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6일, 1814년

by 에델
1174px-Battle_of_Montmirail_1814.jpg 오라스 베르네, <몽미하일 전투>, 1822, 영국 내셔널 갤러리.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프랑스 하에서 전유럽은 전쟁의 물결에 빠졌다. 서쪽으로는 카리브와 대서양부터 동쪽으로는 러시아까지 프랑스 군은 유럽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그때마다 수 천, 수 만의 사상자가 뒤따랐다. 하지만 파리 사람들로 한정했을 때 이런 치열한 전쟁의 소식은 적어도 직접적인 경험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들에게 전쟁은 먼 외국 혹은 최근 획득한 속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다름 아니었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화가들의 작품, 파리의 곳곳에 나돌아 다니는 벽보와 대중적 이미지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문까지 다양한 정보들이 파리 시민들의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1814년 프랑스에 대항한 연합군이 본토로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 전쟁은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프랑스 북동부를 무대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분전했지만 결국 파리는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다시 본토로 복귀하고 다시금 전쟁이 터졌을 때 프랑스인들은 또다시 전쟁을 경험했다. 황제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고 왕정복고가 단행되었을 때 마침내 프랑스인들에게 전쟁은 끝났다.


1244444.png 에티엔 장 델레크루제, <1814년 파리로 입성하는 황제근위대의 부상당한 병사들>, 1814, 베르사유 박물관.
415566.png 에티엔 장 델레크루제, <생 마르탱 대로에서 행진하는 러시아 포로들>, 1814, 베르사유 박물관.


1814-1815년은 프랑스인들에게 고난의 시간이었다. 텍스트와 이미지 그리고 병사들의 전언으로만 듣던 전쟁 상황은 그들에게 이제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이러한 점은 당대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다비드의 제자였던 에티엔 장 델레크루제(Etienne-Jean Delécluze)는 파리에 머물면서 도시를 오고 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세 점의 화폭에 담았다. 처음 두 점, 부상당한 프랑스 병사와 러시아 병사들의 모습은 프랑스 북동부 몽미하일에서 벌어진 전투 직후 완성된 작품이다. 나폴레옹 군대를 끝장내기 위해 프랑스로 진군한 연합군은 이곳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큰 패배를 경험한다. 일련의 전투들에서 나폴레옹은 수적 열세와 불리한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프로이센 군을 연이어 격퇴하며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한 기적과 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파리는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고 결국 나폴레옹의 승리는 빛이 바랬던 것이다. 델레크루제의 작품 속 프랑스 병사들의 상황은 이렇듯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프랑스 군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부상당한 병사들의 모습은 이전의 선전 회화에서 보이는 당찬 병사들의 모습과 대조된다. 시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부상병의 행렬은 과거 부아이의 그림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던 징집병들의 최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당시 파리로 들어오는 이런 부상병들의 모습은 파리 시민들에게 프랑스의 암울한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화가는 이 그림의 스케치에서 왼쪽 구석에 "vidit"라는 라틴어를 적어 넣었다고 한다. 보았다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동시대 전쟁화에서 빈번하게 보이던 문구 중 하나였다. 당시 프랑스 예술계에서 동시대 전쟁을 묘사한 작품들은 그것이 전달하고 있는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중에서 널리 사용된 방법 중 하나는 작품의 한 켠에 화가 자신이 이것을 누군가에게 듣거나 상상해서 그린 것이 아닌 직접 보고 그렸다는 점을 표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실제 화가들이 작품을 보고 그렸는지의 여부를 떠나 관람객들로 하여금 지금 보고 있는 작품이 역사화에서 전달하는 인위적인 연출이 아닌 실제 상황에 기반한 것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렇듯 작품에 현장을 직접 보았다는 문구를 기입하는 것은 델레크루제가 나폴레옹 통치 시기 보여주었던 행보와 비교했을 때 이례적인 것이었다.


