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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Apr 17. 2024

[번역] 외광파(plein-air) 풍경화의 기원

- 본 번역은 Anthea Callen의 『The Work of Art: Plein Air Painting and Artistic Identity in Nineteenth-Century France』, Reaktion Books, 2015. 의 1장 「The Origins of Plein-air Painting to 1850」(1850년까지 외광파 회화의 기원들, pp. 33-104)의 일부 내용(pp. 33-52)을 번역한 것입니다. 

- 캡션의 글자 수 제한으로 인해 일부 캡션의 경우 출처 표기를 축약했습니다. 전체 캡션은 추후 블로그의 글을 확인해 주세요

- 본 번역은 출판사 Reaktion Books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 부족한 실력이니 오역이 다수 있습니다. 번역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삽화 17) 피에르앙리 발랑시엔, <인물과 동상이 있는 고전적 풍경>,1788, 패널에 유채


이미 저는 지난 한 달간 로마 교외의 가장 아름다운 지방들을 돌아다녔습니다. 한 손에는 지팡이 모양으로 접을 수 있는 이젤 하나를 들고 가방에는 삼각 거치대와 붓, 물감, 그 외 각종 필수품을 가득 채운 상자를 넣었는데 그게 제가 가지고 다닌 장비의 전부였습니다.
콘라드 게스너 Conrad Gessner, 1787[1]


풍경화가가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비밀에 빠져드는 장소는 램프나 어스름한 빛에 잠겨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이 아니고 생기 없는 석고상, 꼼짝 않고 있는 모델 앞에서도 아니다. 풍경화가의 화실은 지평선에 둘러싸여 있고 하늘을 천장으로 삼으며 태양빛이 비추는 그런 장소여야 한다.
장 바티스트 데페르세트 J. B. Deperthes, 『풍경의 이론 Théorie du paysage』, 1818[2]



왜 19세기 프랑스에서 풍경화는 지배적인 장르가 되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예술적 변화를 이끈 미학적, 기술적 혁신은 무엇인가? 19세기 새로운 풍경화 관행의 중심에는 풍경의 모티프를 직접 대면해 이를 유화로 표현한 외광파(plein-air) 회화가 있었다. 외광파 회화의 성립과 발전은 작품 속에서 예술적 진정성과 진리를 드러내고 싶다는 욕구와 연관된다. 또한 화가의 직접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정체성과 주체성을 재현한 것으로 여겨졌던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천재성'을 구현한 것으로 여겨졌던 유화 에뛰드(oil études)의 광범위한 소비로 촉발된 새로운 미학과도 연관된다. 유화 습작은 화가의 진짜 실력을 드러내는 물질적 증거로 여겨졌으며 이 시기 점점 증가하고 있던 딜러, 감정가가 화가의 탁월함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삽화 18) 알렉상드르프랑수아 데스포르테, <Landscape with Enclosed Fields>, 1692–1700년경, 종이에 유화


프랑스에서 외광파 회화는 18세기 초 알렉상드르프랑수아 데스포르테 Alexandre-François Desportes(1661–1743)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데스포르테는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기반으로 한 동물화 전문가였는데 그의 작품 <울타리 친 들판의 풍경 Landscape with Enclosed Fields> (삽화 18)은 한 세기 후 등장하게 될 야외 사생에 기반한 유화 스케치를 예고한다. 작품은 1820년대까지도 야외 사생에 널리 쓰이던 종이에 그림을 그렸는데 비록 색칠이 되지 않은 부분은 시간이 흘러 어두워졌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의 경우 부드럽고 채도가 낮은 다양한 초록색이 자연의 생동감을 전달한다. 데스포르테의 작업 방식에 대한 로제 드 필의 기록(이후 살펴볼 것이다)과 달리 그는 종이의 흡수성을 줄이기 위해 기름칠을 했거나 완성 이후 바니시 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로 인해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어두워졌을 것이다. 또한 그는 유화 스케치로 식물과 동물을 상세하게 모사하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수목 연구 스케치 중 일부는 후일 피에르앙리 드 발랑시엔 Pierre-Henri de Valenciennes(1750–1818; 삽화 17)이 체계화한 젊은 풍경화가들을 위한 교육 과정에 포함되었다. 발랑시엔은 파리 에콜 데 보자르의 원근법 교수였다. 그는 1799년 원근법에 관한 영향력 있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젊은 풍경화가들을 위한 실용적 조언'이란 부록이 포함되어 있었다.[3] 발랑시엔의 논문은 젊은 풍경화가들에게 새로운 이론과 방법론을 제공했다. 가령 논문에서 발랑시엔은 기하원근법이 작품에 과학적 정당성과 더불어 아카데미 역사화에 버금가는 고전적 권위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했다.


(삽화 19) 존 컨스터블, <Branch Hill Pond, Hampstead>, 1819, 캔버스에 유채


(삽화 20) 장바티스트카미유 코로, <Forum Seen from the Farnese Gardens>, 1826,  캔버스 위에 올린 종이


외광파 유화를 강조한 발랑시엔의 주장은 19세기 프랑스 예술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바르비종파와 인상주의 회화에서도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또한 1780년대 토마스 존스의 이탈리아 체류시기 회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영국 유화 습작 전통의 원천이 되었으며 1824년과 1827년 살롱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터너와 컨스터블의 자유분방하고 자연주의적인 풍경화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삽화 19) 신고전주의 풍경화가들과 인상주의자들을 연결한 또 다른 고리로는 카미유 코로 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가 있다. 코로는 커리어 초기 발랑시엔의 두 제자에게서 그림을 배웠는데 아실에트나 미샬롱 Achille-Etna Michallon(1796–1822)과 장빅토르 베르탱 Jean-Victor Bertin(1822년 미샬롱이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3년 뒤 베르탱의 스튜디오로 입학한다)이 바로 그들이다. 두 화가는 발랑시엔이 17세기 거장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을 참고해 정립한 역사적 풍경화를 주력으로 그렸으며 동시기 이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누리던 화가들이었다. 따라서 코로는 바르비종파와 교류하던 시절에도 신고전주의적인 풍경화 모델을 지향했으며(샤를 도비니와의 작업은 이를 잘 보여준다) 카미유 피사로, 베르트 모리조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이를 가르쳤다.(삽화 20)


야외 사생은 이미 16세기에 등장하지만 이를 유화 스케치로 그린 것은 1600년대에 들어서야 확인된다.[4] 로제 드 필의 『회화의 구성 요소에 대한 강의 Cours de peinture par principes』(1708)에서 저자는 '풍경'항목에 100년 후 발랑시엔 이론의 기초를 형성하게 될 풍경화가의 목표와 방법들을 서술했다. 드 필이 제시한 풍경화 제작 과정에 대한 단계적인 방법들은 발랑시엔에 의해 역사적 풍경화를 가르치는 커리큘럼으로 발전한다. 이 커리큘럼은 스튜디오에서의 작품 구성과 전시 목적의 완성작을 만드는 데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린 스케치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야외 사생에 관한 드 필의 조언은 당시에 그가 잘 알고 있던 관행, 아마도 데스포르테의 작업 방식을 참고했을 것이다. 드 필은 어떤 화가들의 경우 야외 사생을 할 때 많은 색을 쓰지 않고도 대상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화가들은 단단한 종이에 중간색의 유화 에보슈[ébauche]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이 방법은 비록 서로 다른 색깔이라 할지라도 물감이 서로 스며들어 다양한 레이어를 만드는데 용이하기 때문에 꽤나 편리한 방법으로 보인다.


