이 아닌 공작부인을 중심으로 피라미드 형태로 가족들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프랑수와 제라르가 당대에 유명한 초상화가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이것을 단순한 구성상의 실수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배치는 란 원수 가족을 바라보는 제라르 본인의 시선이 어느 정도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남편의 사망 이후 미망인, 즉 몬테벨로 공작부인은 장군의 명성에 걸맞게 프랑스 사교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현명하게도 자신을 주목하는 프랑스 사교계와 거리를 두고 영지에 주로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처신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몰락 직후 그녀의 가족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제라르가 죽은 장 란이 아닌 그녀를 화면 구성의 중심에 위치시킨 이유이기도 했다. 요컨대 작품은 부군의 용감한 군사적인 업적을 칭송하는 것만큼이나 정치적 위협 속에서 가족들을 지켜낸 공작부인의 능력 또한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장군이 아닌 그의 부인을 칭송한 제라르의 선택은 이 시기 나폴레옹과 연관된 일련의 도상들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것은 당국으로부터 과거의 폭압적인 정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화가들은 나폴레옹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더 이상 프랑스 정부에게 매력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폴레옹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가족 초상을 제작하는 와중에도 이러한 당국의 억압은 화가들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문화의 영역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09354.jpg 샤를 자크 레벨, <생 베르나르의 병원을 방문하는 보나파르트>, 1810, 베르사유 궁.


100일 남짓한 짧은 재집권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소수의 외부 방문객만을 받은 채 여생을 보내다가 1821년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나폴레옹의 죽음과 동시에 유럽에서 그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가 뿌린 유산들이 19세기에 여러 변화를 추동할지언정 그의 영향력 자체는 완전히 소멸한 것이다. 정치 분야에서 이것은 얼마간 사실로 보였다. 그의 후계자라 자처하는 사촌이 프랑스에서 다시 정권을 잡을 때까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팽창주의적 야욕과 연관된 독재자의 동의어였다. 문화 분야에서도 이러한 점은 일정 부분 진실로 보였다. 살롱에서 나폴레옹 시기 전쟁을 다루는 회화는 대부분 자취를 감췄으며 그 자리를 부르봉 왕실과 옛 질서를 찬양하는 그림들, 고전 고대로 회귀한 일련의 그림들이 차지했다. 샤를 자크 레벨의 작품 <생 베르나르의 병원을 방문하는 보나파르트>(1810)이 군사적 업적을 강조한 다른 그림들과 다르게 왕정복고 이후에도 여러 화가들의 전거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변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명백히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기간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에서 나폴레옹은 과거 다비드가 그러하였듯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화면 왼쪽에 펼쳐진 일련의 모습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프랑스 대육군이 가톨릭 수도승들이 건네준 자선행위로 인해 험난한 알프스를 넘었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나폴레옹 정권 하에 그려졌음에도 왕정복고시기의 프로파간다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 자체가 가진 가톨릭적 함의, 다시 말해 구체제로 억압받았던 가톨릭은 심지어 자신들을 적대하는 존재들에게도 사랑을 베푼다는 바로 그 메시지를 작품 속에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정복고 이후 나폴레옹에 대한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제약 하에서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왕정복고 기간 동안 프랑스 당국은 나폴레옹에 관한 이미지, 특히 나폴레옹과 군사적 업적을 찬양하는 이미지를 단속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군사적 업적을 찬양하는 많은 작품들은 공개적으로 파괴되거나 박물관의 창고에 박혀 빛을 보지 못하였고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미지들은 당국의 검열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옛 황제의 존재를 프랑스에서 지운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는 이미 프랑스 문화, 예술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예술의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판화와 같은 대중 매체 분야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서 나폴레옹 이미지는 왕정복고 이후 줄어들기는커녕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화가들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치적으로 힘을 상실한 나폴레옹이 상징, 은유의 언어를 통해 마치 유령처럼 프랑스 본토에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39823111-tombeau-de-napoléon-à-sainte-hélène-illustration-vintage-gravé-hist.jpg 작자미상, <세인트 헬레나 섬의 나폴레옹 무덤>, 1830년경, 맥길 대학 도서관.
160240.jpg 프랑수아 뤼드, <불멸을 깨닫는 나폴레옹>, 1847, 오르세 미술관.


