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파리의 교외와 인상주의
모네가 아르장퇴유에서 사생에 몰두하던 시기, 르느와르 또한 그 곳에서 자신의 화풍을 꽃피우고 있었다. 이미 1869년 파리 서부의 부지발 인근에서 모네와 함께한적 있는 르느와르는 보불 전쟁 이후에 다시 한 번 모네를 만났다. 이후 두 화가는 약 2년 동안 동일 장소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서 인상주의가 결코 단일한 형식적 양태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라는 것을 현대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아르장퇴유 체류 시기 교외의 풍경에 집중했던 모네와 달리 르느와르가 집중했던 것은 풍경 속에서 노니는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사실 이러한 차이점은 전쟁 이전 파리 서부의 부지발에서 함께 사생할 때 이미 나타난다. 부지발에서 두 화가는 라 그르누이예르라는 당시 부르주아들이 즐겨 찾던 레스토랑이자 물놀이 장소를 함께 그리게 된다. 모네의 그림에서 화면의 중심을 지배하고 있는 요소는 언뜻보면 중앙에 위치한 인공섬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은 자신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인공섬이 아니라 전경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강의 표면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모네에게 있어 부르주아들의 생활은 분명 흥미로운 테마 중에 하나였을테지만 그 보다 그의 마음을 더 잡아 끌었던 것은 빛의 난반사로 인한 물 표면의 파편화된 형상과화려한 색채들이었다. 하지만 르느와르의 시선에서 같은 장면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는 모네의 작품보다 훨씬 더 가까이 인공섬을 바라본다. 그 결과 모네의 그림에서 전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반사된 표면은 축소되고 인물들의 모습들이 보다 강조되어 나타난다. 빛에 의해 반사된 형상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자들은 공통의 미학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부적인 강조점에 있어서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 두 화가의 그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르느와르의 교외 풍경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자연 속에서 노닐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커리어 초기라고 할 수 있는 186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며 187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 그 경향이 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교외 풍경화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재봉사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인상주의자들 중에서 유일한 노동자 출신 화가였고 이는 르느와르의 화가 생활 초기에 엄청난 콤플렉스로 다가왔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에게 있어 이런 콤플렉스는 부르주아의 취향에 알맞은 그림을 찾기 위한 화가 자신의 여정으로 이어졌다. 르느와르가 자주 그렸던 만찬과 유희, 화려하게 장식된 부르주아 가정의 실내, 여성의 모습들은 시장에서의 수요와 개인적 콤플렉스가 결합된 하나의 사례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것이다.
1880년대를 전후로 그려진 만찬 장면들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중 아르장퇴유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샤토 지방에서 그려진 <카누를 젖는 사람들의 점심>은 전형적인 르느와르식 교외 풍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는 모네와 달리 자연 풍경이라는 것을 거의 그려넣지 않았다. 후경에 보이는 강의 풍경을 제외하면 사실상 파리의 센 강가 어디에서 벌어진 점심 식사 장면이라 말해도 믿을 정도다. 그림은 이후 진주빛 시대와 장미 시대로 통칭할 수 있는 르느와르의 특징적인 시기를 예고한다. 파스텔톤이 두드러지는 밝은 색채와 털뭉치와 같은 독특한 양감이 느껴지는 반복적이고 부드러운 붓질, 화풍 전체에서 우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까지 모두 르느와르가 말년에 추구하고자 했던 회화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통해 관객들은 당시 샤토 지방이 부르주아들에게 카누를 탈 수 있는 곳으로 각광 받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시에 유행하는 뱃놀이 복장을 입고 있으며 후경에서도 뱃놀이 풍경이 보이는 점이 이를 강조한다. 사실 이곳은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행객들이 자주 찾던 관광지가 아니었다. 본래 샤토 지역은 루이 15세 시기 활동하던 르네-오귀스탱 드 모포의 영지로 귀족들의 저택들이 드문드문 있었을뿐 특별한 점이 없었던 비교적 조용한 지역이었다. 19세기 중반 출판된 어느 여행 책자에도 이곳은 기차가 뚫려 앞으로 발전이 유망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당장은 아르장퇴유처럼 파리 사람들도 붐비는 휴양지는 아니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1870년대 샤토 일대는 그림에서 보이듯 부르주아들의 뱃놀이 장소로 각광 받았고 그 결과 1886년의 시점에 와서는 "파리 사람들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르느와르는 이 그림에서 부르주아들의 호감을 살만한 두 가지 측면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우선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당시 부르주아들이 좋아하던 뱃놀이와 만찬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드러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행위들을 과거에는 귀족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파리 부르주아들이 차지한 지역을 배경으로 펼쳐냈다는 점이다.
그가 작품을 착수했던 1879년과 1880년은 인상주의자들이 하나의 대오에서 이탈해 각자의 화풍을 구축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또한 기존에 그들을 묶어주었던 반살롱이라는 입장을 철회하고 하나 둘씩 살롱에서의 출품을 고려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는 그들의 주요 후원자였던 뒤랑뤼엘이 경기 침체의 여파로 말미암아 작품을 구매할 수 없게된 상황과 큰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경제적 상황이 곤궁해지자 화가들은 점차 자신들만의 활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르느와르의 경우 돌파구를 새로운 후원자와 살롱 출품이라는 방법으로 찾았다. 그리고 변화된 후원 상황에 맞추어 화풍에서도 일련의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만찬 장면들은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적합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제적 요인이 변화의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화가의 삶을 단순화 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 작품 창작자로서 경제적 입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심지어 완고하던 모네마저도 1870년대 후반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 받을 당시 누가 봐도 빠른 시일에 그려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판매용 그림들을 그려 에밀 졸라의 동정과 비난을 받기도 했다. 고집스럽게 본인의 화풍을 고집해 말년까지 가난하게 살았던 알프레스 시슬레의 사례를 제외하면 돈의 굴레는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처럼 경제는 이제 화가들을 옥죄기도 하고 자유롭게도 하는 만능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의 거대한 힘을 여실히 느꼈던 화가들이 다름 아닌 인상주의자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운동으로서의 인상주의가 위기에 처한 1870년대 후반 화가들은 하나 둘씩 아르장퇴유를 떠나 파리에서 보다 더 떨어진 시골로 이사를 가거나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르장퇴유에 자신의 저택이 있었던 구스타브 카유보트를 제외하면 다시는 아르장퇴유를 배경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아르장퇴유를 소재로 하는 교외 풍경화의 포기가 인상주의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아르장퇴유라는 지역이 인상주의자들의 결속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역으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의미할 것이다. 실제로 이후 인상주의자들의 화풍은 도저히 공통으로 무엇으로 묶을 수 없을 정도로 개인적 성향이 강해진다. 그리고 1886년 인상주의 마지막 단체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이들은 몇몇 화가들을 제외하면 과거에 인상주의였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다른 작품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