비록 이 방법은 더 많은 장비를 요구하지만 자연의 세부사항을 가장 정확하고 훌륭히 묘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방법이라 여겨졌다. 드 필은 이 방법에 대해 '자연 본 따 중요 부분들을 리터치 한다면' 비록 바니시 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다시 본래의 모티프로 되돌릴 수 있다고 언급한다.[5] 따라서 인상주의자들이 그들 스스로 급진적 방법이라 여겼던 야외 사생에 대한 핵심적 기술들은 실은 18세기 초부터 존재했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발랑시엔의 논문보다 드 필의 책이 외광파 회화와 관련된 보다 실용적인 정보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풍경화를 다루는 대부분의 논문은 이론, 즉 실용적인 기술보단 관념적인 것을 더 많이 다뤘다. 심지어 조세프 베르네 Joseph Vernet의 글에는 야외 사생 시 필요한 장비, 팔레트 색 등 각종 도구에 관한 서술이 전무하다. 이러한 주제가 등장하는 것은 로제 드 필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최초의 실용적 안내 논문인 샤를자크프랑수아 르샤르팡티에 Charles-Jacques-François Lecarpentier(1750–1822)의 글에서부터다.[6]  


(삽화 21) 피에르앙리 발랑시엔, <Rome: Houses Dominated by a Dome>, 1782-1784년경, 카드지에 올린 종이에 유채
(삽화 58) 이동시 젖은 회화들이 달라붙지 않게 해주는 르프랑 & 시에 Lefranc & Cie의 코너핀
(삽화 22) 아실에트나 미샬롱, <Ruins of the Taormine Theatre, Sicily>, 1816년경, 캔버스에 유채


이 주제에 대한 드 필의 광범위한 논의는 야외 사생 기법에 대한 다양한 방법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어떤 화가는 묽은 물감으로 물체의 윤곽선만을 간단하게 그린 뒤 스튜디오에서 자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보조재로 스케치를 활용했으며 또 어떤 화가는 자연에서 사생 후 그 결과물을 직접 참고하지 않고 단지 기억만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7] 또 어떤 화가는 파스텔 스케치와 묽은 물감으로 그린 스케치를 이용하기도 했다. 어떤 작가는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를 그릴 때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기도 했는데, 일단 그림의 소재가 될 최적의 모티프를 찾은 후 그것을 간단히 드로잉 하고 다음날 색의 다양성과 '빛의 우연한' 변화, 즉 시간의 변화와 구름의 움직임에 따른 빛의 효과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다시 같은 장소를 찾았다. 이런 다양한 방법들은 자연의 변화를 포착하기에 적합했고 또 편리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드 필은 여기서 이러한 방법이 충분한 준비, 즉 충분한 양의 붓과 물감, 파스텔 무엇보다 충분한 여가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경고한다.(p. 249) 자연의 특별한 아름다움은 종종 그것을 모방하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저자는 항상 스케치북과 흑연, 축약된 색상표를 들고 다녀야 하며 그래야지만이 자연의 일시적인 효과를 기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스튜디오에서 곧바로 기억을 끄집어내 원하는 장면을 그릴 수 있다고 보았다. 유화 습작에 대한 드 필의 상세한 서술은 저자 본인과 그들의 동료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야외 사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스포르테의 유화 에뛰드(études)를 제외하면 이 시기의 유화 스케치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는 아마 유화 스케치가 화실에서 그릴 완성작을 위한 예비 스케치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8] 또한 이 시기 유화 스케치는 패널이나 캔버스가 아닌 상대적으로 파손이 쉬운 종이에 그려졌고 당대의 관념에 비추어보아도 습작을 따로 보관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때문에 이후 발랑시엔의 작품처럼 대부분의 유화 스케치는 학생들의 모작을 위한 교보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삽화 21) 스케치가 풍경화가의 가장 내밀한 측면, 즉 자신의 개인적 '감각'을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스케치가 나무를 연구한 삽화나 거장들의 인물화에 그려진 누드들처럼 학생들의 모작에 사용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1822년 코로가 미샬롱의 화실에서 수학했을 시절 그는 이탈리아 지방의 풍경을 그린 선생의 작품을 모작한 바 있다.(삽화 22)[9] 미샬롱의 현존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캔버스 유화라는 점을 고려할 때 종이로 그린 작품들의 경우 이러한 용도로 사용되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작품의 모서리에 뚫린 구멍은 이 작품이 교보재이자 야외 사생 작품임을 보여준다. 특히 이 구멍은 '나무 받침taquets en buis' 혹은 '토끼rabbits'라고 불렸던 양 끝이 뾰족한 핀을 꽂은 흔적을 보여주는데 이 도구는 종이 혹은 캔버스를 고정시키거나 젖은 종이들끼리 달라붙지 않도록 꽂아둔 것으로 보인다.(삽화 58) 야외 사생 시 이젤을 종이에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한 프레임은 19세기 중반에 가서야 판매된다. 윈저 앤 뉴튼 Winsor & Newton의 주석 프레임인 '스케치 폴리오 Sketching Folios'가 그것인데 오직 4가지 규격으로만 제작되었기(임페리얼 옥타보 사이즈부터 하프 임페리얼 사이즈까지) 때문에 작품 크기와 비율을 정함에 있어 예술가들이 선택 폭이 제한적이었다.