다비드의 제자로 들어간 델레크루제는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영광을 시각화해 줄 일련의 작품들을 그릴 것을 요청받았다. 동료 작가들 심지어 스승이었던 다비드마저도 자의 반 타의 반 이러한 요구에 부응했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화가는 역사화의 전범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선호하였고 고전 고대의 장면이 아닌 동시대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자신이 배운 회화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동시대의 역사화가들과 다르게 국가 후원과 주문을 거부하고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지키고자 했다. 심지어 정권 말기 예술에 대한 정부 검열이 점차 심해지는 와중에도 살롱에 출품하기를 거부하고 정부로부터 어떤 후원도 받지 않았다. 나폴레옹 정권 기간 동안 그는 학생들 가르치며 뤽상부르그 미술관에 있는 루벤스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품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원칙을 깨고 동시대의 사건을 소재로 붓을 든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몰락이 확실해 보였던 그 시점, 화가는 그 몰락의 순간을 역설적이게도 기적과 같은 승리를 이뤄낸 군대의 부상병들에게서 보았다. 그렇기에 작가가 적은 짧은 문구는 비단 자신의 눈으로 그 행렬의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정권의 몰락을 보았다는 화가의 분명한 표현으로 읽히기도 한다. 델레크루제는 이 시기 완성한 세 점의 드로잉을 죽을 때까지 공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에 대한 경각심이 전시장 전체를 지배했던 왕정복고 시기에도, 나폴레옹과 관련한 도상들이 다시 부활해 미술계에 등장하게 된 7월 왕정 이후에도 그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화가는 이 작품을 단지 한순간의 흥분, 칩거 생활과도 같은 자신의 삶이 드디어 끝났다는 것을 직감한 흥분에 못 이겨 즉흥적으로 작품을 제작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그는 이 작품을 죽을 때까지 소유하고 있다가 1862년 사망 직전 베르사유 궁의 큐레이터를 통해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비록 고전고대를 묘사하는 역사화에 주력했던 화가로 그 작품이 자신의 성향과는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기증품 중 하나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이 작품을 단지 감정적 흥분을 담은 무엇이 아닌 하나의 역사적 기록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Antoine-Jean_Gros_-_Bacchus_and_Ariadne.jpg 앙투안 장 그로,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1820, 캐나다 국립 미술관.


왕정복고는 곧 나폴레옹의 시각적 프로파간다가 종말을 맞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대 전쟁 장면을 역사화의 형식으로 혹은 기록화의 형식으로 창작했던 화가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성향에 맞추어 새로운 작품을 제작해야 했다. 새롭게 등장한 지배자 루이 18세는 자신이 지난 수십 년간의 전쟁을 종식시킨 평화의 중재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작품 속에서도 그러한 평화의 이미지가 강조되는 것을 원했다. 이러한 점은 다비드 화파라 불리었던 동시대 전쟁 역사화의 경향이 다시 혁명 이전의 그리스, 로마 시절의 역사적 일화를 화폭에 담는 회화들로 돌아가야 했음을 의미했다. 여기에 더해 부르봉 왕조가 강조했던 왕과 교회의 강력한 유대관계는 중세 기독교, 르네상스 시기의 이미지를 역사화의 형식으로 재창안해 시각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가 얼마나 극적이었는지는 나폴레옹 전쟁기를 대표했던 두 명의 화가였던 앙투안 장 그로와 루이 프랑수와 르죈의 그림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토에서 연합군을 막아내고 있을 때 그로는 후일 팡테온이 되는 생 제네비에브 교회의 천장 벽화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을 화폭으로 표현하길 원했던 정부의 요구에 맞춰 그로는 클로비스와 클로틸디스를 시작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루이즈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하지만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연합군이 파리를 점거했고 이후 왕정복고가 일어났다. 나폴레옹을 그린 그의 초상화 작품 중 하나인 <제1통령 나폴레옹>이 공개적으로 파괴되는 와중에 그는 천장화의 인물을 나폴레옹과 마리루이즈에서 루이 18세와 마리 테레즈로 바꿀 것을 요구받았다. 그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이러한 요구에 맞추어 천장화의 초안을 다시 잡아야 했다. 이후 그로의 행보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그가 보였던 행보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다비드 화파의 대표적 화가로 그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프로파간다 회화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고전주의가 쇠락했다고 여겼다. 남은 생애 동안 그는 동시대 전쟁화가 아닌 혁명 이전 역사화의 양식들을 다비드의 가르침에 결합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선보이게 된다. 그 결과 등장한 <바쿠스와 아리아드네>(1820)과 같은 작품은 그가 얼마 전까지 나폴레옹이라는 동시대 인물을 묘사하는데 주력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복고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비록 이 작품은 평단의 엄청난 질타를 받았고 그로 자신 또한 나폴레옹 정권의 몰락과 함께 커리어의 내리막을 걷게 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동시대의 삶이 아닌 신화, 그리스, 로마시대의 역사를 주제로 하는 역사화의 복권에 몰두했다.