역설적이게도 세인트 헬레나라는 공간은 그러한 점을 더욱 부추긴 측면이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머나먼 섬의 위치는 유럽인들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다양한 환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세인트 헬레나 섬을 방문해 나폴레옹을 만난 극소수의 인물들이 남긴 글은 그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데 일조했다. 나폴레옹의 유배를 바라보는 당대인들의 시각은 그가 유럽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보여준다. 이 시기 나폴레옹의 몰락은 밀턴의 <실락원>에 나오는 사탄의 추방,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의 형벌 등과 연결되었으며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는 자유를 위한 순교자의 최후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졌다. 유럽 대륙과 세인트 헬레나의 물리적 거리는 그를 잊히게 하기는커녕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하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들은 세인트헬레나와 나폴레옹을 묘사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과거 군사적 영웅으로 칭송되었던 나폴레옹은 이제 판타지와 현실이 뒤섞인 모호한 존재로 그려진다. 1830년경 묘사된 나폴레옹의 무덤은 그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묻힌 세인트헬레나는 열대기후가 두드러진 섬이었지만 작품 속에서 그러한 섬의 기후적 특징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판화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소는 실제 나폴레옹의 무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는다. 무덤 자체는 섬의 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무덤의 위치에서 해안과 절벽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화의 제작자는 세인트 헬레나의 지리적 정보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것은 그가 달빛이 비치는 밤 시간대를 채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19세기 시각 문화에서 밤, 특히 달빛 아래의 풍경은 그 지역의 초자연적인 특징을 강조하고자 할 때 널리 이용되었다. 때문에 판화를 보았던 당시 프랑스 대중들은 세인트 헬레나라는 공간을 실제 존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현실과 환상이 결합된 가상의 공간처럼 여겼을 것이다. 이렇듯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세인트 헬레나라는 공간은 나폴레옹이 비록 현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초월적인 힘을 통해 프랑스인들에게 정신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폴레옹을 단순히 군사적 재능을 지닌 천재가 아닌 초현실적 능력을 가진 무엇으로 묘사하는 것은 프랑수와 뤼드의 작품 <불멸을 깨닫는 나폴레옹>(1847)에서도 드러난다. 뤼드의 작품은 1840년대를 전후로 예술가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그려진 나폴레옹 부활도상 중 하나를 채택하고 있다. 머리에는 황제의 상징인 월계관을 쓰고 군복을 입은 채 수의를 덮고 있는 나폴레옹은 죽음의 순간 팔에 머리를 괸 채 사색에 몰두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사색을 마치고 눈을 뜬 순간 나폴레옹은 한 명의 인간으로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불멸을 깨달은 위대한 존재로 거듭난다. 작품에 부여된 내러티브는 그가 더 이상 하나의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화된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55777-1330621633.jpg 폴 들라로슈, <세인트 헬레나의 나폴레옹>, 1856, 런던 로열 콜렉션.
Horace_Vernet_(1789-1863)_-_Napoleon's_Tomb_-_P575_-_The_Wallace_Collection.jpg 오라스 베르네, <나폴레옹의 신격화>, 1821, 월리스 콜렉션.
152626.png 장 알로, <세인트 헬레나의 무덤의 알레고리 : 나폴레옹의 군대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다>, 1837, 베르사유 궁.