(삽화 23) 클로드조세프 베르네, <The Shipwreck>, 1772, 캔버스에 유채


유화로 그린 외광파 회화는 로제 드 필의 논문이 처음 출간된 이후 60여 년 간, 특히 1770년대 영국인 화가들과 1780년대 로마의 고전적인 풍경과 빛, 기후를 그렸던 유럽의 예술가 공동체에 의해 처음으로 성행했다. 스위스 출신 풍경화가인 콘라드 게스너는 그의 사생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고 스위스 출신의 동료화가 자크 사블레 Jacques Sablet는 이탈리아에서 게스너가 야외 사생을 하는 모습을 초상화로 남기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두 화가는 적합한 모티프를 찾기 위해 시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마침내 적합한 모티프를 찾으면 재빠르게 그의 포트폴리오를 채웠다. 그는 이렇게 썼다. '제 연구 습작은 이미 유화 스케치로 가득 찼습니다'[10] 

야외에서 자연에 대한 면밀한 실증 연구를 하게 된 것은 계몽주의가 장기 19세기에 남겨준 유산으로 이는 기계적인 것에 대한 매료나 자연 과학의 발달로 드러났다. 또한 이는 프랑스의 감각 sensibilité 관념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록 프랑스에 조셉 라이트 Joseph Wright of Derby 같은 인물은 없었지만 19세기에 발달한 풍경화에 대한 국가적인 열정은 마찬가지로 예술가가와 과학자 모두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에 몰두한 근대적 물질세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11]   데스포르테와 발랑시엔 사이에 놓을 수 있는 클로드조세프 베르네 Claude-Joseph Vernet (1714–1789, 삽화 23)가 이와 관련한 강력한 사례일 것이다.[12] 그는 프랑스 왕실의 후원을 받았고 전유럽에 걸쳐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는데 먼 동쪽 끝 러시아의 황제 예카테리나 2세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민족 정체성에 대한 프랑스적 시각을 표현하는 방식과 풍경화가의 지위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1753년 그가 받은 왕실 주문이었던 15점의 프랑스 항구 연작이 이를 잘 보여준다. 클로드 로랭의 이상적인 이탈리아 풍경에 대한 베르네의 민족주의적 판본은 실제 자연을 관찰하고 프랑스의 구체적인 장소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예술가의 시대정신으로 놓은 작품이었다. 베르네가 처음 로마로 여행했을 때 그는 알프스 산맥을 넘는 육로가 아닌 당시에 가장 빠른 루트였던 해로를 이용했다. 그는 아비뇽에서 시작해 마르세유에 도착 이후 배를 타고 로마의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항구로 들어왔다. 이때 거대한 항구를 직접 보았던 경험은 그에게 있어 큰 영향을 주었던 중대한 순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행 직후 그가 외광파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며 이것이 <항구> 연작이라는 결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이탈리아에서 20년을 보낸 후 1753년부터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파리에 근거지를 두었지만 루브르에 있던 그의 화실은 아카데미 데 보자르 회원들 보다는 왕실 후원을 받는 궁정화가들과 더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과 여러 사례들은 그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왕실 바깥의 제자들이 아닌 더 후대의 풍경화가들에게 유산을 제공해 주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풍경화들은 발랑시엔 세대 - 조세프 베르네의 아들 카를 베르네 세대의 화가 - 이전의 아카데미에서는 배울 수 없었다. 18세기 후반 그의 풍경화가 큰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풍경화는 아카데미 내에서 덜 중요한 장르로 취급되었으며 그렇기에 1791년 '자유' 살롱이 있기 전까진 소수의 인원들만 이러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13] 이로 인해 풍경화가들은 생계를 위한 투쟁을 이어가야 했고 부유한 개인 수장가나 1800년대 막 생기기 시작한 미술품 거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발랑시엔에게 베르네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1770년대 후반 그가 처음 이탈리아를 찾았을 때 그는 직접 만든 정교한 수제 스케치북을 들고 광범위한 야외 드로잉을 남겼다.[14] 1780-1781년 파리에서 돌아온 발랑시엔은 베르네로부터 모티프에서 더 큰 진정성을 얻기 위해 유화 스케치를 그릴 것을 조언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베르네로부터 풍경화에 활용할 수 있는 원근법을 터득하기도 했다.[15] 그가 이탈리아에 돌아온 이후 시기인 1782년부터 1784년 사이에 처음으로 유화 스케치를 그린 것은 확실해 보인다. 아카데미에서 독립한 베르네는 아카데미 체계 내에서 젊은 화가들이 배운 잘못된 원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잘못된 추론이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이에 대한 치료법은 자연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에 있으며 이를 통해 학생들은 화실에서 배운 습관들로 생겨난 오류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자연에서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이 치료법의 핵심이었다. 1817년 사후에 출간된 젊은 풍경, 해양화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네는 외광파 회화에 대한 상세한 묘사법을 발랑시엔의 논문에서보다 훨씬 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해 알려준다. '반드시 자연을 직접 보고 그려야한다'라고 말하며 베르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떤 사물의 형태나 색깔이 다른 사물과 합쳐지면, 당신은 당신이 보는 것을 그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에서 좋아 보인다면 그림에서도 좋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16]


그러나 이런 조언이 그 자체로 통찰력 있고 새로운 것이기는 해도 그것이 보는 것에 대한 조언이지 그리는 것에 대한 조언은 아니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전수한 것은 분명 자연 연구의 근본적인 경험을 통해 그 지식을 발달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기술적인 방법 그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베르네 자신의 회화 작품은 여성적인 로코코 스타일의 과잉과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상황, 이탈리아 취향과 프랑스 아카데미가 지배적인 미학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과학, 계몽적 이성주의, 공화주의가 힘을 모으고 있던 시기에 남성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야외 드로잉과 유화 사생에 대한 지속적인 추구, 화실에서 제작한 거대한 캔버스에 회화에 표현된 빛, 날씨, 대기 효과, 시간과 계절의 변화는 그의 예술을 이루는 주춧돌이었으며 이후의 풍경화에서도 되풀이되는 방식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비전통적이었다.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 출신으로 지역 귀족의 후원 하에 곧바로 로마로 건너갔으며 프랑스 아카데미의 관례적인 방식을 우회해 전통적인 역사화가 아닌 직접 경험한 풍경에 영감을 받았다. 그의 비아카데미적 위치는 이후 많은 풍경화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신고전주의자들과 달리 19세기 초의 대다수의 풍경화가들은 자신의 표현 방식을 이러한 대안적인 방식을 통해 획득했다. 많은 수의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한 것이 아닌 (이후 르누아르가 그랬듯) 판매용 도자기에 장식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며 순수예술가로서 아주 짧은 훈련만 받았거나 독학한 경우가 많았다.[17] 계급과 열망에 있어 이처럼 전통적 방식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암시하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커리어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손쉬웠으며 이로 인해 그들이 커리어를 쌓아감에 있어 상대적으로 '더 낮은' 순수 예술 장르인 풍경화에 진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분야에서의 성공은 사회적 계층 상승의 기회와 잠재적으로 더 높은 이윤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많은 풍경화가들은 그들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작품을 당시 인기 있던 매체인 석판화에 인쇄해 판매하거나 더 후대에는 책의 에칭 삽화로 판매했다. 아트 딜러들 또한 복제 판화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1850년대 이후 에칭 작업은 순수예술 행위로 부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판화 작업 그 자체는 장인의 영역이었으며 이를 주도한 것은 주로 풍경화가들이었다.[18]  처음에는 바르비종파 화가들에게 붙고 나중에는 인상주의자들에게도 붙여지는 '독립'이라는 꼬리표는 아카데미 교습 방식에 기반한 회화적 전통에 대한 독립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하는 직업적 상황에 대한 독립이기도 했다. '독립'은 또한 급진적 경향의 정치적 함의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르비종파 대부분이 그랬듯 공화주의와 연관되기도 했고 무정부주의적 경향의 비타협주의자라는 말이 초기 인상주의를 지칭하는 말로 처음 붙여지기도 했다.[19]


