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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04. 2023

아르장퇴유로의 휴가 (8)

19세기 파리의 교외와 인상주의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 꽃이 있는 제방>, 1877,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1877년 모네는 자신의 저택 앞에 있는 정원에서 아르장퇴유 시기 마지막 그림을 완성한다. 긴 체류 동안 모네는 아르장퇴유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다리, 뱃놀이, 야유회, 산책 등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부르주아들의 휴가 풍경은 모네의 화폭에 담겨 1870년대 프랑스 중산층의 여가 풍경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가 선택했던 소재들은 아르장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 즐거운 부르주아들의 유희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생활 터전인 공장과 부두가 존재했었다. 그리고 모네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러한 산업 현장의 풍경을 무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876년, 그간 무수히 많은 작품을 완성했던 모네는 이 시기 단 7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다음 해인 1877년,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 해에는 단 4점을 완성한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작업에 대한 열정이 떨어졌기 때문도 아니고 건강상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도 아니었다. 원인은 외부적인 것에 있었다. 18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아르장퇴유를 지탱하던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다. 관광지이자 산업 중심지였던 이곳에 산업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아르장퇴유에는 본래 이곳을 대표하는 철강공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공장이 들어선다. 양조장이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화학 공장, 크리스탈 공장, 염료공장 등이 시내 중심부를 기점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879년 당시 행정 통계로 잡히는 아르장퇴유의 인구는 9752명이었는데 이는 1870년보다 60퍼센트 늘어난 수치였다. 이렇게 늘어난 인구의 대부분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임은 불 보듯 뻔했다. 이제 아르장퇴유는 어엿한 공업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행정가들의 입장에서 이는 수입의 측면에서 지역의 축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네의 입장에서 이것은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그간 그렸던 그림들에서 알 수 있듯 이제 아르장퇴유에서 화폭에 담을 소재를 찾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1877년에 그린 그림은 모네가 이 지역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르장퇴유를 자유롭게 누비던 화가는 이제 자신의 정원에서 강변 너머의 풍경을 본다. 강변 너머에는 해 질 녘의 노을을 배경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하늘과 대비되는 검은색으로 표현된 연기는 대부분 공장의 굴뚝에서 나온 것이다. 강에는 이제 뱃놀이는 하는 사람도, 카누를 타는 사람도 없다. 온전히 휴식의 공간이었던 아르장퇴유가 이제 노동의 현장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네에게 남은 유일한 안식처는 꽃들이 만발한 자신의 정원뿐이다. 이제 모네는 섬처럼 고립된 자신의 '자연'에서 변해버린 아르장퇴유의 모습을 바라본다. 모네는 여기서 더 이상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거진 초목을 중심으로 도피처인 정원과 강 너머로 보이는 아르장퇴유 중심가를 분리하고 있다. 또한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아르장퇴유의 풍경을 외면하려는 듯 그의 시선은 본래 보통의 시야보다 낮게 설정되어 있다. 그림은 이제 모네가 이곳의 활동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곧 그는 아르장퇴유 생활을 청산하고 보다 더 자연과 가까운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인생의 2막을 시작할 터였다. 



알프레드 시슬레, <아르장퇴유, 엘로이즈 거리>, 1872, 캔버스에 유채, 내셔널 갤러리.


알프레드 시슬레, <아르장퇴유 대로>, 1872, 캔버스에 유채, 노퍽 미술관.


모네의 그림은 아르장퇴유라는 한 지역의 역사를 전달해 주는 듯하다. 관광과 산업이 혼재된 지역이 공업지대로 변하는 과정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애써 산업 현장을 풍경에서 배제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 지역에 밀려드는 자본의 물결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물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네가 아르장퇴유 풍경에 몰두하던 1872년과 1873년에도 노동자들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의 문제와 연관된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대상을 묘사한다고 해도 제한된 화폭에 모든 것을 그릴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압력이나 화가의 취향이 소재 선택에 개입한다. 인상주의자인 알프레드 시슬레의 그림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모네, 르느와르 같은 화가들이 아르장퇴유에서 주목했던 것은 부르주아들의 여가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1872년 처음 시슬레가 모네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그는 아르장퇴유의 거리 풍경에 매료되었다. 시슬레가 정확히 언제 아르장퇴유에 왔고 또 여기서 몇 작품을 그렸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점 하나는 그가 이곳에서 아르장퇴유 시내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몇 점 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탄생한 몇 점의 그림들 속에는 모네나 르느와르의 그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노동자들의 모습이 부르주아와 함께 그려져 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아르장퇴유의 공장>, 1888,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1880년대에 들어서면 이들이 아르장퇴유의 주역으로 올라선다.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았던 카유보트의 1888년 작품은 모네, 르느와르와 같은 인상주의의 주축 인물들이 떠나간 아르장퇴유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카유보트가 묘사한 아르장퇴유는 강가를 유유히 걷는 부르주아도, 풀밭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귀부인도 없다. 포퓰러 나무가 오와 열을 맞추어 늘어섰던 과거의 산책로에는 이제 공장의 굴뚝들이 늘어서 있다. 시내 왼편에 위치한 양조공장과 유리공장을 그린 카유보트의 작품은 인상주의자라 불리는 인물들이 아르장퇴유를 배경으로 그린 마지막 작품군에 해당한다. 1886년의 시점에서 운동으로서의 인상주의는 그 해 열렸던 마지막 전시를 끝으로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카유보트의 작품은 그가 아직까지도 형식적으로 인상주의적 화법을 고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비록 제한적인 색채를 사용하고 있지만 물결의 반사표현과 구름을 표현한 거친 붓질이 그의 화풍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그림은 그가 인상주의와 다른 무엇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 또한 보여준다. 이는 그가 공장이라는 소재 그 자체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예외적인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공장이라는 주제는 부르주아의 취향에 부합해야 했던 인상주의자들에게 부적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유보트에게 이제 그런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1870년대 초반 독립전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젊은 화가들은 10년 뒤 해외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질 만큼 유명세를 탔다. 당장 끼니가 없어서 가난을 면치 못했던 젊은 화가들은 이제 프랑스 화단의 주류로 거듭났다. 이 시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 활동을 뒷받침해 줄 확실한 후원자와 작품 판매처를 확보한 상태였다. 거칠게 말하면 그들은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점에 와서야 아르장퇴유는 공업 중심지의 모습으로 인상주의의 역사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르장퇴유가 산업이라는 내피를 드러냈을 때 정작 인상주의자들은 그곳을 떠난 뒤였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아르장퇴유의 시각적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미술관에 남아 이 시기 교외 지역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시각적 증거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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