물론 그가 언제까지고 초현실적인 무엇으로 묘사된 것은 아니다. 그가 누렸던 권력과 몰락은 그 자체로 예술가들에게 큰 창작의 원천이었다. 예술가들의 눈에 그의 성공과 실패는 능력은 있으나 끝내 좌절하고 마는 낭만주의적 영웅상의 전형이었다. 폴 들라로슈의 <세인트 헬레나의 나폴레옹>(1856)은 이러한 측면의 일면을 보여준다. 절벽에서 지평선을 바라보는 나폴레옹 도상은 당대에 나폴레옹의 좌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여겨졌다. 화면의 중심에 비껴 난 채 바위에 앉아 사색에 몰두하는 작품 속 나폴레옹의 모습은 과거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그려져 있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의 묘사는 마치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라는 풍경에 압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화가는 나폴레옹을 절벽에 붙어있는 부조상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묘사는 섬을 벗어날 수 없는 나폴레옹의 처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오라스 베르네의 작품 <나폴레옹의 신격화>에서 이러한 절망감은 더욱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나폴레옹이 사망한 이후를 그린 베르네의 작품은 장소, 상황, 환경 등 모든 것이 순전히 작가의 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가는 이를 통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죽음을 기록하기보다는 그가 일궈낸 영광과 신화적 업적이 어떻게 종말을 맞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작품 속에서 나폴레옹을 드러내는 다양한 상징들이 곳곳에 등장한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나운 파도가 몰아치는 세인트 헬레나의 절벽 인근에 묻힌 나폴레옹의 무덤 옆에 자신을 마지막까지 보필하던 두 명의 장군, 몽토롱과 베르트랑이 슬픔에 잠겨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쌓아 올린 봉분과 그 위에 올려진 이각모는 이곳이 나폴레옹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지표임과 동시에 유럽을 누비던 지도자의 허망한 최후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화면의 우측, 이제는 영혼이 되어 나폴레옹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일군의 병사들이 나폴레옹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복장에서도 알 수 있듯 나폴레옹과 함께 유럽을 누리던 병사들이었다. 척탄병, 경보병, 후사르 등 각 병종을 상징하는 다양한 군복을 입은 프랑스 대육군의 유령은 과거 유럽 대륙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의 군대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유령이 된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레옹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은 당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좌절과 실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도상으로 널리 활용되었는데 장 알로의 작품 <세인트 헬레나의 무덤의 알레고리 : 나폴레옹의 군대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다>(1837)는 유사한 방식으로 대육군을 묘사한 또 다른 사례다. 이렇듯 유령이 된 프랑스 병사들의 모습을 나폴레옹과 결합시키는 것은 일찍이 얀 루이 지로데가 선보인 바 있었던 오시안 신화의 알레고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들이 주로 그 배경을 천상의 장소 혹은 초자연적인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나폴레옹의 무덤과 연관된 프랑스 대육군의 유령들은 세인트 헬레나라는 분명한 지리적 지표 속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소재로 하는 예술작품들은 19세기 전반기 동안 다양한 상징과 함의들을 지닌 채 몇 번이고 등장하여 동시대 프랑스 예술의 주요한 장르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본 연재는 일단 나폴레옹의 도상이 그의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점만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선에서 글을 줄일까 한다. 나폴레옹 전쟁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 유럽 대륙을 전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 유럽 대륙은 구체제로 상징되는 과거의 정치, 사회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비록 짧은 기간 반동적인 경향이 나폴레옹 전쟁의 나비효과를 억제했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댐을 손가락으로 막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는 점은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한편 예술의 영역에서 그것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서양 근대 미술의 두 축이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 시기 활동했던 다비드, 그로, 제리코, 고야, 터너, 르죈 등의 화가가 이후 약 100년간 유럽 대륙에서 명멸했던 다양한 사조의 뿌리를 제공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문화의 관점에서도 나폴레옹 전쟁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로 인해 나폴레옹 전쟁 시기는 단지 전쟁사 혹은 정치사의 영역이 아닌 미술사의 영역에서도 다양한 연구거리가 존재하는 흥미로운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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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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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후기