역사적 풍경화를 위한 로마상 공모전이 1816년 발랑시엔에 의해 도입되었을 때 그것은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사실주의'에 맞서 이탈리아의 이상적인 풍경화 전통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매년 열리는 역사 인물화 공모전과 달리) 오직 4년에 한 번씩 열렸고 공모전의 우승자는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4년간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음과 동시에 커리어를 닦아 나가는 데 있어 큰 기반을 얻게 되었다. 발랑시엔의 풍경화 커리큘럼은 그 훈련 과정에 있어 야외 에뛰드(étude)를 훈련과 실습의 중심에 놓았다. 야외 유화 사생은 모든 풍경화가 학생들의 의무사항이 되었고 모든 전문가들에게 표준적인 관행이 되었다. 발랑시엔의 풍경화 커리큘럼은 역사화 커리큘럼을 모방한 것이었다. 생성 과정(에스키스 esquisse (혹은 구성 스케치) 그리고 에뛰드 the étude (혹은 습작)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완성작(tableau)과 구별하는 동일한 절차적 위계를 채택함으로써 그는 클로드 로랭, 푸생 그리고 위대한 인물화(grand figure painting) 혹은 역사화historia(삽화 17을 보라)와 연관된 특권을 막 성장하고 있던 풍경화 장르 또한 얻을 수 있길 바랐다. 화가가 그린 외광파 회화는 자연에 대한 기록을 경험한 산물이지만 한편으론 원재료의 레퍼토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땅과 하늘의 효과에 대한 연구, 나무와 기타 초목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 등은 기억을 보조하는 역할도 했다. 이러한 그림들은 무질서한 자연의 요소들을 보다 질서 있고 고차원적인 의미를 지닌 무엇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통제된 실내 조건에서 화실의 완성작(tableau)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19세기초 풍경화가들이 누렸던 권위는 습작들을 하나로 모으고 작품을 전통적인 이탈리아풍으로 그리는 전통적인 스튜디오 작업과 이를 살롱에 전시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삽화 24) 아실에트나 미샬롱, <Beech Tree>,1817, 캔버스에 유채


(삽화 25) 피에르앙리 발랑시엔, <Study of Clouds over the Roman Campagna>,1782–5년경, 카드보드지에 올린 종이에 유채


이미 데스포르테가 선호한 바 있던 나무 드로잉 혹은 유화 습작(삽화 24)은 아카데미 커리큘럼 내에서 거대한 역사화를 위한 밑그림이나 누드 유화 습작의 풍경화적 등가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각각의 장르에서 이런 습작은 일관된 전체에서 뚜렷한 형상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구성 요소에 분명한 윤곽선과 형태를 부여했다. 풍경화의 경우 나무 습작은 누드화를 대신하는 것이었기에 파리 아카데미에서 열린 로마상 공모전의 첫 단계에서 중심이 되었다. 이상적인 남성 누드와 그 포즈가 고전적 모델에 기반해 정형화되는 경향이 있던 것처럼 17세기 이탈리아 풍경화에서 나무와 잎의 표현은 정형화되어 갔다. 그러나 발랑시엔의 교습법은 보다 자연을 강조했다. 성숙한 표본을 그리는 유화 습작 과정은 나무의 해부학적 구조와 주요 특징을 묘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종의 식물학적 시각 지표는 계몽주의 시대 실증주의의 가치와 권위를 전달하는 린네 자연과학의 분류학적 전통에 따라 구별될 수 있어야 했다. 흉포한 동물이 배회하는 형태 없는 황무지나 여행 중 볼 수 있는 노상강도를 묘사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풍경화 그 자체는 성장하고 있는 지질학, 식물학, 농학, 심지어는 별 관심도 없던 어떤 과학적 분야의 호기심을 주제로 삼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과 그 이후 시기 산업적 관점에서 광물에 대항 흥미가 증대하고 근대적 국경선의 불안정성이 문제가 되자 풍경화는 다각적인 투자의 대상이자 민족적 함의의 층을 가지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발랑시엔의 체계가 풍경화의 작업 관행을 쪼개고 파편화한 뒤 각각의 뚜렷한 작업방식을 선적요소(윤곽선 드로잉, 원근법)에서 톤(키아로스쿠로, 명암 모델링)이나 색채(외광파 유화)적인 요소로 나누었다는 점이다. 발랑시엔은 '재빠르게 그려진 유화 스케치가 대기 효과를 묘사하는 데 적절한 방법'인 반면 식물의 세부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물체의 질감이 느껴질 수 있는 다른 표현 붓질 표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삽화 25)[20] 다시 말해 물감의 성질은 자연의 성질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낭만적-자연주의자나 사실주의 풍경화가 모두에게 있어 근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업 과정의 분리가 오직 발랑시엔 때문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로제 드 필의 『회화의 구성 요소에 대한 강의』의 '풍경' 부분에서 했던 조언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이 이후 반복적으로 재인쇄되었고 18세기 동안에는 새로운 텍스트들이 나오기도 했다.