191299.jpg 루이 프랑수와 르죈, <아비스 고개길의 귀산도 전투, 1811년 4월>, 1817, 베르사유 성.


한편 동시대 전쟁 기록화에 능했던 르죈은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다. 군인 출신이라는 출신성분과 지역의 독특한 지표를 강조하는 그의 전쟁화는 나폴레옹 정권 시기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해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강점은 과거의 영광을 다시 복권하고자 했던 부르봉 왕조의 예술관과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부르봉 왕조의 눈밖에 나지 않는 절충적인 방안을 고안했다. 그가 완성한 작품 <아비스 고개길의 귀산도 전투, 1811년 4월>(1817)은 출품 당시 <귀산도의 고대 황소들과 수도원의 풍경Vue du monastère et des taureaux antiques de Guisando>이라는 제목으로 출품됐었다. 1811년 스페인 전역 당시 엘 메디코로 알려진 후안 블랑(Juan Palarea y Blanes)의 게릴라가 프랑스 호송대를 공격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과거 르죈이 작품의 제목에서 전투 장면이라는 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그는 이것을 전투의 현장이 아닌 하나의 풍경(Vue)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는 작품 내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프랑스가 아닌 가톨릭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스페인을 선택한 것은 이곳이 실제 프랑스군이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프랑스와는 다른 이질적인 장소라는 점 또한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과거 화면의 2/3를 전투의 현장으로 채웠던 것과 다르게 이 작품 속에서 전투 장면은 화폭의 구석으로 밀려나 다소 축소되었다. 화폭의 나머지를 차지한 것은 가톨릭을 암시하는 성당과 전투의 격렬함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아름다운 주변 풍경이다. 이렇듯 전투 장면이 아닌 그 주변의 배경과 지역의 고유한 환경을 강조하는 르죈의 전략은 나폴레옹 시기 전투 장면에 대한 정부의 노골적인 검열이 시행되던 시기 그러한 검열을 피해 가면서도 자신이 현장을 경험하고 그린 화가라는 고유의 트레이드마크를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비록 작품 자체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당국에 의해 철거되었지만 이미 대중들은 이 작품을 감상하고 충분히 좋은 평을 하고 난 뒤였기 때문에 새로운 정권 하에서도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질 기회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르죈의 전략은 전쟁기록화 장르의 또 다른 양상을 설명해주고 있다. 과거 이 장르가 나폴레옹 정권 시기 등장했을 때 그것은 나폴레옹이 벌였던 군사 원정을 홍보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시각화하는 매체로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정복고 이후 그러한 기능은 사라지고 대중들에게 작품은 일종의 시각적 스펙터클로 소비되기에 이른다. 전쟁 장면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함의가 탈색되고 그것이 온전히 시각적 유희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이후 전쟁을 소재로 하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의 기원을 보는듯하다. 실제로 19세기 내내 나폴레옹 시기 전쟁은 파노라마 등을 이용한 시각적 유희의 단골소재였으며 그것은 오늘날 영화,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전쟁이라는 요소가 하나의 즐길거리로 여겨진 현상과도 맞닿아있다. 이렇게 르죈의 회화적 변신은 그가 살아있었을 당시에는 자신의 작가 생명을 연장시킨 임시방편이자 하나의 수단이었지만 그것의 영향력은 오랫동안 대중문화에 각인되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방법으로 새로운 정권에 적응하려 했던 두 화가의 사례와는 다르게 그러한 기회조차 받지 못한 채 망명을 선택했던 사람도 있었다. 혁명 정부 하에서 루이 16세의 처형에 가담했으며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로는 왕실화가로 각종 프로파간다 작품을 제작했던 자크 루이 다비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815년 6월 워털루에서의 패전 소식이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비드는 정부에 스위스로 갈 수 있는 여권 발행을 요청한다. 그는 여권 발행을 요청하며 스위스로의 여행이 오래전부터 계획된 스케치 여행(혹은 당대에 그림 여행voyage pittoresque이라 불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그러한 것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어찌 되었던 여권은 발행되었고 다비드는 제프루아라고 알려진 집사 한 명만을 대동한 채 국경을 넘어 제네바로 향했다. 스위스에서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이 생활을 지속했다. 루이 16세의 처형에 가담했다는 그의 이력은 혁명전쟁기 활동했던 많은 화가들처럼 옷만 바꾸어 부르봉 왕조의 시각적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제네바와 레만호 주변 그리고 몽블랑 인근의 샤모니 계곡을 이리저리 방황하던 다비드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은 것은 그 해 8월의 일이었다. 오스트리아 외교관의 중재 하에 다비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고 마침내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부르봉 왕조의 사실상의 묵인 하에 다비드는 1815년의 나머지 날들을 거의 죽은 것처럼 지냈다. 