제가 참고한 대부분의 글들은 90-00년대 이른바 다비드 화파의 성립과 발전, 분화를 연구한 일련의 영미권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특히 연재 내내 주요 참고문헌이었던 토마스 크로(Thomas E. Crow)의 책 Restoration: The Fall of Napoleon in the Course of European Art, 1812–1820와 케이티 호른스테인(Katie Hornstein)의 책 Picturing War in France, 1792–1856은 사실상 이 연재가 제공한 정보들의 기반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나머지 참고문헌들 또한 제가 직접 검색한 것도 있지만 해당 책의 참고문헌에 등장한 연구자, 저서를 역으로 검색해 알게 된 논저들이 대부분입니다. 끝으로 나폴레옹 사후 나폴레옹 도상이 시각 문화 전반에서 다시 나타나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에 대한 이미지가 소비된 양상은 알리사 아담스(Alissa R. Adams)의 2018년 박사학위논문인 French depictions of Napoleon I's resurrection (1821-1848)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논문의 경우 한 챕터를 할애하여 나폴레옹 이미지가 예수의 부활 혹은 승천 도상과 결합하는 경향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나 이 부분을 연재에서는 전부 생략해 버렸습니다. 혹시 이 부분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일독을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주요 레퍼런스 저자 중 하나인 토마스 크로는 본디 한국에서 미국 미술에 대한 글로 많이 알려진 인물입니다.(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책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 <60년대 미술 - 순수미술에서 문화정치학으로>들이 한결같이 현대 미술을 다룬다는 점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주전공은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근대 미술입니다. A. W. Mellon Lecture Series를 기반으로 한 그의 책도 주로 이 시기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소 난해한 단어들을 많이 사용해 독해에 어려움이 있는 책이었지만 그럼에도 저자 자체가 워낙 이 분야의 석학이기도 하니 해당 시기 미술의 양상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케이티 호른스테인의 책은 2010년대 이후 19세기 미술 연구가 다변화된 상황을 반영하는 저서입니다. 추정컨대 저자의 박사논문을 저본으로 하는 이 책(박사 논문 또한 참고 문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은 연재를 시작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책입니다. 한국에서 서양근대미술사 과목이라고 하면 으레 신고전주의(그나마 업데이트가 된 곳은 18세기 고전주의나 로코코)부터 시작해 모더니즘(심지어 그린버그식 모더니즘) 회화로 가는 여정을 다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비드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와 전통적인 미술 경향은 한 주 심하게는 몇 시간 만에 끝내고 넘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모더니즘 서사로 바라보는 서양 근대 미술이라는 도식이 의문시받는 최근의 경향에서 기존에 소외되었거나 구태의연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사조나 작가들이 새로이 조명받게 되었고 연재에서 소개했던 몇몇 작가들은 그러한 수혜 속에서 새로이 연구가 정립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전형적인 한국의 서양근대미술사 수업을 받은 사람으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바르비종파, 사실주의, 인상주의로 이어지는 ism들의 역사를 서양미술사의 정통 흐름으로 알고 배워왔기에 막상 나폴레옹 전쟁기의 미술이라는 생소한 관점에서 이 시기 미술을 다루려고 할 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케이티 호른스테인의 책은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을 때 방향타를 잡아준 책이었습니다. 저자의 책은 박물관의 카탈로그에서나 언급되던 19세기 초 프랑스의 전쟁기록화 전통의 양상을 상세하게 살펴보고 또 동시기 이 분야에서 어떤 논의가 쟁점이 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꽤나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아카데미즘이라는 두리뭉실한 카테고리 안에서 서로 구분 없이 묶이던 일련의 화가들이 9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에 힘입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본 연재는 그러한 성과들이 나폴레옹 전쟁기 화가들의 행보를 살펴보는 데 있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지 의문을 품던 차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취미의 영역에서 시작된 연재인지라 깊은 학문적 논쟁과 주장들을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 시기 활동했던 작가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활동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그 존재가 생소한 하지만 영미권 연구에서는 이미 수차례 조명된 바 있는 작가들을 다시금 소개하고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유럽의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편으론 전쟁사, 정치사에 집중된 한국 역사 동호인들의 편중된 취미 지형 속에서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라는 다소 불분명한 캡션과 함께 삽화로서의 기능만 하고 있는 일련의 그림들이 실은 복잡한 맥락 속에서 탄생한 예술적 결과물이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비록 글쓴이의 능력부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목표들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고 또 지난 30-40년간 이 분야의 연구 성과를 100퍼센트 이해하지도 담아내지도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나름 이해하고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내용을 담아내려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 글은 필자의 한계로 유럽어권의 연구 성과를 거의 담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글의 주된 무대가 프랑스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권의 논저를 하나도 참고 문헌에 올려놓지 못한 것은 이 연재의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미진한 언어 실력으로 말미암아 간단한 평문과 전시 카탈로그 그리고 비블로테크 나시오날 드 프랑스(https://www.bnf.fr/fr), 레트로뉴스(https://www.retronews.fr/) 에 업로드된 짧은 글들을 번역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오늘날 프랑스어권의 해당 시기 논의를 담지 못했으니 이 점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본 글에서 나온 사실관계 오류, 오개념, 오기는 모두 저의 능력부족에서 나온 실수입니다.


기나긴 연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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