아카데미에서 (규정에 의거해) 자신의 전문성을 증명하기 위해 작성했던 논문은 자연을 직접적으로 사생한 '초상 풍경paysage portrait'과 각각의 이상적인 요소들을 화실에서 짜 맞춘 '구성 풍경 pasage compose' 을 구분하는 풍경 이론과 지침들을 다룬 새로운 저작들을 촉발시켰다.[21] 르샤르팡티에의 1817년 논문은 아카데미 출신 풍경화가들의 독립성이 높아지고 낭만주의의 출현으로 장르의 인기가 높아지는 시기에 출간되었다. 르샤르팡티에는 박식한 미술사학자였고 에콜 데 보자르에서 회화를 배우고 가르친(그는 루앙 아카데미의 회화, 드로잉 교수였다) 인물이었다. 그의 견해는 발랑시엔 보다 훨씬 더 근대적이었는데 그는 단지 풍경의 역사나 이론만을 다루는 것이 아닌 풍경화를 둘러싼 기술적 질문들까지도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는 발랑시엔의 논문에서 다룬 바 있는 복잡한 기하학이나 원근법에 대해서는 적은 분량을 할애했다. 발랑시엔의 논문과 비교했을 때 그가 더 강조했던 것은 외광파 습작의 중요성이었다. 그는 진리가 자연에 대한 정확한 묘사의 결과라고 주장하며 드로잉 도구와 함께 자연을 묘사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잉크, 수채화 물감, 구아슈, 디스템퍼, 유화 물감, 파스텔의 채색 방법을 소개하고 이것의 사용법을 설명한다. 그는 풍경화를 네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했는데 영웅적(위대한 주제) 풍경화, 전원적(고전적 님프가 있는) 풍경화, 순수 모방 풍경화, 그리고 해양 풍경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각 장르가 가진 위계의 미덕을 주장했던 다른 이론가들과 달리 이 모든 장르가 동일한 가치를 지니며 이런 판단이 과거 거장들의 풍경화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22]


(삽화 26) 장피에르 태노, 『실용적 원근법에 대한 강의』(1831)
(삽화 13)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The Towpath>, 1864, 캔버스에 유채
(삽화 27) 장빅토르 베르탱, <Studyof Trees andBridge>, 1823, 석판화


르샤르팡티에로 인해 데페르세트와 같이 이론에 집중하든 실용적 방법에 집중하든 (풍경화를 비롯한) 화가들을 위한 독학 매뉴얼이 19세기 초반 성행한다. 가령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방법을 다룬 부비에 Bouvier (1827)의 글에서 르샤르팡티에가 추천했던 몇몇 기술적 조언들은 여전히 되풀이되어 나타난다.[23] 한편 발랑시엔의 계승자이자 1826년 그를 이어받아 원근법 교수로 재직하고자 했던 장토마스 티보 Jean-Thomas Thibault의 제자 장피에르 테노 Jean-Pierre Thénot (1803–1857)는 풍경화가들을 위한 그의 첫 번째 원근법 매뉴얼을 출판한다. 테노의 논문과 뒤이어 출간한 책들은 발랑시엔의 현학적인 원근법 이론을 풍경화가 지망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함께 수록된 삽화는 모티프 구성과 나무 습작 과정에서 실제 그 이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삽화 26, 삽화 13과 비교해 볼 것). 풍경화 교수였던 장빅토르 베르탱(1822년 후반 미샬롱의 뒤를 이어받아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도 나무 습작이 담긴 판화 모음집을 출판하기도 했다(삽화 27).[24] 풍경화 매뉴얼의 증가는 초상화와 인물화 지망생들이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을 모방해 거장의 작품 전체 혹은 신체의 일부만을 모사한 책들을 구매해 공부했던 것처럼 학생, 예술가, 아마추어 예술가들에게 '이상적'이지만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의 특징적인 모습 또한 모방할 수 있는 사례들을 제공해주었다. 이 시기 스승의 작품을 모작하는 것은 매우 흔할 일이었다.[25] 아카데미의 수업은 겨울로 미뤄졌고 그로 인해 여름 기간 동안 화가들은 여름날의 긴 낮시간을 이용해 야외 사생(혹은 스튜디오 사생)을 할 수 있었다. 18세기 후반 많은 화가들은 로마상을 받았든 그렇지 않았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고 그중 몇몇은 그곳으로 가는 여정이 길고 험난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여러 해를 체류하기도 했다. 풍경화가들과 인물화가 모두 로마와 그 주변 혹은 나폴리 해안의 명소들을 찾아가 작업을 했으며 그곳에서 남부 지방의 안정적이고 화창한 기후와 빛의 영향을 받았다. 18세기 당시 로마는 매우 작은 지역이었지만 북구 유럽 사람들에게 이곳에 대한 인기는 그랜드 투어의 종착지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에 국외체류자 커뮤니티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가치 있는 후원자 또한 이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조세프 베르네는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한 하나의 사례다.) 이곳에 체류했던 외국인 화가들은 서로 정보를 교류하며 성장의 자양분을 제공했는데 이로 인해 외광파 회화에 대한 가장 최신의 혁신적 지식들이 광범위하게 공유될 수 있었다.


(삽화 28) 『Voyages pittoresques et romantiques dans l’ancienne France』 (1827).


19세기 초까지 가장 유명한 명소가 알프스 산맥이었다면 1820년대부터는 퐁텐블로 숲과 같은 파리 근교 지역들에 스케치나 유화 습작을 하기 위해 풍경화가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1800년 발랑시엔이 풍경화가들이 주목해야 할 프랑스 지역들을 처음 추천했을 때 화가들의 표준적인 관행은 여전히 이탈리아의 빛과 경관을 더 적절한 주제로 여기고 있었다. 17세기 클로드 로랭과 니콜라 푸생의 고전적 전통과 아카데미의 신고전주의적 가치를 존중했다는 점은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이 로마나 나폴리 지역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은 1815년 국가적 후퇴와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 풍경화를 선호했던 후원자, 독립 화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적 열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로마 체류(로마상 수상을 통해서든 개인 후원자를 통해서든)의 매우 높은 인기는 대부분의 젊은 화가들이 꿈꿀 수 없는 것이었고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나폴레옹 전쟁 이후 화가들은 프랑스 풍경을 주제로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1820년 노르망디에서 테일러 남작 Baron Taylor과 샤를 노디에 Charles Nodier가 1권을 출간한 이래 프랑스 문화유산에 대한 기념비적 시리즈로 남은 『그림 여행과 고대 프랑스의 낭만 Voyages pittoresques et Romantiques dans l’ancienne France』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에 초점을 맞춘 낭만적이면서도 자연주의적인 풍경화 스타일을 대중적으로 소개하고 그 저변을 넓혔다.[26] 풍경화가를 포함한 수십 명의 화가, 석판화가들이 이 책이 만들어진 58년 동안 프랑스 전역의 특징적인 인공, 자연 기념물을 소개하는 삽화를 실었다.(삽화 28) 프랑스의 풍경이든 이탈리아의 풍경이든, 산, 숲, 초지이든 로마 지역의 캄파냐이든 그들의 지역과 모티프 선택은 북구 혹은 남부 지역의 미학적 태도에 대한 화가들의 이데올로기적 끌림 뿐만 아니라 반사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던 대기 효과나 대상의 묘사 방식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발랑시엔 또한 스위스의 픽처레스크적 풍경에서 외광파 습작을 그릴 것을 추천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이런 풍경이 오직 풍경화가와 '자연주의자들 naturalists'들만이 관심 있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모든 예술가들이 해외로 습작을 떠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보다 싼 가격으로 파리 인근보다 더 다양하고 픽처레스크적인 풍경을 접할 수 있는 프랑스의 장소들을 목록화했다. 특히 발랑시엔은 이탈리아의 캄파냐와 유사한 남프랑스 로마 유적지에 대해 존경을 표하면서 화가들이 니스부터 툴롱, 엑상 프로방스와 마르세유 사이의 계곡 등 이탈리아와 유사한 픽처레스크 풍경을 제공할 수 있는 지중해 지역에 익숙해질 것을 추천했다.[27]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일반적으로 여름에 행해졌고 겨울에는 화실에서 커다란 구성을 잡고 대체로 봄에 열리는 파리 살롱에 보내기 위한 완성작을 만드는 시간을 보냈다.[28]  