하지만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처형에 가담하거나 이에 동조했던 의원들에 대한 부정적인 조치가 가시화되자 다비드 또한 그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윽고 1816년 1월 루이 16세 처형에 투표한 의원들에 대한 추방이 진행되자 다비드도 프랑스를 떠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비드는 자신이 스위스 혹은 이탈리아로 갈 수 있도록 선처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비드 가족은 반강제로 브뤼셀로 떠나야 했다. 나폴레옹 정권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프랑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 다비드의 말년은 나폴레옹의 최후와 흡사한 점이 많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비드 또한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여생을 마치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고립된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나폴레옹과 달리 다비드는 브뤼셀로 망명을 간 이후에도 미술의 역사에서 몇 번에 걸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그가 양성했던 수많은 제자들이 사실상 19세기 프랑스 근대 미술의 원류를 형성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Alexandre_humboldt.jpg 게오르그 바이치,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초상>, 1806,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브뤼셀 체류 시기 그에게 프로이센으로부터 편지 하나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근대 지리학을 연 인물이자 빈 회의 당시 프로이센 대표단의 리더였던 빌헬름 폰 훔볼트의 동생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훔볼트는 다비드에게 프로이센으로 올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그가 프로이센으로 올 경우 빌헬름 3세의 궁정화가직을 수여하고 새로운 박물관의 건립과 예술, 드로잉에 관한 후학들의 교육을 감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이러한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한다. 이후 프로이센은 당시 재상이던 하르덴베르크의 요청으로 다시 한번 브뤼셀에 사절을 파견했다. 프로이센의 제안은 이전보다 훨씬 더 파격적이었다. 사절은 하르덴베르크의 전언을 빌려 프로이센으로 올 경우 다비드에게 장관급에 준하는 직위를 수여하고 프랑스로의 여행 또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비드의 결심은 확고했다. 다비드는 영입을 제안하러 온 사절에게 "나의 붓을 조국의 불운이나 패배를 위해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러한 말이 사실이던 아니던 다비드에게 프로이센은 자신의 커리어를 끝장낸 중요한 국가임에는 확실했다. 그에게 워털루의 기억, 블뤼허의 증원군으로 인해 나폴레옹 군이 최종적으로 파멸했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그의 심정을 완전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의 현재 상황이 프로이센행을 선택할 만큼 급박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것은 말년에 그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 왕국 하에 있던 브뤼셀 지역에서 다비드는 국왕 빌럼 1세의 비호 아래 벨기에 출신의 제자들을 양성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시기 한때 적국이었던 네덜란드의 미술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빌럼 1세의 초상화 제작에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조셉 페일린크가 참여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듯 순탄한 말년은 그의 사후를 생각해 보았을 때 연민의 감정을 들게 한다. 사후 앵발리드에 안장된 나폴레옹과 달리 다비드는 죽어서도 조국 프랑스에 돌아가지 못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브뤼셀의 성 미카엘과 성 구들라 대성당에 안장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포 정치에 참여했다는 그의 이력은 끝내 그의 프랑스행을 방해했다. 결국 유해는 브뤼셀의 에베르 지역에 매장되었다.


Joseph_Paelinck_-_William_I,_King_of_the_Netherlands_-_56.090A_-_Rhode_Islan.jpg 조셉 페일린크, <빌럼 1세,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왕>, 1817,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미술관.


이처럼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 일했던 여러 작가들이 자기 나름의 행보를 걷는 사이 나폴레옹을 몰아낸 국가들은 새로운 유럽의 질서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메테르니히의 주도 하에 빈에 모인 전쟁 당사자들은 전후 처리 문제를 두고 회의를 이어갔다. 각국의 셈법 속에 회의는 지지부진했다. 몇 달에 걸쳐 전후 처리 문제로 모임을 가졌지만 커다란 진전은 없었다. 회의가 갑작스럽게 급물살은 탄 것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본토로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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