(삽화 29)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 1849-1855, 캔버스에 유채


아카데미가 예술가의 모든 커리어를 통제했다는 점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테오도르 루소는 1820년대 에콜에서 입학했(지만 실패했)고 그로 인해 살롱 심사에서 번번이 낙선했는데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을 이곳저곳에 전시해야 했다. '위대한 거부 le grand refuse'라고 불리는 1830년대 후반부터 1840년대까지의 시기동안 그는 공식 살롱을 대체할 시장을 찾아 나서야 했고 생계를 위해 딜러들과 후원자들에게 그림을 팔아야 했다. 아카데미의 회화 제작 절차의 다양한 단계들을 구별하기 위한 카테고리(그의 스승 레몽 Rémond에게 배운 에뛰드 études, 에스키스 esquisse, 에보슈 ébauche, 타블로 tableau)는 그의 후기 저작에서 변형되는데 이것은 아마 미학적 필요가 아닌 재정 압박에 대한 반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9] 이런 변형은 루소가 탐욕스러운 시장을 만족시키기 위해 소품 유화 습작을 '완성'작으로 팔았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점은 당시 풍경화가 부유한 도시 부르주아들의 아파트에 걸기 적합했고 취향에도 맞았으며 이에 따라 그 수요가 증가한 상황과 관련 있다. 1867년 루소는 그의 작품 <퐁텐블로 숲>(삽화 29)을 포함한 에보슈 작품과 습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전시를 파리에서 개최한다.[30] <퐁텐블로 숲>은 그의 거대한 에보슈 페인팅의 전형이라 볼 수 있는데 그 크기에 있어 완성작에 비견될만하지만 외광파 에뛰드와 같은 자유로움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규칙하게 칠해진 연한 밑벌칠은 그의 작품의 특징으로 테레빈유를 사용한 거친 적갈색 바탕칠(underpainting)이 따뜻하고 어두운 색조를 내고 있다. 투명한 갈색이 주는 이런 반짝임과 변화무쌍한 붓질로 표현된 데피니션, 질감은 그림자에 깊이를 준다. 흰색 혹은 옅은 밑벌칠에 어둡고 투명한 색조를 칠하는 것은 그 주제와 상관없이 신고전주의풍 회화에서 가장 먼저 하는 작업 중 하나로 옅은 갈색의 '소스 sauce' 가  색조 구조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31] 그러나 루소가 다양한 색조의 갈색을 강조했을 때 그것은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나 조르주 미셸 Georges Michel(1763–1843)의 선구적 회화를 연상케하는 북구 유럽 풍경의 키아로스쿠로를 표현하기 위해였다. 전경의 땅 부분에서 빛이 나는 곳은 '수 부아sou bois', 즉 빛이 하늘, 물, 나무줄기 등에 반사되어 불투명한 색조로 비친 것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흰 종이 위에 어두운 색으로 에보슈를 그리고 그 위에 반투명한 오프화이트색이나 옅은 회색을 겹쳐 칠한 기법은 '옵티컬 블루'를 만들기 위해 루벤스가 사용하던 기술을 모방한 것으로 하늘의 변화무쌍함을 암시하는 표현 없이 푸르스름한 대기 효과를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전반적으로 옅게 칠해진 물감은 그것이 에뛰드나 외광파 회화에 머물렀다는 뜻이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행해진 에보슈 단계에서 아주 약간의 덧칠만으로 완성됐다는 것을 드러낸다. 가령 그는 본래의 외광파 습작과 비교했을 때 완성작에서 몇 가지 부분에 변화를 주었는데 풍경에 낭만적인 멜랑콜리를 더하기 위해 죽은 오크나무들을 중앙의 좌측에 추가했다.[32]  




※ 각주


[1] 콘라드 게스너, 1787년 10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앤 오타니 카비나 Anne Ottani Cavina 편., 『이탈리아의 풍경들: 외광파 회화(1780-1830) Paysages d’Italie: Les peintres du plein air (1780–1830)』 exh. cat, 그랑 팔레, 파리, 팔라초 테, 만투아 (파리, 2001) p. 13, 저자 번역.


[2] '풍경화가가 그의 예술의 가장 깊은 비밀에 빠져들 때는 램프나 희미한 빛이 비치는 좁은 실내, 생기없는 석고상이나 정지 모델 앞에서가 아니다. 그의 아틀리에는 지평선에 맞닿아 있으며 하늘을 돔으로 삼고 태양빛이 비추는 곳이다.'

J.-B. 데페르세트, 『풍경의 이론,  예술이 모방할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모방에 성공하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방법에 대한 일반적 고려사항 Théorie du paysage, ou considérations générales sur les beautés de la nature que l’art peut imiter, et sur les moyens qu’il doit employer pour réussir dans cette imitation』 (파리, 1818), p. 7; 보다 자세한 사항은 저작 모음집을 참고할 것, 『풍경 예술의 역사 Histoire de l’art du paysage』 (파리, 1822)


[3] 피에르앙리 드 발랑시엔, 『예술가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원근법 요소들과 그림, 특히 풍경에 대한 성찰과 조언 Pierre-Henri de Valenciennes, Elemens de perspective pratique à l’usage des artistes, suivie de reflexions et conseils à un Elève sur la Peinture et particulièrement sur le genre du Paysage』(파리, 1800); 어떤 판본의 경우 179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의 원근법 지침은 실제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후 풍경화가들을 위해 그의 지침을 간략화된 메뉴얼이 사용되기도 했다. 가령 장피에르 테노(Jean-Pierre Thénot)의  『자연물 데셍을 위한 실용적인 원근법 Essai de perspective pratique pour dessiner d’après nature』(Paris, 1826). 발랑시엔의 책은 지속적으로 풍경화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쳤으며 카미유 피사로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1860년대까지도 읽혔다. 


[4] 이 분야에 관한 중요 연구들은 전시 도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필립 코니스비(Philip Conisbee) 와 로렌스 고잉 (Lawrence Gowing)이 쓴 『자연으로부터의 회화 Painting from Nature』 (런던, 1981)는 풍경 유화 습작의 열정적인 수집가였던 존 기어(John Gere)와 그의 아내 샬롯(Charlotte)의 소장품(현재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대여 중이다)을 조명하고 있다. 기어 컬렉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A Brush with Nature: The Gere Collection of Landscape Oil Sketches』 , London, 1999. 이에 대해 다룬 필립 코니스비의 논문 ‘Pre-Romantic plein air Painting’, Art History, ii/4 (December 1979), pp. 413–28과 두 개의 훌륭한 전시 도록도 참고할 것. 필립 코니스비(Philip Conisbee), 사라 폰스(Sarah Faunce), 제레미 스트릭(Jeremy Strick), 피터 갈라시(Peter Galassi), 『이탈리아의 빛 속에서: 코로와 초기 야외 사생화 In the Light of Italy: Corot and Early Open-Air Painting』 (뉴욕, 1996), 카비나 편, 『이탈리아의 풍경들 Paysages d’Italie』. 지난 30년간 이들 수장가와 연구자의 노력 덕분에 풍경 유화 습작 분야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평가가 가능해졌다. 최근 마이클 로젠탈(Michael Rosenthal)은 콤튼 베르니 저택에서 열린 전시의 도록에서 영국 외광파 회화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서술한 바 있다. 『터너와 컨스터블: 자연으로부터의 스케치 Turner and Constable: Sketching from Nature』 (London, 2013), pp. 8–29. 


[5] 로제 드 필, 『회화의 구성 요소에 대한 강의 Cours de peinture par principes』 [1708] (파리, 1799), p. 246. 드 필의 관찰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서는 코니스의 논문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Pre-Romantic Plein Air Painting’; 이와 관련해 코니스비와 고잉이 쓴 도록도 참고하라. 『 자연으로부터의 회화  Painting from Nature』


[6] 르샤르팡티에 C.-J.-F. Lecarpentier, 『풍경에 관한 에세이 Essai sur le paysage』 (Rouen, 1817).


[7] 순수예술 분야에서 기억술 활용에 관한 글은 다음을 참고하라. 마리엘리자베트 카베 Marie-Elisabeth Cavé,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 기억 그림을 그리는 방법 Le Dessin sans maître, méthode pour apprendre à dessiner de mémoire』 (Paris, 1850), 들라크루아는 1847년부터 그녀에게 이 방법을 배웠으며 이에 대해 들라크루아는 그녀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다음 또한 참고해보라 오라스 르코크 드 부아드랑 Horace Lecoq de Boisbaudran, 『기억 회화의 교육 Education de la mémoire Pittoresque』 (파리, 1848).


[8] 알버트 보임이 '생성' 작업 ‘generative’ work이라 부르는 아카데미 데 보자르(로제 드 필의 시기에는 아카데미 로얄)의 커리큘럼을 말한다. 아카데미의 작품 제작 과정에 있어 생성 단계와 수행 단계 그리고 유화 스케치에 대해서는 보임의 다음 저작을 참고하라  『19세기 아카데미와 프랑스 회화 The Academy and French Painting in the Nineteenth Century』 (Oxford, 1971), pp. 87 and 167-9;  필리프 그룬슈 Philippe Grunchec 의 다음 저작도 참고하라, Les concours des Prix de Rome de 1797 a 1863 (Paris, 1983), and Les Concours d’Esquisses Peintes, 1816–1863, 2 vols (Paris, 1986).


[9] 다음을 참고하라. 개리 틴터로 Gary Tinterow, 마이클 판타지 Michael Pantazzi 그리고 뱅상 포마레드Vincent Pomarède, 『코로 Corot』(New York, 1996), p. 12. 


[10] 콘라드 게스너, 1787년 10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카비나 편, 『이탈리아 풍경들 Paysages d’Italie』, p. 13, 저자 번역; 자크 사블레 Jacques Sablet, <화가 콘라드 게스너의 초상, 로만 캄파냐 Portrait of the Painter Conrad Gessner in the Roman Campagna>,1788; 캔버스에 유채, 39 × 30 cm. 취히리 쿤스트하우스, inv. 11.


[11] 샬롯 크롱크의 중요한 저서 『과학과 자연의 지각: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의 영국 풍경화 Science and the Perception of Nature: British Landscape Art in the Late Eighteenth and Early Nineteenth Centuries』 (New Haven, ct, and London, 1996), 가 다음의 주장을 다루고 있다.


[12] 필립 코니스비의 다음 저작을 보라, Painting in Eighteenth-century France (New York and Oxford, 1981), Claude-Joseph Vernet (London, 1976) 그리고 Art in Rome in the Eighteenth Century (Philadelphia, pa, 2000).


[13] 코니스비의 다음 저작을 보라 『Painting in Eighteenth-century France』, esp. pp. 193ff, 여기에서 코니스비는 풍경화가 팔리지 않는 경향을 1750년경까지 소급해서 바라보고 있다.


[14] 발랑시엔의 현존하는 스케치북은 벨룸으로 만들어진 전문적인 제본이며 아마 파리에 있는 화가들의 요구사항에 맞춰 만들어진 제품이었을 것이다. 이 스케치북은 현재 루브르의 Département des Arts Graphiques에 보관되어 있다. 이 앨범을 살펴볼 수 있게 도와준 루브르의 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


[15] 필립 코니스비, ‘Pierre-Henri de Valenciennes at the Louvre’, Burlington Magazine, cxviii/878 (May 1976), pp. 336 그리고 338, 이 논문에서 코니스비는 발랑시엔의 유화 습작이 베르네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했다.


[16] ‘Première lettre de Joseph Vernet aux jeunes gens qui se destinent à l’étude du paysage et de la marine’, (Paris, 1817), p. 623. 보타리의 『Recueil de Lettres』을 루이조세프 제이 Louis-Joseph Jay가 확장된 프랑스 판본으로 출간


[17]  니콜라스 그린 Nicholas Green 의 다음 저작을 참고하라 『Théodore Rousseau』, 1812–67, exh. cat., University of East Anglia (Norwich, 1982), p. 11; 그린은 콩스탕 트루용 Constant Troyon , 쥘 뒤프레  Jules Dupré , 루이 카바 Louis Cabat , 카미유 플레  Camille Flers 가 도예가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플레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베르탱에게 배웠고 카바는 그런 플레의 제자였다. 나르시스 디아즈 드 라 페냐 Narcisse Diaz de la Peña 또한 도예가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는 아마 1860년대 그와 동일한 커리어를 밟았던 르느와르와  깊이 교류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18] 클로드 로저막스 Claude Roger-Marx 의 다음 저작을 보라. 『La gravure originale au xixe siècle』 (Paris, 1962), pp. 82ff.


[19] 로버트 허버트 Robert Herbert 의 『Barbizon Revisited』, exh. cat. (Boston, ma, 1962), p. 174, 에서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공화주의적 성향에 대해 언급한다; 인상주의와 비타협주의자라는 용어의 관계에 대해선 다음을 보라 스테픈 아이젠만 Stephen F. Eisenman, ‘The Intransigent Artist . . .’, in Charles S. Moffett, The New Painting: Impressionism, 1874–1886(Oxford, 1986), pp. 51–60.


[20] 그린, 『Théodore Rousseau』, p. 13; pp. 12–14, n. 31, p. 27. 에콜 데 보자르에서 행해진 인물화, 풍경화의 커리큘럼에 대한 역사적 설명은 필리프 그룬슈의 다음 저작을 참고하라 『로마상 콩쿠르 Les concours des prix de Rome』 (Paris, 1983), 또한 같은 저자의 『채색화 콩쿠르 Concours d’esquisses peintes』 (2 vols, Paris, 1986). 도 참고하라. 보임의 다음 저작도 참고하라, 『The Academy and French Painting』 역사적 풍경화를 위한 로마상 공모전은 에콜이 개혁된 1863년에 중단되었다.


[21] 르샤르팡티에 Lecarpentier, 『풍경에 관한 에세이 Essai sur le paysage』, 데페르세트 Deperthes, 『풍경의 이론Théorie du paysage』, 샤를 레몽 Charles Rémond, 『풍경 데생의 원리 Principes de paysage dessinés sur pierre』 (Paris, 1821), 장피에르 테노 Jean-Pierre Thénot, 『완전한 풍경 강의 Cours complet du paysage』 (Paris, 1834); 발랑시엔 논문의 두번째 판본은 1820년 그가 죽은 이후 출간되었다.


[22] 르샤르팡티에 Lecarpentier, 『풍경에 관한 에세이 Essai sur le paysage』, pp. 28–9,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언급을 한다.


[23] 부비에 P.-L. Bouvier, 『젊은 미술가들과 미술 애호가들을 위한 안내서 Manuel des jeunes artistes et amateurs en peinture』 (Paris, 1827).


[24] 장빅토르 베르탱 Jean-Victor Bertin, 『나무 습작 모음집 Recueil d’etudes d’arbres』 (Paris, 1818–21); 이 앨범에 실린 다수의 석판화들은 1822년과 1823년에 그려졌다. 비록 그는 1826년 티보를 대신해 아카데미 회원 후보가 되지만 태노는 회원이 되는데 실패했으며 그 자리에는 루이조세프 지라르 Louis-Joseph Girard 가 들어갔다. 태노의 『실용적 원근법에 대한 에세이 Essai de perspective pratique』 는 이후 수많은 판본들이 출간되었다.


[25] 코로가(평생에 걸쳐 수행한) 미샬롱 작품의 모작과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미샬롱의 영향에 대해서는 뱅상 포마레드의 다음 글을 참고하라. ‘The Making of an Artist’, in Tinterow, et al., 『Corot』, pp. 13–4. 이 도록은 코로연구에 있어 중요한 도록이다.



[26] B. L. Grad and T. A. Riggs의 다음 저작을 보라, 『Visions of City and Country: Prints and Photographs of Nineteenth-century France』 (Worcester, ma, 1982).


[27] 발랑시엔, 『Elemens de perspective』, pp. 621 and 622.


[28] 살롱과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이 얻을 수 있었던 다른 전시 기회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Anne Martin-Fugier, La Vie d’artiste au xixe siècle (Paris, 2007), sections iii and iv; in section 그녀는 또한 당시 지망생들이 받았던 예술 교육들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분야에 대한 고전적 저작으론 다음이 있다.Harrison C. White and Cynthia A. White, 『Canvases and Careers: Institutional Change in the French Painting World』 (Chicago, il, 1965, 1992), 또한 다음도 참고하라. Fae Brauer, 『Rivals and Conspirators: The Salon and the Modern Art Centre』 (Newcastle upon Tyne, 2014).


[29] 역사적 풍경화가 장샤를조세프 레몽 Charles-Joseph Rémond (1795-1875)는 아카데미에서 베르탱과 장바티스트 레그놀 Jean-Baptiste Regnault (1754-1829)을 연구했으며 1821년 풍경화 부문에서 로마상을 받았다. 루소는 14살에 그와 함께 공부했고 이후에는 기용 레티에르 Guillon Lethière의 화실에서 공부했는데 파리에 있는 그의 화실은 다비드 화실과 라이벌 관계였다. 허버트, 『Barbizon Revisited』, p. 174.


[30] 파리의 ‘예술가 공동체 Cercle des Arts’ 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Notice des Études peints par M. Théodore Rousseau』, exh. cat. (Paris: L’Académie des Bibliophiles, 1867). 이 도록에 실린 필립 뷔르티의 서문도 참고하라. 새로운 도시 부르주아들 사이에 형성된 유화 습작을 포함한 풍경화 시장에 대해서는 특히 그린의 다음 논문을 참고할 것. Nicholas Green, ‘Circuits of Production, Circuits of Consumption: The Case of Mid-nineteenth-century French Art Dealing’, Art Journal, xlviii/1 (Nineteenth-century French Art Institutions, Spring 1989), pp. 29–34; 사이먼 켈리 Simon Kelly, ‘The Landscapes of Théodore Rousseau and their Market’, 바르비종화파의 역사적, 기술적 연구에 대해서는  Andreas Burmester편 , 크리스토프 하일만Christoph Heilmann, 마이클 치머만Michael F. Zimmermann, 『Barbizon: Malerei der Natur– Natur der Malerei』 (Munich, 1999), pp. 419–36; 앤 와그너Anne Wagner, ‘Courbet’s Landscapes and their Market’, Art History, iv/4 (December 1981), pp. 410–31; 또한 다음도 참고하라. 페트라 추Petra ten-Doesschate Chu, 『The Most Arrogant Man in France. Gustave Courbet and the Nineteenthcentury Media Culture』 (Princeton, nj, 2007).


[31] 보임, 『The Academy』.


[32] 메리 모튼 Mary Morton은 다음 글에서 이 작품에 대한 기술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New Discoveries’, Nineteenthcentury Art World-wide, vii/1 (Spring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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